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아직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았네?"
벽에 기대어 앉아 기타 줄을 튕기고 있는 저의 손을 끌어당기며 호석이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제 왼손 약지 손톱 거의 끝물에는 작달막한 주홍빛 물이 남아 있었다. 지난 가을, 제가 잠에 곯아떨어진 사이 호석이 몰래 제 손가락에 장난을 친 것이 그 주홍빛 물의 원인이다. 그때는 엄지손가락만 빼고 여덟 손가락을 다 봉숭아 물을 들여놨었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물들은 손톱은 길어가며 점차 사라지고 이 넷째 손가락 하나에만 겨우 조금 남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명색이 경찰인데 동네 민구스러워서 어떡하냐며, 자기만 당한 게 억울하니 할 거면 형도 똑같이 하라는 저의 땡깡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고 도망만 다니던 호석에게 제법 삐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무룩해진 저에게, 홍수를 버티고 자란 몇 안 되는 귀한 봉숭아 꽃에서 따낸 꽃잎들을 모아놓았다가 액땜하는 부적 같은 의미로서 저에게 다 써버린 바람에 더 이상은 구할 수 없게 되었다며 미안해하는 호석의 얼굴에 그나마 삐졌던 속내도 오래 가질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물들어 버린 손톱은 결국 다시 자라날 것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제 걱정을 호석이 조금 덜을 수 있다면야 1년 365일 빨간 매니큐어라도 바르고 다닐테다. ...물론 말만이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소리다, 말만.
그건 그렇고.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호석이 눈치를 슬슬 보는 것이 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이럴 땐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인 것을 정국은 알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는 듯 그렇게 아무 말 않고 기타 줄을 튕기고 있으면, 아니나 다를까 호석은 딴청을 피우는 듯 한참 만에 말을 뱉는다. 여전히 제 네 번째 손가락은 붙잡고 꼼지락 대면서.
"...내일, 첫눈이 올거래."
"벌써 첫눈 올 때가 됐어요? 내일 휴일인데 잘됐네. 집에서 같이 눈구경이나 해요. 눈 올 때, 여기 옥상에서 동네 내려다보는거 꽤 운치 있어요."
"응... 근데 있잖아, 너 그거 알아...? 첫눈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그러던데..."
그 말이 뭐라고 뱉어놓고 제 눈치를 살살보는지, 정국은 순간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어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흫, 하는 이상한 콧김 소리는 좀 났지만 아마도 들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끔가다 한 번씩 이렇게 사람 미치게 만드는 소리를 한다. 무슨 속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렇게 봉숭아 물이 남아있는 제 손가락을 만지면서 쑥쓰러운 듯 그런 말을 하면, 퍽 제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것처럼 들린다. 제 첫사랑이 누군지나 알고. 스멀스멀, 놀리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어 그럼 내일 첫눈오면 나 첫사랑 이루어지는 건가? 근데 형은 내 첫사랑이 누군지 아는거에요?"
"...........나야?"
"예?"
".......나 아니야?"
우물쭈물 하면서도 당당히 묻는 그 자신감과 기대하는 눈빛에 외려 정국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제 나이가 몇인데, 무슨 근거로 저를 지금껏 첫사랑 한 번 못 해봤던 사람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의문과는 별개로, 황당해 하는 제 얼굴을 보며 점점 서운함과 당혹감이 서려가는 호석의 얼굴이 참으로 볼 만 했다.
"내 첫사랑이 형이에요? 왜 형이라고 생각해요?"
"...너는...! 처음엔 지가 나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나한테 막 그랬으면서..."
"그거는... 아니, 근데 형은 진짜 내 첫사랑이 형이었으면 좋겠어요? 정말요? 왜요? 왜?"
"...몰라, 이 바보야!! 말이라도 좀...! 으휴, ...진짜 바보다, 넌!!"
아니면 말 것이지 캐묻기는 왜 캐묻느냐고 씩씩대는 얼굴은 민망함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담요를 확 걷어채는 바람에 깔고 앉았던 정국이 옆으로 나가떨어지고, 그 속으로 숨어들듯 쏙 들어가 이불로 둘둘 누에고치처럼 말아덮은 호석은 냅다 벽을 보고 누워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삐진 것을 달래려고 그 몸 위로 이리 치대고 저리 뭉개고 해 보아도 바락 짜증을 부리는 것이 아주 단단히 속이 상한 듯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속이 상할 일일까. 호석은 그렇게까지나 자신의 첫사랑이 되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그렇게까지나 제 첫사랑이 자신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던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삐진 것이 며칠은 갈 것 같은데. 이렇게나 삐질 줄 알았다면 장난도 치지 말 걸 그랬다며 정국은 이제 와 때늦은 후회를 한다.
