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콜록,
콜록,
콜록,
"너 요즘 왜 그렇게 기침을 많이 해?"
"글쎄요... 올해는 감기가 빨리왔나..."
'익숙해짐' 이란 말을 달리 치완하자면, '둔해짐'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서 자서, 또는 저를 찾아 뛰어다니느라 힘들어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던 태형의 마른기침은, 어느 틈엔가 서서히 일상생활 속으로 녹아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찬 물로 씻고 나온 후 얼마간.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잠들기 전에도 얼마간. 그것이 이제는,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기침 소리만 듣고도 태형이 일을 마치고 골목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호석이 알 수 있을 정도까지.
그 기침소리는 이젠 환청이 들릴 정도로 호석의 귀에 달라붙어, 어떨 땐 태형이 없음에도 기침 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에 주위를 돌아보거나 할 정도였다.
환절기 때마다 자주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평소 열이 많다며 옷을 얇게 입고 다니는 태형이기에, 그 해에도 그것이 조금 때를 서둘러 찾아온 감기이려니 싶었다.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자란 유년 시절은 강한 면역력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온 것인지, 어릴 적부터 감기라는 것을 옮아본 적도, 걸려본 적도 거의 없는 호석은 더더욱 막연히 태형의 잦고 오랜 기침을 원래 그런 감기인가보다 하게 되었다. 그저 예년보다 오래가는 듯하니 약국에서 기침 감기 약을 사 와서 챙겨 먹이고, 때가 되면 으레 알아서 나으려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 밭은기침이 약을 먹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낫지를 않아서 병원에 가자고 물었을 때, 태형은 얼마 안있으면 나을 텐데 괜한 병원비 나가는 게 아깝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한 주가 더 지나서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병원에 가자고 보채니, 태형은 피곤한듯 자리에 몸을 뉘이며 어제 일하느라 지쳐서 움직이기 싫으니 다음 주에 가자며 미뤘다. 거기에 대고 또 다시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호석은 입을 다물었다. 또 다시 싸우고 말끝마다 날을 세우는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두려웠고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정말로 지치긴 했던지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태형의 얼굴을 호석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매일같이 부대끼며 보는 얼굴이라 호석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를 없어뵈이긴 하지만, 잠에 빠진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조금 또 다르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일을 해서 그런가 예전보다 살이 빠진 듯도 하고. 아파서 그런지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도 같고. 근래에는 일이 고된 것에 더해 감기 기운까지 있다 보니 부쩍 신경질이 늘어서는. 옮으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며 저를 밀어내고, 건드리지도 말라며 쳐내고,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불에 데인 듯 도망치기 일수였다. 그 와중에 자면서도 콜록대다가 뒤척이는 것이 안쓰러워, 호석은 벽을 보고 돌아 누운 태형의 어깨를 몰래 쓰다듬었다.
별일 아닐 거야.
병원 가면 금방 낫겠지.
요즘 일하느라 쉴 시간이 적어져서 회복이 더딘걸거야.
제 불안한 마음을 회피하기 위해 그런 몰상식하고 멍청한 생각 따윌 하면서.
그 밤은 유난히 조용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태형의 기침소리는 검은 어둠을 뒤흔들었다.
콜록, 콜록, 콜록,
끊임없이 고막을 두들겨대는 소리에 피곤함에 지쳐 감겼던 눈이 슬며시 떠진다. 가라앉은 옅은 어둠 너머로 벽을 향해 등을 돌리고 기침을 뱉을 때마다 심하게 요동치는 태형의 어깨가 보였다.
저렇게까지 기침을 하면 얌전히 말을 듣고 병원 좀 다녀오지, 고집은 더럽게 세서 제 말은 곧 죽어도 듣지 않는 태형이 답답했다. 그 기침소리로 인해 잠에서 깨어버린 탓에 짜증도 조금 났다. 저는 걸려본 적도 거의 없는 감기에 저렇게까지 고생을 하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태형아, 내일 병원 가. 어?"
콜록, 콜록, 콜록,
그 말에 제대로 된 대답 대신 기침 소리만 돌아온다. 제 말을 알아듣기는 한 것인지. 저렇게 기침을 하다가 그만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뉘었던 몸을 일으킨 호석은 물병과 함께 태형의 옆에 자리를 하고 앉았다.
