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하필 비번인 이른 아침, 늦잠을 계획하며 이불 속에서 단잠에 빠져있던 정국의 정신을 뒤흔드는 전화벨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댔다. 아니, 정말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천둥이 치기도 하였다. 비도 많이 오는데 이 아침에 무슨 전화냐 꿍얼거리며 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로 수화기를 받았을 때, 그 너머에서 다급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전순경아!!! 태풍 때문에 지금 물난리 났어, 임마!!! 장비 챙겨 입고, 사람들 국민학교로 대피시켜!! 얼른!!!"
그 말이 꿈인지 뭔지 분간이 안 가 대답도 없이 멍하니 눈만 끔벅대고 있으니 이번엔 수화기 너머로부터 귀를 터뜨리기라도 할 듯 온갖 쌍욕들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까드드득, 하늘이 쪼개지기라도 하듯 울려 퍼진 우레 소리와, 옥탑방 천장을 무너뜨릴 기세로 쏟아지고 있는 폭우 소리에 정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강 몸에 끼우듯 옷을 입고, 커다란 가방에 비상식량과 손에 잡히는 옷가지들을 쑤셔 넣고, 집구석에 처박아뒀던 우비와 긴 장화를 챙겨신고, 현관 근처에 세워뒀던 확성기와 손전등을 손에 들고 문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으아읍...!"
폭우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할 굵고 거센 빗줄기가 중력에 따라 머리 꼭대기와 어깨 위로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이거야 원 목욕탕 천장에서 퍼붓는 안마 물줄기나 쏟아지는 폭포수를 맞는 기분이라고 정국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생각했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옥상의 배수구로도 채 다 빠져나가지 못해 철계단 쪽으로 왈칵왈칵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국은 그 철계단을 펄쩍펄쩍 뛰어 내려가며 2층의 집주인 내외와 1층의 세 들어 사는 신혼부부를 다급히 불러내어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짐을 챙겨 국민학교로 피신하라고 재촉했다. 들고 내려온 가방을 건네며 가는 길에 제 짐도 좀 같이 챙겨다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고.
문을 열고 집을 나섰을 때엔 더욱 가관이었다.
집 앞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그야말로 계곡이나 다름없었다. 길목을 따라 모여든 물줄기가 콸콸콸콸 소리를 내며 내리막길 밑으로 쓸려 내려가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비상사태였다. 이 밑으로 따라내려가다보면, 그 중간에는 호석의 어둡고 낮은 반지하 방이 있다. 호석은 괜찮을까? 동시에 하수구 공사가 안끝난다며 투덜거리던 호석의 말이 연상작용처럼 떠올랐다. 그 공사는 분명 어제까지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엄청난 양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야 할 하수 시설은 지금 대체 어떤 상태가 되어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국은 확성기의 사이렌을 울리고 목청이 터져라 사람들에게 학교로 대피하라 외치며 물이 쏟아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달렸다. 불안한 예감이 뱀처럼 스멀스멀 등 뒤를 타고 오르는 듯했다.
"호석이 형!!! 형!!!"
구르듯이 뛰어 내려간 그 반지하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이틀 전, 제가 주저앉아 밤을 지샜던 그 계단은 절반이나 잠겨 시커먼 물이 넘실대고 있었고, 혹여나 다시 열릴까 봐 긴장감과 조바심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철문은 이미 활짝 열려 호석의 것으로 보이는 세간살이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 쯤 되면 진작에 밖으로 빠져나왔을 것이라고 머리 한 구석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만, 정국은 그럼에도 몇 번이고 계단에서 문 안쪽으로 불빛을 비춰보고, 건물 밖 창문을 열어 방 안을 살피며, 대답 없는 이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혹시라도 호석이 이 안에 있는데 제가 찾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진 않을까 하는 끔찍한 생각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렀다.
혹시나 호석의 행방을 알까 싶어, 그 건물의 나머지 층의 사람들 집의 문을 두들기고 확성기로 대피령을 알렸으나, 쥐죽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렇다면 아마 이 건물 사람들도 진작에 물을 퍼내는 것을 포기하고 대피를 했을 것이다. 호석도 그들과 함께 갔을까? 정말?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싹 마르는 것 같은 입안을 대강 입술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빗물로 축이고 정국은 또 다시 골목길을 내달린다.