제발, 내일 첫눈이 오게 해주세요...! 맨날 틀리는 일기예보지만, 내일만큼은 제발 좀 맞아주세요...!! 그래서 이 사람 삐진 속 좀 달랠 수 있게...!!
계절과 날씨는 언제나 정국의 편이다.
어째 제 시각에 비해 날이 어둡다 싶어 커튼을 젖히고 성에 낀 창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밖을 내다보면, 이른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 온통 하얗고 고요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옆을 돌아보면, 제가 커튼을 젖힌 탓에 잠이 깬 듯 한껏 팔다리를 늘려 기지개를 켜는 호석이 보인다. 이 겨울에 옷은 한껏 끌려올라가 배꼽이 훤히 드러나서는. 그 차게 드러난 배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제 팔로 둘러안아 온 몸으로 뭉개고 들고, 동그란 뺨에 뽀뽀를 하는지 아니면 빨아먹는지 아무튼 저돌적으로 입을 맞추면, 마치 만화영화에서나 나오는 소리처럼 이이잉, 찌그러진 소리를 내며 제 얼굴을 밀어낸다.
"형... 첫눈 와요."
".........어쩌라고."
"나가자. 나가서 옥상에서 첫눈 쌓인 동네도 구경하고..."
"추워."
"내 첫사랑도 좀 이뤄주고."
"..........."
입이 댓발 나와서는, 생각하는 게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 어제는 자기가 첫사랑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러더니 이제 와서 무슨 알랑방귀를 뀌느냐고 속으로 욕을 한 사발 하고 있는 것이 귀에 들리는 듯 뻔했다. 그러나 정국은 억울하다. 저는 왜냐고만 물었지, 아니라고는 한 적이 없는데. 물론 그것까지 포함해서 놀려먹을 생각이긴 했지만.
여전히 삐져서 꿈지럭대기만 하는 호석에게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속 시원한 방법이다. 벌떡 일어나 두꺼운 점퍼를 둘러 입고, 여전히 누워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호석을 담요 채로 둘둘 말아 꽁꽁 싸맨 뒤 훌꺽 일으켜 세워서는. 그렇게 미이라, 혹은 포대기처럼 이불에 폭 파묻힌 호석을 정국은 번쩍 들어안아 밖으로 끌고 나간다.
"야아아! 이 힘만 드럽게 센 놈아!!"
"그러게 나가자고 할 때 나갔으면, 응?!"
그렇게 대롱거리는 호석을 어거지로 안아 옮기고 투닥거리며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서면, 큼지막한 눈방울들이 훤하게 뚫린 하늘 아래 펼쳐진 동네를 흰색으로 물들이듯 사라락 사라락 쏟아지고 있었다. 쨍하니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하아, 하고 조심스레 뱉으면 뽀오얀 입김으로 변한 그것은 제 눈앞에서 춤을 추다 하늘 위로 사라져간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든 것들을 둘러보는 호석의 날렵한 코 끝이 한기로 발갛게 물이 든다.
"...하얗다. 온통."
"예쁘죠? ...꼭 같이 보고 싶었어요, 여기서. 같이."
"응... 예쁘네. ...좋다."
정국은 제 팔 안의 사람을 더욱 더 껴안아 품속에 고정을 시키고, 주홍빛 예쁜 무늬가 남은 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보란 듯이 그 눈앞에 내보인다. 때 맞춰 커다란 눈송이가 마치 제 자리를 찾기라도 하듯 그 손톱 위로 사뿐히 내려앉자, 정국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호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봉숭아 물에 첫눈 닿았다. 그죠?"
"..................."
"첫사랑 빨리 이루어줘요. 형이 내 첫사랑이잖아요."
"......나 아니라며...!"
"난 아니라고 안했는데? 왜 그랬으면 좋겠냐고만 그랬지."
".....야이씨!!! 장난하냐?!"