"태형아, 물 마셔. 기침을 그렇게나 하냐."
콜록, 콜록, ...그르럭,
어둠에 싸인 태형의 입에서 낯선 소리가 들린다. 마치 펌프질 중에 물이 역류하는 듯한 소리. 고장 난 자동차가 주저 앉는 듯한 소리. 밀폐된 용기에서 액체가 끓어오르다 밖으로 터져 나온 듯한 소리.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그 낯선 소리에 쭈뼛 머리 끝이 솟는 듯했다.
흠칫거리는 팔을 뻗어 태형의 어깨를 잡자, 그 손에 잡힌 어깨가 불에라도 타는 듯 뜨거웠다. 당황한 손이 본능적으로 태형의 이마를 찾아 더듬자, 데일듯이 뜨거운 그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태형의 입에선 이젠 기침 대신, 낯선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르륵, 피익... 그르륵, 피익...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은 위험신호이다.
그것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불을 켜고 부신 눈을 억지로 떠 태형을 돌아본 순간, 호석은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눈앞에서 화약이 터진 것처럼, 각막과 뇌가 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 벼락이 정수리에 떨어진 것처럼, 온 몸이 충격으로 움쩍할 수 없이.
태형이 누운 머리맡 이불과 마주 보고 있던 벽에 검붉은 파편 자국이 이리저리 튀어있었다. 모로 누운 몸은 잔뜩 웅크러든 채로, 그르럭대는 소리를 낼 때마다 어깨가 시근덕댄다.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몸이, 이부자리를 붉게 수놓은 피가, 그 목구멍에서 나는 쇳소리가, 그 몸뚱이가, 그 검붉은 색이, 그 불편한 소리가, 그 몸이, 그 색이, 그 소리가, 그 모든 것이,
이 잠깐 사이로 멈추고 차가워질 듯.
불쑥,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겨울 차가운 몸을 하고 저를 떠나가 버린
삐이이이-------------
귓 속에서 가느다란 바늘이 유리를 긁는 듯한 이명이 들렸다.
아니, 심박 수가 멈췄을 때 심박계에서 나는 소리였을까.
소리를 질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물을 흘렸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 소리쳤던가.
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가쁘고 힘겨운 호흡에 섞여 들리는 풀피리 같은 숨소리. 너무나도 뜨겁고 너무나도 무거워서, 부축을 하고 걷는 제 몸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힘 없이 미끄러지는 그 무기력한 몸뚱이.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자신의 무력함. 태형을 방치해둔 자신에 대한 원망. 이대로 이 뜨거운 몸이 차갑게 식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날의 장례식장. 그 관 속의 어머니. 그 검은 양복을 입었던 태형. 그것이 이제는, 반대로 태형이 그 관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아,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린 적이 없는 저주받은 제 인생. 태형의 인생을 나락으로 내리 꽂은 자신의 욕심과 가난과 게으름. 책임 지지도 못할 태형을 담지도 못할 하찮은 제 그릇에 억지로 쑤셔 담은 이 결과. 역겨움. 무능함. 박탈감. 비통함.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그 모든 것.
"결핵의 진행에 의한 급성 폐렴입니다."
"고비는 넘겼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결과가 달라질 뻔했어요."
"오랜 기간 결핵을 앓았던지라 폐에 기흉이 여러 군데 생겼고,"
"그에 따라 흉강경 수술로 일부 폐 조직을 절제했습니다."
"젊으신 분이 영양실조도 있어요."
"이미 각혈도 여러 번 하셨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에 안 오신 거에요?"
"이러한 병은 환경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환경이요."
"보호자 분도 결핵에 감염되셨을 가능성이 크니까, 오늘 검사 받으세요."
차라리 다른 병이었더라면 이보다는 조금 덜 비참했을까. 혹은 조금 덜 절망적이었을까. 예컨대 부자들이나 걸린다는 병이라던가, 예쁘고 잘난 사람들만 걸린다는 병이라던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가난병'이라고 불리우는 결핵보다는 나았을까 싶다.
