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살구꽃이 한 두 송이 언뜻 피기 시작할 무렵, 정국은 호석의 아주 작은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정비소에 걸린 유일한 유화를 구경하기 위해 자전거들이 세워진 벽 앞에 서 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실이다.
호석이 정국의 자전거를 다 고쳐놓았다.
어느 틈에?
다시 부술까?
맨손으로 부술 수 있을거 같아.
그 자전거가 제 손으로 되돌아올까봐 속으로 전전긍긍 눈치를 보고 섭섭한 마음에 괜히 퉁퉁거리는 날들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자전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전거가 제 손으로 되돌아 온다면 자신은 이번엔 어떤 핑계를 들어 정비소를 찾아와야 할까 머리를 쥐어짜던 날들이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자전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다 나은 자전거는 여전히 그 정비소 안에서 얌전히 잠들어 정국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호석이 정확하게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국은 그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를 다만 희망한다.
저 자전거를 돌려주는 것으로 이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것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닐까. 매일 정국이 찾아오는 일상이 단절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사실은 자신이 오는 것을 은근히 반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호석에게 좀 더 다가가도 좋지 않을까.
정비소에서 다른 손님의 자전거를 고치느라 집중하고 있는 호석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그가 필요로 하는 장비들을 건네어주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 고주알 떠들어댄다.
"아 오늘 진짜 힘든 일 있었어요. 계란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다가, 몰라, 뭐가 어떻게 됐는지 뒤로 쭉 미끄러졌다나봐. 그러면서 계란들이 길에 와장창 다 쏟아지고 난리도 아니어서 그거 막 같이 치우고, 계란 썩으면 냄새 장난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막 물 갖다 뿌리고, 지나다니는 자동차들 비켜가게 교통정리 하고 그랬어요. 아저씨가 계속 이게 얼만데 얼만데 하면서 하루 장사 다 망쳤다고, 아 너무 안타까웠어."
"그런 일이 있었어? 힘들었겠네."
호석이 자전거를 고치는 양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려는 척, 은근슬쩍 엉덩이를 두어뼘 정도 옆으로 스리슬쩍 옮겨붙인다. 허벅지가 닿을랑 말랑, 안보는 척 힐끔 그 틈새를 엿본다.
"아 근데, 형 그거 알아요? 국민학교 앞에서 애들한테 파는 병아리들 있잖아요. 그거 다 수컷인거. 암컷들은 키워서 알을 낳을 수 있는데, 씨종이 아닌 양계장의 수컷들은 대부분 키워도 쓸모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애들 코 묻은 돈으로라도 푼돈 벌어보자고 내다 파는 거래요."
"난 그런건 또 처음 알았네. 수컷으로 태어난게 무슨 죄라고. ...걔들도 암컷으로 태어났으면 좀 행복하게 살았을까?"
"모르죠, 그거야 우리가 닭도 아닌데."
반사적으로 응답을 하며 흠흠 헛기침과 함께 엉덩이를 비비적거리며 옮기는 것으로 자신과 호석의 허벅지 사이의 틈새를 마저 매꾼다. 바지 너머의 호석의 온기가 제 허벅지로 은근하게 전해져온다.
"근데 나도 예전에 멋모를 땐 귀여워서 한 마리 백원 주고 사와서 키웠던 적이 있는데, 막 점점 얘가 엄청나게 크는 거에요. 노랗던 애가 점점 크면서 솜털 대신에 하얀 깃털이 나고 머리에 볏도 나고 그러면서 새벽이고 밤이고 막 울어대는 거야. 주인집 아줌마가 나까지 쫓아내겠다고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야채 가게에다가 걔를 줬는데, 맛있는 배추 많이 먹고 잘 살라고. 근데, 어느 날부터 없어졌어요... 아마 복날 지난 다음이었나... 이름도 붙여줬었는데.... 너무 슬펐죠."
"..............야."
"왜요?"
뻔뻔하게 왜요, 라고 물어봤지만 호석이 정국을 부른 이유는 뻔하다. 딱 붙어 앉아 호석의 허벅지를 한 손에 잡고 마치 제 집 강아지 쓰다듬듯 위 아래로 쓸어대며 신나게 만져대고 있었으니까. 치우라는 듯이 눈으로 허벅지 한 번, 정국의 얼굴 한 번 번갈아보는 호석에게 얼버무리려는 척 배시시 무해한 웃음을 흘려보였다.
"아, 나 이거 버릇이에요. 버릇. 뭐 어때, 닳는 것도 아닌데."
".........나 원 참... 내가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정국에게 짐짓 화를 내려는 표정을 지으려다가 그 도를 넘어선 뻔뻔함에 그만 참지 못하고 호석은 왈칵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 사람을 웃게 만들었어.
