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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22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21 [에필로그] by Impulse "아직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았네?" 벽에 기대어 앉아 기타 줄을 튕기고 있는 저의 손을 끌어당기며 호석이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제 왼손 약지 손톱 거의 끝물에는 작달막한 주홍빛 물이 남아 있었다. 지난 가을, 제가 잠에 곯아떨어진 사이 호석이 몰래 제 손가락에 장난을 친 것이 그 주홍빛 물의 원인이다. 그때는 엄지손가락만 빼고 여덟 손가락을 다 봉숭아 물을 들여놨었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물들은 손톱은 길어가며 점차 사라지고 이 넷째 손가락 하나에만 겨우 조금 남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명색이 경찰인데 동네 민구스러워서 어떡하냐며, 자기만 당한 게 억울하니 할 거면 형도 똑같이 하라는 저의 땡깡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고 도망만 다니던 호석에게 제법 삐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무룩.. 2020. 8. 13.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 후기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시리즈를 끝내고 쓰는 후기입니다. 오랜간 붙잡고 있던 시리즈였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지금의 기분과 마음을 되짚어보기 위한 기록으로서 또 이렇게 자판을 두들깁니다. 할 이야기가 많다보니 장문의 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그 모든 후기들처럼, 이것 역시 걸러들으시거나, 거르고 안 읽어 주셔도 됩니다. 후기는 모다? 뽀너스 스테이지다. 지금까지의 후기들은, 시리즈를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에 후루룩 썼던 것 같은데. 이번 후기는 조금 제게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네요.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데, 그래서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를 기분입니다. 그 막연한 기분에 이번 후기는 시리즈를 마친 후로도 한동안 안쓰고 도망을 다니다 일주일은 훌쩍 넘어서야 겨우 이렇게 붙.. 2020. 8. 7.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20 [완결] by Impulse "...널 찾으러 갔었어."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듣는 호석의 목소리이다. 이미 자정이 지났으니, 정확하게는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라며, 정국은 호석의 동그란 머리통 위에 뺨을 얹은 채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빗속에서의 긴 입맞춤 끝에 찾아온 묘하고 어색한 분위기에는 묵언의 주문이라도 걸려있던 것일까. 손가락을 걸어잡은 채 비를 맞으며 함께 오르막길을 따라 옥탑방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상대방의 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들고 욕실 앞에서 저 씻을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미 한참이나 늦은 시각이지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벽에 나란히하고 앉아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지금까지, 두 사람 모두 말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쑥스러워서 무슨 말을 어떻게 .. 2020. 8. 6.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9 by Impulse "...야." "...예에." "야, 이 씨벌놈아." "...예에..." "이 꼴 보이냐? 보이냐고오." "죄송함다." 정국은 병실 침대 옆에 붙어 앉아 시뻘건 얼굴로 씩씩대는 김경장의 화풀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화가 날 만도 하다. 지붕에서 떨어지기는 같이 떨어졌는데 한 사람은 왼쪽 쇄골서부터 팔, 그리고 갈비뼈까지 복합골절을, 다른 한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양 멀쩡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된 연유는, 김경장이 정국의 인간 쿠션 역할을 아주 제대로 했기 때문에. "니 떨어지면서 일부러 내 위로 떨어졌지? 너 나랑 떨어지면서 눈도 마주쳤잖아. 내 멱살도 잡고, 어? 이 새끼야, 어? 어?" ".......아잉데여?" "아니긴, 뭐가 아ㄴ...!!!! 으흐억, 옆구.. 2020. 8. 2.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8 by Impulse 꽃이 시들어 땅으로 떨어져 버리듯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토록 궁금하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야기의 마지막은 비참할 정도의 자기혐오와 자아부정으로 마치 깊고 커다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무섭고도 아찔했다. 제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손길 위로 몇 번 째일지 모를 호석의 한숨이 또 다시 쏟아져 나온다. "...너는 참... 나빠." 그렇게 말하는 호석에게 정국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재해 복구를 하느라 지친 몸과, 간만에 들어간 알코올과, 여전히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부드러운 손길에 취해 점점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멍청한 머리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정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영글어지지 못하는 언어의 혼돈을 해결.. 2020. 7. 28.