그 봄날, 노래를 흥얼거리며 당신과 함께 걸어 올라온 그 골목을 지나.
그 봄날, 가로등 밑에 취해 쓰러져 있던 당신을 업고 내려가던 골목을 지나.
그 봄날,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밑에 선 당신에게 정신이 팔려 화려하게 고꾸라졌던 그 내리막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정비소에 다다라감에 따라 침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발 등에서 채이던 물은 어느새 발목 위에서 철벅대고, 그러다가 부쩍 늘어 이미 종아리까지 잠겼다. 공사를 마치지 못해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는 하수구와 가까워 갈수록 물은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었고, 정비소 근처까지 다다랐을 땐 무릎 아래까지 물에 잠겨 허우적 거리며 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었다. 신고 내려온 장화 속은 진작에 물로 가득 차 그마저 걸음걸이조차 여의치가 못했다.
이렇게까지 물이 찼는데, 꼭 여기를 확인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이미 호석도 다른 이들과 다름 없이 진작에 학교로 대피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머리 한 켠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외치는 본능이 정국을 정비소로 이끌고 있었다. 분명 호석은 이곳에 있다. 분명 정비소에 있을 것이다. 그런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한 확신이 정국에게 있었다.
장막을 친 듯 거세게 내리는 비 사이로,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철문이 사람 하나 지나갈 틈새만큼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감은 틀리지 않았음을 재차 확신하며, 정국은 철벅거리는 물의 저항을 이겨내고 그 무거운 철문을 억지로 잡아끌어 힘껏 열어젖힌다.
그리고 하얗게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이제는 정이 들어버린 커다란 살구나무와
그것을 겨우 붙잡고 선,
그 사람.
우비는 커녕 맨몸에 티셔츠 하나 걸치고 있는 몸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바람을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저 가느다란 몸이 이대로 물살에 휩쓸려 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디론가 떠내려 가버리진 않을까, 무릎 위까지 잠긴 물을 헤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마음은 이리도 급한데, 사람 속도 모르는 이 지독한 물살은 깊숙한 수렁처럼 제 다리를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질 않는 것이 초조하기만 했다. 몸을 급하게 놀릴수록 갑갑함에 심장은 타오르듯 뜀박질하고,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이 몰아쳐 오른다.
이토록 애가 타는 마음 좀 알아봐 줄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안달이 난 저를 언제쯤이나 돌아봐 줄까. 그러나 이 어렵기만 한 사람은 이처럼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오는 것도 잊은 것 처럼, 저와의 추억이 잔뜩 쌓인 그 살구나무 아래에 망연한 얼굴을 하고.
그 눈길이 향하는 곳은.
살구나무 너머의,
가라지 안쪽의,
자전거들을 세워놓은,
그 벽에 걸린.
예쁘고, 밝고, 따뜻하고, 꽃 같고, 기분 좋은, 당신이 사랑한 그 사람의, 당신을 담은,
그 그림에게로.
심장이 박살이 날 것 처럼 아팠다. 열불이 터졌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되는대로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깟 그림이, 그 사람이 그려준 그 그림이, 이미 인연이 끊어진 그 사람이 뭐라고 아직도 그렇게나 미련이 남아서 그 남은 흔적 꾸역꾸역 챙겨가겠다고. 그래서 제대로 몸도 가누기 힘든 이 비바람을, 이 물길을 헤치고서라도 아득바득 이곳으로 왔을 호석이 이가 갈리도록, 미웠다. 한심했다. 원망스러웠다. 답답했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참지 못하고 빗물이 줄줄 타고 흐르는 가는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왈칵 돌려세우자, 갑작스러운 그 힘과 다리를 붙잡힌 빗물 탓에 마른 몸이 휘청거렸다. 돌아본 시선 속에 들어오는 정국의 얼굴에, 호석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한껏 뜨여졌다가 이내 바닥으로 꽂힌다. 그 날, 저가 자전거를 내팽개쳤던 그때처럼. 죄지은 사람처럼 그렇게.