죄다 말장난인 것만 같고, 여전히 알쏭달쏭한 것을 가지고 저를 들었다 놨다 장난을 치는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지 호석은 둘둘 말린 담요 앞섶을 훌꺽 걷어 젖히곤 난간에 쌓였던 눈을 한 움큼 집어 정국에게 왈칵 집어던졌다. 뭉쳐지지도 않은 눈가루들은 푸스스 쏟아져 정국에게 닿았다가 마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진다. 개중에 얼마는 올려입은 점퍼 속으로까지 파고들어 와, 정국은 갑작스러운 차가운 감촉에 질겁을 하며 몸을 떨었다.
허겁지겁 옷 속에 들어온 눈송이들을 탈탈 털어내고 돌아보면, 담요를 망토처럼 둘러쓴 호석은 이미 멀찌감치 도망을 치곤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약을 올리고 있다. ...이기지도 못할 것을 매번 이렇게 귀엽고 유치하게 도발을 하는 것은, 이쯤 되면 저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제게 애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형이 먼저 시작한 거다?!"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미끄러운 바닥도 아랑곳 않고 옥상을 가로질러 단숨에 우다다 달려 나가면, 그 모습을 놀리듯 보던 호석이 경기를 일으키듯 펄쩍 뛰어올랐다가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으로 도망을 친다. 그것을 여유롭게 쫓아가면서도 일부러 잡을 듯 말 듯 구석으로도 몰았다가, 또 원하는 쪽으로 도망치게도 만들었다가. 그렇게 몰이놀이를 하듯 장난을 치면, 제 예상으로부터 어떻게서든 벗어나려 낑낑대고 애를 쓰는 호석이 참으로 하찮고 귀엽기만 하다. 그걸 보는 게 마냥 재미있어 또 그렇게 한쪽으로 몰아넣으면, 제 손을 피해 야트막이 눈 쌓여 미끄러운 옥상을 슬리퍼를 걸어신은 맨발로 뒤뚱뒤뚱 뛰어가다가,
"어어, 형, 뛰지 마라, 다친다! 다친다!!"
아니나 다를까 쭐떡 미끄러진다 싶더니만 옆에 있던 평상 위로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야 만다. 평상이 있어서 망정이지, 잘못 넘어지면 어쩔 뻔했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는 정국과는 달리, 눈 쌓인 평상에 걸터앉은 호석은 미끄러진 것이 쪽팔리고 민망한 듯 제 쪽을 쳐다보며 까르륵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괜찮아요? 안다쳤어?"
"......응."
정말 괜찮은 건지 걱정스레 살펴보는 정국을 잠시 올려다보던 호석이,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주변을 도리도리 분주하게 살피기 시작한다. 뭘 찾기라도 하는 건지. 그 모양이 퍽 다람쥐 같아서 저도 모르게 피시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확인을 마친 듯, 고개를 들어 저와 눈을 마주친다 싶더니만. 따뜻한 손이 제 뺨에 얹혀 아래로 끌어당기고, 이내 부드러운 입술이 제 입술에 닿았다가, 눈 깜짝할 사이 쪽 소리만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사람이 없는지까지 확인해 놓고 뽀뽀만 살짝 하고 떨어져 나가는 법이 어디있을까. 아쉬운 마음에 더 깊게 다가가려 고개를 들이미는 것을,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밖에서 이러지 말라며 피하고 밀어내는 호석은 정말 매번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나 호석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잔뜩 울상이 된 채로 정국은 오늘도 제 욕구를 한 발 물린다.
"...추워. 발시려워."
"이제 그만 들어가요. 나도 이제 춥다."
차게 얼어 있는 호석의 손을 붙잡아 잡아 당겨 일으키면, 마치 자석이라도 붙은 듯 호석의 몸이 제게로 쩔꺽 맞붙는다. 그것을 추위를 녹인다는 변명 하에 한가득 부둥켜안고는, 이제는 두 사람의 공간이 되어버린 옥탑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해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하다.
씻고, 식사를 마치고, 그것을 치우고, 집안을 정리하고. 그런 소소한 오전의 일상을 끝마치고서도 첫눈은 여전히 포슬포슬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 말도 없이 눈 내리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 세상은 다 사라져버리고 두 사람이 지내고 있는 이 옥탑방 만이 이 세계의 전부인 것만 같다. 그 공간을 가득히 채우는 보리차의 고소한 냄새와, 간간히 들려오는 창밖의 바람 소리, 그리고 제 한쪽 어깨에 기대어진 그 무게와 온기. 어쩐지 까물락 까물락 졸음이 쏟아지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함께 보내는 이 휴일을 잠으로서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바닥에 놓여있는 호석의 손 위에 가만히 제 손을 얹으면, 느껴지는 체온은 어쩐지 지난 봄날의 따스함을 연상시킨다. 살구꽃이 화사하게 피었던 그 봄날. 별 말도 없이 그때의 추억을 복기하듯 회상할 때에, 정국은 문득 아직 이해하지 못한 궁금증 하나가 남아있던 것이 떠올랐다.