[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7 by Impulse 콜록, 콜록, 콜록, "너 요즘 왜 그렇게 기침을 많이 해?" "글쎄요... 올해는 감기가 빨리왔나..." '익숙해짐' 이란 말을 달리 치완하자면, '둔해짐'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서 자서, 또는 저를 찾아 뛰어다니느라 힘들어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던 태형의 마른기침은, 어느 틈엔가 서서히 일상생활 속으로 녹아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찬 물로 씻고 나온 후 얼마간.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잠들기 전에도 얼마간. 그것이 이제는,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기침 소리만 듣고도 태형이 일을 마치고 골목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호석이 알 수 있을 정도까지. 그 기침소리는 이젠 환청이 들릴 정도로 호석의 귀에 달라붙어, 어떨 땐 태형이 없음에도 기침 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에 주위를.. 2020. 7. 23.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6 by Impulse 여명을 지나 이른 아침이 밝아오면, 뭍은 드러나고 사람들은 분주해진다. 정국은 이미 제집에 들어갈 생각은 당분간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 각오를 다짐했다. 학교는 피난소 외에도 홍수 재해 대책 본부로서 운영되고 있었고, 해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 곳을 거점으로 마을을 복구 시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기에 한동안은 학교에서 쪽잠을 자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저는 그렇다고 치고, 그럼 호석은? 다른 곳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 반지하 방이 당장 생활을 이어나갈 만한 환경이 못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저와 마찬가지로 이 피난소에서 힘들게 계속 노숙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 역시 싫고 마음에 안쓰러웠다. 일이 생기면 바로 튀어 나가야 하는 저야.. 2020. 7. 18.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5 by Impulse 하필 비번인 이른 아침, 늦잠을 계획하며 이불 속에서 단잠에 빠져있던 정국의 정신을 뒤흔드는 전화벨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댔다. 아니, 정말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천둥이 치기도 하였다. 비도 많이 오는데 이 아침에 무슨 전화냐 꿍얼거리며 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로 수화기를 받았을 때, 그 너머에서 다급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전순경아!!! 태풍 때문에 지금 물난리 났어, 임마!!! 장비 챙겨 입고, 사람들 국민학교로 대피시켜!! 얼른!!!" 그 말이 꿈인지 뭔지 분간이 안 가 대답도 없이 멍하니 눈만 끔벅대고 있으니 이번엔 수화기 너머로부터 귀를 터뜨리기라도 할 듯 온갖 쌍욕들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까드드득, 하늘이 쪼개지기라도 하듯 울려 퍼진 우레 소리와, 옥탑방 천장.. 2020. 7. 10.
[뷔홉,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4 by Impulse 언제부터였을까. 이 끝을 알 수 없는 악순환의 연속은. 거의 매일이 전쟁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호석은 잔소리를 하고 들었고, 태형은 지지 않고 고함을 치며 반박을 했다. "형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는 좋아해 줄 수 없다는 거네요? 예, 잘 알겠어요." 그 오해 섞인 못된 말을 매번 방패처럼 들이밀며 저를 궁지로 몰아넣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매달리는 저를 보며 내심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저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며 어디론가 나가 버리고. 그런 저와 태형의 엇나간 말과 행동은 모두 자신의 말과,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가난의 탓임을 알기에 미안해하고. 어떤 때는 새벽녘에 몰래 들어와 서늘한 부엌 구석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콜록대며 잠이 든 태형을 발견하기도 하고, .. 2020. 6. 24.
[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3 by Impulse 기어이 태형은 휴학을 하겠다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와 생활비는 스스로가 벌겠다며, 태형은 일주일에 나흘은 노동판으로 일을 나갔고, 나머지 날들은 집에서 몸을 쉬거나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히려 둘이서 같이 보내는 시간도 늘고, 태형도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며 꽤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쳤었다. 더 이상 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일하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나 어떤 일을 하고 왔는가, 어떤 일이 더 벌이가 좋은가, 어떻게 해야 일의 요령이 느는가 등에 대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 때는, 자기도 확실히 아는 이야기라 맞장구도 칠 수 있고 정보도 줄 수 있어 오히려 전보다도 더 즐거웠었다. 몇 달은 그랬었다. 처음 몇.. 2020. 6. 20.
[국홉, 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2 by Impulse 최근 사흘간 호석은 대체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주부터 시작된 하수도 공사가 하필이면 정비소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이잉 위잉 포크레인 소리와 쿵쿵 쾅쾅 무언가 두들겨 부수는 소리, 드드득 다다닥 드릴로 바닥을 파내는 소리가 아침 출근해서부터 저녁 퇴근할 때까지 계속되다 보니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라고, 입 끝을 축 늘어뜨린 호석이 그렇게 투덜거린다. 호석의 기분이 엉망인 것과는 별개로, 정국은 대체적으로 기분이 몹시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음과 땅에서부터 울려오는 진동을 참다못한 호석이 하루가 멀다하고 파출소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다. 정비소 철문까지 닫아걸고는, 무슨 일이 있으면 파출소로 찾아오라는 쪽지까지 붙여놓는 철저함까지... 2020. 6. 16.