이 사람이 나로 인해 웃었어.
그 사실이 정국의 마음을 한껏 뿌듯하게 만든다. 잔뜩 부푼 마음이 기분 좋은 웃음으로 터져나왔다.
가까이. 더 가까이.
웃고 있는 호석의 장갑 낀 손을 붙들고 흔들리는 어깨에 제 어깨를 치댄다.
마음에 싱숭생숭 봄바람이 분다.
살구꽃이 만발했다.
온 나무를 가득 수 놓은 작고 예쁜 그 꽃송이들은 여름 무렵 맺힐 주홍빛 열매를 예고하듯 진하고 달콤한 향을 힘껏 뿜어대며 정비소를 가득 채웠다. 바람은 배달부가 되어 살구꽃 향기를 잔뜩 싣고 정국이 정비소로 찾아오는 길목에 한껏 흩뿌린다. 눈을 감고도 그 정비소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진하게.
그 꽃향기를 따라 정비소를 향하는 정국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달 위를 걷는 듯 가볍다 못해 붕붕 떠 있었고,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오싹오싹 어깨가 떨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괜히 넥타이를 느슨히 했다가 단정히 보이고 싶은 마음에 바로 다시 조인다. 그랬더니 이번엔 정수리가 뜨거운 것 같아 괜히 경찰모를 한 번 벗어 부채질 하다가, 문방구점 유리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제대로 고쳐쓰고 앞머리를 다듬어 고친다.
정비소 콘크리트 담장 앞에 서서 폴짝 폴짝 서너번 뛰어 호석의 위치를 확인했다. 정국이 생각하기에 이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쁜 그 살구나무 아래에 호석이 그림처럼 그렇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국은 제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직사각형의 투명한 테이프 상자를 꺼내어 다시금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살짝 흔들면 달각달각 카세트 테이프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그것과 함께 동봉된 테이프 표지에는 지난밤 달빛 아래서 정국이 제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트랙 리스트와, 예쁘게 코팅 된 노란 개나리 한 송이가 곱게 붙어있었다.
그것은 정국의 호석에 대한 마음의 편린들이다. 나름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준비한 그것을 오늘 정국은 호석에게 처음으로 선물하고자 한다.
하나 둘 셋, 쉼호흡을 하고 언제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척 정비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름으로는, 꽤나 열심히 평소대로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어딘가 관절이 깡통 로봇처럼 삐그덕 대는 것 같은지. 아무쪼록 호석이 그런 바보같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했다.
이윽고 호석의 앞에 서서 저를 반기며 쳐다보는 그의 눈 앞에 불쑥, 그 카세트 테이프를 들이밀었다.
"오, 오다가 주웠는데."
"...? 경찰이 분실물을 주웠으면 주인을 찾아줘야지 날 주면 어떡해?"
"이... 거 주인이 형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영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정국이 내민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호석이 답답하여, 그 손에 끼워진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겨 던져버리고 무작정 테이프를 쥐어주었다. 그제서야 케이스 표지에 적힌 '호석이 형에게' 라는 글자를 읽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국을 쳐다본다.
"아니, 형이 지난번에 노래 좋다고... 잘한다고 그래서 내가..."
"어어?? 진짜?!"
"아이 진짜 별건 아닌데, 내가 정말 좋아해서, 형이... 형이..."
"나 들으라고 일일히 다 녹음한거야? 너가 불렀어?"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 힛, 하는 웃음과 함께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들이라서 형이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라는 한 마디가 왜 이리도 어렵고 쑥스러운가. 괜히 입술을 꾹꾹 씹으며 손가락으로 민망한 코 끝을 긁적였다. 슬몃 훔쳐본 호석의 얼굴이 만개한 살구꽃마냥 활짝 웃고있어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었다.
예쁘다.
구두 앞코로 괜히 흙바닥에 직 지익 선을 그리고 원을 그린다.
"와!!!! 들어보자!! 우리 경찰 아저씨 얼마나 잘 불렀는지 함 들어보자!!!"
"아! 이따가 나 가면 들어요! 뭐 하는 거야 진짜, 부끄럽게!!"
"부끄럽대!! 와 진짜 잘 불렀나보다!!!"
정국의 항변은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까르륵 웃음을 터트리며 후다닥 가라지 쪽으로 뛰쳐 나가는 호석의 뒤를 쫓았다. 그닥 넓지도 않은 정비소에서 술래잡기를 해 보았자 결과야 뻔하다.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얇은 손목이 정국의 손에 그러 잡히자 이번엔 잡히지 않은 손으로 테이프를 옮겨 쥐고 약 올리듯 달랑달랑 흔들어 댄다. 그 마냥 아이같이 천진난만하게 정국을 놀려대며 웃는 모습이,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저와 놀아주는 것 같아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뭘 해도 될 것 같았다.