불이 꺼진 병실은 마치 검은 물을 잔뜩 채워 넣은 수조 같았다. 잠이 든 태형의 침대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엎드러진 채, 거대한 중력을 가진 어둠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몸뚱이는 부서질 듯 마르고, 여렸다.
호석은 자신을 짓누르는 이 어둠이 가진 무게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죄책감이자 절망감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를 가진 이 감정들은 이 죄 많은 존재를 누르고 누르고 또 눌러서, 자동차 바퀴에 깔린 개구리처럼 오장육부가 터져나가고 입에서 내장을 토해내며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에야 사라지게 될까.
잔뜩 구겨진 채로 몇 시간 째 제 손아귀 안에 쥐여있는 텅 빈 약봉지는, 배어 나오는 땀으로 진작에 눅눅하게 젖어버렸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받아온 결핵약은 꾸역꾸역 삼켜버린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과 위선이 혐오스러웠다. 이 거지 같은 삶에 무에 그리 애착이 있다고. 가난을 달고 태어난 저라는 존재가 태형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이번에는 겨우 고비를 넘겼다지만, 태형에게 다음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것을 먹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제가 업은 가난과 함께 태형이 잠식되어가는 것을 자신은 그의 고집을 핑계로 방치하고만 있었다.
저가 모르는 곳에서 피까지 토해가면서도 미련스럽게 제게 감기일 뿐이라고 말하던 태형의 거짓을 정말 몰랐을까. 그렇게 잦게 기침을 해대는데도 그저 기침약만 먹으면 나을 것이란 안일한 믿음은 정말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림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돈을 벌겠다는 태형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은 정말 제가 마음이 약해서였을까. 애초에 처음 일을 나갔던 태형에게 그러지 말라며 불같이 화를 냈더라면, 아니, 그 날 그렇게 쓰러져 다리가 부러지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자꾸만 제가 묵는 여관방을 찾아오던 발걸음을 모질게 내쳤더라면, 전역하는 날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그 존재를 끝까지 무시했더라면, 밤마다 종종 걸려오던 무언전화를 받지만 않았더라면, 그 날 미술실에서 태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더라면, 그때 태형과의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봄날, 그 벚나무아래에
저가 앉아 있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태형은 언젠가 저에게 선물했던 그 말간 그림처럼 언제까지고 순수하고 행복감에 가득 차 저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을 텐데.
결국 자신은 스스로의 애정을 채우고자 태형을 이용한 것이라고, 호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태형의 철없는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져준 것이라며 이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고, 그를 쫓아내서라도 떠나보내야 했을 때를 매번 무시한 것도 모자라 져주는 척 이용하기만 한 자신의 이기적인 영악함과 탐욕스러움이 이제 와서 넌덜머리가 났다. 저에게 태형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을 방관한 스스로의 나태함이 추하고 역겨웠다.
가난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누군가는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사랑조차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상대가 누구건 간에. 행복한 사람은 불행하게. 불행한 사람은 우울하게. 우울한 사람은 절망적이게 만드는 것이 가난한 이의 사랑이다.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짊어진 것으로 인해 아픈 태형도, 숨을 쉴 때마다 기침을 뱉는 태형도, 노동에 지쳐 짜증을 부리는 태형도, 새벽마다 힘든 몸을 부대껴가며 공사판으로 나가는 태형도, 꿈도 희망도 놔버리고 눈앞의 것에만 급급해하는 태형도,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한다며 억지와 고집을 부리는 태형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 태형도, 이따위 가치도 없는 저를 보며 웃는 태형도, 제게 장미를 선물하는 태형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태형도.
모두 다 버거웠다.
너무나도 버거워서 마음이 통째로 그 무게에 짓이겨져 찢겨나가는 듯.
"...태형아..."
우리 이제 그만하자.
잠이 든 태형의 얼굴을 보며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호석은 링거가 꽂힌 그 길고 커다란 손끝만 가만히 쥐었다가 놓았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은 쓰렸고, 그 말을 내뱉지 못한 그 나약함은 한심했고, 태형이 잠든 틈에 몰래 말을 뱉어버리려는 스스로의 비겁함은 환멸이 났다.
다시금, 잠이 든 태형의 침대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엎드려, 스스로의 죄책감과 절망감을 호석은 온 몸으로 받아낸다.