[뷔홉,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1 by Impulse 땅에 반쯤 묻혀있는 그 단칸방에서, 태형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뜨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 작업장으로 나가기 위해 일으키는 몸을 커다란 손에 붙잡혀 품에 갖혀선, 뺨과 목덜미에 부비적대고 들어오는 입술을 키득거리며 받아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자라고 하는데도 굳이 신발장까지 배웅을 나와 채 뜨지 못한 눈을 하고 손을 흔드는 태형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아침 공기를 맞이하며 집을 나서는 것 역시, 익숙해지는데에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면에 겨우 솟아 있는 창문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시간엔 늘 커텐이 드리워져 있었다. 덕분에 대체적으로 어둑했던 그 방 안은 늘 찬기와 습기로 눅눅해지기.. 2020. 5. 23.
[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0 by Impulse 매앰 맴맴맴맴 매앰-------- 장마가 지나자 땅 속에서 솟아나온 매미들이 온 천지에서 시끄러웠다. 습한 공기는 중천에서 내리 꽂듯 쏟아지는 태양열에 의해 잔뜩 달구어져 마치 찜통 안에 들어있는 듯 숨이 턱턱 막히고, 누런 흙바닥은 지글지글 달아올라 아지랑이를 아른아른 피워올린다. 아직도 기억하는 숫자, 37.9도. 단전에서부터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드는 더위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그런 더위 속에서 호석은 전역을 했다. 부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중대장에게 경례를 하고, 후임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하루 하루가 지옥 같았던 군대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었다. 모친상을 당한 이후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이들의 배웅과 응원을 등에 업고,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2020. 5. 16.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9 by Impulse 동네가 아무리 평화롭다곤 해도, 사람도 몇 없는 파출소에 순경 둘이 농땡이를 치다보니 안걸릴래야 안걸릴 수가 없다. 얼마 전 다녀간 국회의원의 사무실에서 고생들 했다며 면피용으로 쌀포대 몇을 보냈다. 그것을 동네 어르신들께 나누어 줄 만큼 나누어 준 뒤 파출소장은 김경장, 그러니까 정국의 사수이자 선배인 그에게 허리가 편찮아 쌀을 받아가지 못하신 어르신께 가져다 드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심부름을 가기는 귀찮고 힘 좋은 후배놈은 부려먹어야 제 맛이라 생각하는 김경장은, 그날따라 아침나절부터 일찍이 호석의 정비소로 나들이를 나선 정국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 한 시간 쯤 빈둥빈둥 기다리다가, 따땃하니 날이 좋은 봄날씨의 유혹은 이기기 힘들었던 관계로, 김경장 역시 칙칙한 .. 2020. 5. 9.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8 * 과격한 언어와 행동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면역력이 없으신 분들은 주의해 주십시요. by Impulse "선배도 그림 한 번 그려보실래요?" "...난... 그림 못그려." "그럼 제가 가르쳐 줄게요." 그리고 있던 스케치북을 훌떡 한 장 넘기고, 태형은 호석의 팔을 잡아 일으켜 제가 앉았던 이젤 앞으로 끌고와 자리에 앉혔다. 노트 필기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연필을 쥐게 만들고, 그 손 위에 커다란 태형의 손이 겹쳐온다. "...팔을 이렇게 하는거에요." 등에 딱 붙은 태형의 가슴과, 어깨에 걸쳐진 턱이 마치 뒤에서 껴안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붙잡힌 손이 들어올려져 스케치북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죽, 크게 선을 긋는 시늉을 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는 땀으로 축축해졌고, 어쩔 줄 모르는 얼.. 2020. 5. 2.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7 by Impulse 매번 순찰을 핑계로 나가 돌아다녀도 별 일 없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파출소이긴 해도, 가끔은, 아주 아주 가끔은, 그래서는 안되는 날이 있다. 예를 들면, 무슨 국회의원 나부랭이가 민생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허례허식을 챙기러 온다는 소식이 떨어진다던가 하는 그런 날 말이다. 그럴 땐 멀쩡한 파출소 책걸상의 위치를 이래저래 바꾼다던가, 안그래도 깨끗한 파출소 안을 더더욱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던가, 이쪽에 있는 서류 뭉치들을 저쪽으로 옮기다던가, 아무튼 쓸데없는 푸닥거리를 하느라 정신이 쏙 빠진다. 그 일이 끝나는대로 해방이나 되면 좋겠지만, 선량한 동네 주민들로부터 의원의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모순 투성이 명목 하에 망할놈의 의원을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기까지 해야 하니, 하루가 그렇게.. 2020. 4. 27.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6 by Impulse 기어이 비가 쏟아졌다.