"형... 그때요, 그때... 나한테 그 이야기들을 왜 해준 거에요?"
뜬금없는 질문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돌아오는 답도 그걸 왜 이제야 묻느냐, 또는 별 시답잖은 걸 다 물어본다, 그런 타박이 돌아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너가 나를 싫어해 줬으면 해서."
대수롭지 않게 툭하고 떨어진 그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기에 정국은 감히 호석의 눈을 마주칠 생각도 못 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 이야기들의 어디에서 저가 그를 싫어할 구석이 있었을까? 아프고 안타깝고 서럽고. 온통 상처투성이인 그의 과거를 제가 감히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그 이야기들마저 온전히 그의 일부분인데.
"...나, 나 안싫었는데...?"
"...그러니까 니가 바보지... 바보야."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제 얼굴이 웃기다는 듯 바라보는 호석은 그렇게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제 뺨에 입을 맞춘다. 호석이 그럴 때마다 정국은, 매번 어쩐지 쑥스러워지고 부끄러움이 생겨난다. 경험도 없는 어린애 취급 받는 것 같아 묘하게 분하면서도, 그 손길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양가적 감정을 어떻게 취급해야 좋을지 아직도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전에 누구랑 어떻게 사랑을 했는지, 그런 거 들으면, 그냥... 싫잖아. 아닌 거 알아도 그냥 자기가 처음으로 제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잖아. 그러니까 자기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자꾸 예전에 누구랑 어땠다느니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하는 나를... 싫어하고 알아서 떠나가주길 바랐던 마음이 반. 그리고... 그런 이야기라도 계속해서 들어주는 바보 같은 너한테 자꾸 기대고 싶고 나 좀 알아줬으면 했던 마음이 반."
맨날 저를 보고 바보라고 불렀던 그의 마음에는 그런 생각들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고, 정국은 어쩐지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저를 바보라고 부르는 그 역시 바보이다. 욕을 하고 모질게 굴어도 사람의 마음이 그리 쉽게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싫어지기는 커녕 더욱 마음이 쓰이고 애정만 깊어지는 것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바보라서 다행이다."
"...응."
자신도, 호석도.
애틋한 마음에 얹혀진 손을 엵듯이 붙잡으면, 봉숭아 물이 남은 저의 네 번째 손가락을 가만히 쓰다듬는 호석의 감촉에 제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조금 돌려 생각하자면 호석의 입에서 어째서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 정국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첫사랑이 아니냐고 되묻던 호석은, 다시 말해 제가 처음으로 제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호석 자신이길 바란다는 것을 그렇게나 빙빙 돌려서 표현했던 것이다. 저를 많이 좋아한다는 그 쉬운 말을 호석은 그렇게나 애둘러한다. 겁이 많은 그는, 자기 감정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렇게 우회적이고 소극적이다.
"형이... 내가 처음으로 제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첫사랑이요. 알죠?"
그 말에 호석은 저를 올려다보며 푸스스스 웃음을 터뜨리더니만, 이내 귀를 발갛게 물들이고는 점점 바닥으로 밀려들어 가 이불 속으로 얼굴을 반쯤 숨겨버린다. 쑥스러워하는 그의 행동에서 정국은 제 말이 그가 바라는 것을 제대로 짚었음을 읽어내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마냥 어려운 퀴즈 같던 그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에 이젠 꽤나 익숙해 진 듯한 자신이 마냥 뿌듯하기만 해서. 정국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웃음을 머금는다.
그 잠시간의 적막 끝에,
"정국아... 커튼을 치자."
"눈 다 봤어요? 졸려요?"
그리 되물으며 이불 속에 파묻힌 호석을 내려다 보자면. 빼꼼히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 속에는.
"..아니. 이 세상에 너랑, 나랑... 둘만 남게."
뒷 이야기는 포스타입에 공개되어있습니다.
2020/8/15 부터 유료로 전환됩니다.
https://satellite-99.postype.com/post/740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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