잔뜩 고양된 마음이 기고만장해졌다.
잡힌 손목에 힘을 주어 훅 잡아당기자, 호석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정국의 쪽으로 쏠렸다. 그 몸을 넘어지지 않게 받아내는 척, 허리를 감싸안고 제 쪽으로 당겨올리자 마른 몸이 제 품 안에 한가득 안겨들어왔다.
그 몸을 번쩍 들어다 살구 나무 밑으로 원위치를 시키니 일순 방향 감각을 잃고 얼떨떨 한 듯 정신을 못차린다.
"너 힘 진짜 세다. 이게 무슨 일이야?"
"또 해줘요?"
"해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까르륵 대며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호석의 허리를 붙잡아 훌쩍 들어올려선 세 네 바퀴 빙글빙글 돌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내려 놓은 얇은 몸이 비틀대며 살구 나무에 등을 기댄다.
돌리는 쪽도 어지러워 비틀비틀, 살구 나무를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한다.
그렇게, 말 그대로 코 앞의 거리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정국의 팔 아래 갇힌 호석에게서 어느새 웃음은 사라지고, 다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정국의 마음에 강하게 박힌 그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당황스러움을 가득 담고 얼굴 가까이에서 방황했다. 반짝이는 봄볕 아래 살짝 그을린 피부와 봉긋하고 동그란 볼 위에 언제나처럼 묻어있는 한 줄기 기름때.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두 눈, 오똑한 코, 예쁘게 살짝 벌어진 입술.
그 입술.
그 입술에.
입술에....
그러나,
점점 다가가며 마주한 두 눈에는,
두려움을 한껏 머금은 거절만이 한가득.
정국은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국이 급하게 제 팔을 흔들어 셔츠 자락을 손바닥까지 끌어내려 말아쥐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지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밀어내지만 말아달라고 빌고 싶었다.
말아쥔 소매 자락이 호석의 뺨에 닿는 순간, 움찔, 어깨가 움추러 들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빼려고 드는 모습에 마음이 까맣게 멍들어버리는 듯 했다.
"맨날 볼에 뭘 이렇게 묻히고 다녀요."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살구꽃 봉오리보다 붉었다. 호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얼굴을 붉혔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정국은 알 수 있었다. 그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정국이 원래 하고 싶었던 행동이지만 일부러 하지 않으려 참은 행동이다. 그리고 호석은 분명, 정국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왜애애애애애애앵-------------------------
민방위 훈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교통 수단들은 경보가 울리는 동안 움직임을 멈춰야 하는 것 처럼, 정국과 호석 역시 마주한 그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귀에 꽂히듯 계속해서 울리는 경보음, 흙내음과 함께 섞인 짙은 살구꽃 향, 눈 내리듯 펄펄 쏟아지는 분홍색 꽃잎, 미움과 슬픔과 안쓰러움을 담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호석의 눈빛.
"왜 그렇게 쳐다봐요...?"
"...너가 누구인가, 왜 내게 벌을 주러 왔나 해서. ...넌 왜 그렇게 쳐다봐?"
"예뻐서요."
"...꽃이 예쁘긴 하지."
"...............꽃 말고,"
"말하지마."
"형이"
"말하지마. 하지마."
"형이 예쁘다구요."
경보 속에 섞여 잘 들리지도 않는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여전히 정국을 바라보는 호석의 눈빛이 다만, 붉게 물들어 습기를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한동안이나 계속 되던 민방위 훈련 경보가 끝이 나는 순간, 마치 걸려있던 주박이 풀리기라도 한 듯 호석은 정국을 밀쳐내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가장 아름다운 때를 누린 꽃이 옅은 바람에도 잎을 떨구고 스스로를 마감한다.
대체적으로 밝고 부드러운 호석은 종종 정국이 알 수 없는 것들을 계기로 차갑게 식어버릴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따사로운 봄날을 시기하는 꽃샘 추위처럼 정국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럴때마다 정국은 호석을 꽉 껴안아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 꽃다운 얼굴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따듯한 숨을 불어넣고 싶은 강렬하고 속된 충동을 느낀다.
당신 스스로의 싸늘함에 감기가 들지 않게.
당신을 위하는 듯 원하는 이 마음은 이미 감출 수 없는, 사랑이어라.
정국은 호석의 보이지도 않는 뒷모습을 한동안이나 우두커니 바라본 뒤에야 발걸음을 돌려 정비소를 나섰다.
[2019.06.25 작성 2020.04.06 재발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6 (0) | 2020.04.27 |
---|---|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5 (0) | 2020.04.27 |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3 (0) | 2020.04.27 |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2 (0) | 2020.04.27 |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1 (0) | 2020.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