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가 바람 따라 나부끼던 흙먼지를 잠재우고, 물 웅덩이를 하나 둘 만들어가는 것을 가라지 벽에 둘이 나란히 등을 붙이고 앉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늘 자리를 비우는 사장님은 오늘도 여전히 없었고, 이런 날엔 자동차든 자전거든 고쳐달라 찾아오는 손님 역시 없을 것이다. 없길 바란다. 쌀쌀한 바람이 가라지 안으로 불어와 서늘하게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슬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고 추운 것을 어필하려, 콜올록 콜록, 과장스럽게 기침을 하자 호석이 움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본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정국은 그 팔에 팔짱을 엵듯이 걸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 몸을 바싹 붙였다. 호석의 몸에서 꽃향기를 품은 봄처럼 좋은 향이 났다. 맞붙은.. 2020. 4. 27.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5 by Impulse 갓 사랑을 깨달았을 땐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인다던데. 옥탑방 평상에서 소주로 나발을 불며 내려다 보는 세상은, 핑크빛은 커녕 얼룩덜룩 무채색으로 검고 우울하다. 청승맞게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사이로, 저 멀리 언덕 중간에 붉게 빛나고 있는 교회 십자가가 이 어둡고 음울한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무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무덤 한구석에 박혀 있는 반지하 단칸방을 떠올린다. 그 어두컴컴한 방 안에 먹히듯 들어가던 얇은 뒷모습. 선이 가늘고 청량한 얼굴과 달리 여러가지 감정을 넘치도록 담고 자신을 바라보던 두 눈. 그 두 눈이 도깨비 불처럼 어디까지고 자신의 마음을 쫓아와 엉망진창으로 흔들어대고 두들기고 괴롭혔다. 참으로 이 마음은 선악과가 틀림 없다. 마냥 순수한 행복감에 젖어 눈 .. 2020. 4. 27.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4 by Impulse 살구꽃이 한 두 송이 언뜻 피기 시작할 무렵, 정국은 호석의 아주 작은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정비소에 걸린 유일한 유화를 구경하기 위해 자전거들이 세워진 벽 앞에 서 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실이다. 호석이 정국의 자전거를 다 고쳐놓았다. 어느 틈에? 다시 부술까? 맨손으로 부술 수 있을거 같아. 그 자전거가 제 손으로 되돌아올까봐 속으로 전전긍긍 눈치를 보고 섭섭한 마음에 괜히 퉁퉁거리는 날들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자전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전거가 제 손으로 되돌아 온다면 자신은 이번엔 어떤 핑계를 들어 정비소를 찾아와야 할까 머리를 쥐어짜던 날들이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자전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다 나은 자전거는.. 2020. 4. 27.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3 by Impulse 자전거는 호석에게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깟 낡은 자전거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아주아주 오래도록 고쳐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전거는 선녀의 날개옷이다. 매일 호석을 찾아갈 수 있는 훌륭한 볼모이자 구실이기에. 정국이 매일 정오 순찰을 돌은 뒤 꼬박꼬박 찾아가는 그 정비소는 칭찬으로도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갖출 것은 다 갖춘 소박한 곳이었다. 두 칸인 자동차 정비 가라지 중 한 곳을 완전히 자전거 수리소로 자리를 낸 것을 보아, 그닥 자동차 손님이 붐비는 곳은 아닌듯 했다. 대신, 아이들이 많은 이 동네 특성 상 자전거 손님은 호황인 듯, 그 큰 가라지 한 켠이 수리를 필요로 하는 자전거들로 빼곡했다. 정국의 아픈 자전거 역시 다른 환자 .. 2020. 4. 27.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2 by Impulse 괜히 미아 보호 기록부를 펼쳐보며 혼자 감상에 빠졌다가, 괜히 그 사람이 누웠던 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히 그 사람을 업고 왔던 골목길을 혼자 걸어보다가, 괜히 그러게 되는 것들. 정국이 호석을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은, 개나리 가지들이 샛노란 별 모양의 꽃들을 폭포수처럼 흐드러뜨리고 있는 높다란 담벼락 밑에서 우연히였다. 남색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뺨에는 한줄기 기름때를 뭍히고,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한 개나리를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을 우연히. 쨍하니 맑은 봄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따라 파출소로 향하던 중이던 정국은 허겁지겁 브레이크를 꽉 눌러 잡았다. 끼이익, 하는 귀를 긁는 마찰음을 내며 자전거가 덜컥, 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니, 멈.. 2020.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