이 깊은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처럼.
"...태형아, ..."
침대에 기대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옆구리를 관통한 호스가 눈에 들어오는 것에 또 다시 마음이 쿵 하고 땅끝으로 떨어져 내린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
안그래도 크고 깊었던 눈은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더욱 깊고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석은 태형의 그 두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죄책감에 짓눌릴 것이 겁이 나서.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두 눈에 사로잡혀 또 다시 먹히고, 끌려가고, 순응하게 될까 봐.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바닥만 보며 손가락으로 셔츠 자락만 만져대고 있는 호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형이 그 달싹거리던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형 말이 맞아요."
깊은 가을밤과 잘 어울리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질병과 수술의 후유증으로 갈라지고, 세되고, 유약했다.
"형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형이 병원을 가자고 했을 때 갔어야 했어요... 형이 그림을 그리라고 할 때 그렸어야 했어요... 형이 다시 학교를 가라고 할 때 다시 갔어야 했어요... 형이 나보고 편하게 살라고 했을 때, 형이 나보고 집에 가라고 했을 때, 형이 나보고 싫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어요. ...근데 그땐, 그 말을 들었다가 형에게 짐이 되거나 버려지고 무시 당하는게... 죽는 것보다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태형의 말을 타고 지난 시간들이 마치 오래된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삶의 마무리 무렵에 맞이하는 그 주마등처럼, 그렇게.
"그러니까 다 형의 말을 안 들은... 내 잘못인 거에요."
버티듯 무릎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순수할 정도로 저에게 진심이었던 태형은 마지막까지도 이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려 한다. 끝까지 저의 짊어질 것을 거둬가려는 태형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려하는 스스로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 비참해졌다. 동시에 갈등했다. 이 끝을 저가 마무리하려 한다면 분명 태형은 따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지금부터라도 형 말을 들을게요. 이제, 저는, ...집으로 돌아갈게요. 간호사님한테 부탁해서 집에 연락도 넣었어요. 그림도 다시 그리고, 학교도 다시 다니고, 그러다 나 좋다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편하게 살게요. ...형 말대로."
그 말에, 마치 세상 모든 걱정을 덜은 듯 마음이 편안해 진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결국 제가 원하는 대로 태형이 변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는 스스로가 위선적이고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무엇이 옳은 것이었을까. 정말로 제 말을 태형이 곧이곧대로 잘 따랐다면 두 사람은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행복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가 가진 것을 가지고 만족하며 살았을까. 영원히 제가 등에 업은 가난을 몰랐다면 태형은 더 좋았을까, 저는 또 어땠을까.
아아, 이제 와 다 의미 없는 가정들 뿐이다.
눈두덩이로 온 몸에 열이 몰리는 듯 뜨거웠다. 목 안쪽이 따끔하고 울컥이는 것들이 울대를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으려 이를 꽉 악물고, 더더욱 제 무릎을 힘껏 틀어쥐었다. 손 끝이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로, 그렇게.
"그러니까 이제라도 형 말을 듣는 나를, 나와의 시간들을, 제발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두 사람의 시간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같은 그 말에 호석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태형은 그렇게도 찬란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다만에 미운 것이 있다면, 태형을 마음에 품은 것으로 그를 엉망진창 망가뜨려 버린 자신의 사랑이다.
무릎을 쥔 손등 위로 뜨거운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염치가 있다면 눈물조차 보여서는 안되었는데.
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형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곧잘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태형은 그 날, 울지 않았다.
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라.
저가 지은 죄의 상징이자 표본과도 같은 저 그림을.
제가 함부로 품었던 사랑의 결과가 그 안에 있다.
기침은, 그의 육체를.
가난은, 그의 꿈을.
사랑은, 그의 마음을.
그 모든 것을 험하게 망가뜨리고 탐욕스럽게 좀먹어 버린 것이 이 가난한 사람의 사랑이다.
가진 것 만으로도 저주받을 사랑이다.
품는 것 만으로도 벌을 받을 사랑이다.
벌을 받을 사랑이다.
사랑은, 벌이다.
2020.06.14
오래 걸렸네요.
태형이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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