당신의 지은 죄가 무엇이기에.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당신은.
"................미련해 빠져가지고!!!!!!!!"
악에 받쳐 왈칵 소리를 질렀다.
퍼붓듯 내리는 비의 장막이 고함을 품는다.
숙여진 고개는 말이 없다.
빗물에 섞여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것은 속이 탈대로 타버린 저의 눈물이다.
호석이 저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의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당신에게 나는 무엇일까.
그 모든 물음과 함께 제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호석을 옆으로 밀어내고 정국은 가라지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빗물을 훔치는 척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고 휘적휘적, 어느새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길을 헤치고 나아간다. 당신이 원한다면 달이라도, 별이라도, 옛사랑의 흔적이라도 모두 따다 줄 수 있는 자신의 호구 같은 사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머리 위로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빗줄기에 제 마음도 꿰뚫려 걸레짝이 될 것 같았다.
"정국아...! 정국아아!!!! 안돼!! 가지마!!!"
뒤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첨벙첨벙 안간힘을 쓰며 다가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자, 다급한 표정으로 저를 향해 길게 손을 뻗고 있는 호석이 보였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정국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맞잡힌 손이 왈칵 온 힘을 다해 잡아 당겨지며, 정국의 몸이 호석에게로 쏠리듯 넘어졌다. 온 체중을 다해 정국을 잡아당긴 호석 역시 뒤로 훌꺽 쓰러진다.
그리고 그 순간, 가라지 옆으로 높다랗게 쌓여있던 타이어들이 쏟아지는 비의 무게와 몰아치는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와그르르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 타이어들이 기대고 있던 시멘트 벽 역시 쏟아지는 무게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와장창 깨지고 무너졌다. 그 무너진 벽을 타고 한껏 불어난 물이 성난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다급히 넘어진 호석의 팔을 잡고 함께 일어서자 수위는 어느새 허리까지 단숨에 차올라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람 키 높이까지 침수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비가 약해지지 않는다면, 건물의 1층마저도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을 기세이다. 그러니 저 그림을 가져갈 수 있는 때는 지금 밖에는 없다. 출렁이는 물살 위로 방해하듯 떠다니는 타이어들을 헤치고서. 지금이라면 저 그림을 떼어다가 제가 입고 있는 우비로 싸매면 어떻게든 대피소까지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석이 원하니까, 그래야만 했다.
다시 가라지 쪽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딛는 정국의 몸을 호석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가자...! 가자, 정국아! 가자!!"
"아니, 저거, 지금 아니면 못구해요! 빨리 가서 돌아올 때만 조금 헤엄치면 내가 가져올 수 있어! 나, 내가 가가져올 테니까..!!"
"이 바보야!!! 가자구!!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제발, 가!! 가자, 정국아...!!"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필사적으로 제 몸을 잡아당기는 그 손에 이끌려 정국은 호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이처럼 씨근덕 거리며 울면서, 그럼에도 붙잡은 제 손목은 놓지 않으며 호석은 정비소 밖을 향해 나아간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 그림은, 불어오르는 물살과 둥둥 떠다니는 타이어에 부딪혀 덜컥덜컥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이내 철퍼덕 그 시커먼 물 위로 떨어져 내렸다.
둥실둥실, 가라앉지 않는 캔버스는 그렇게 물 위에서 호석의 지난 사랑을 헤아리듯 흔들렸다. 저렇게 흔들리다가, 물살을 따라 어딘가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리게 될까...? 아니면 이대로 물 밑에 잠겨, 그 틀을 잃고 망가지게 될까...? 제게는 알 수 없다.
정국은 제 손목을 잡은 호석의 손을 풀어, 강하게 제 손에 깍지를 끼워 넣었다.
골목 어귀로 겨우겨우 빠져나올 즈음에는 물이 가슴 밑까지나 불어올랐다. 급류에 쓸려내려오는 쓰레기와 온갖 잡동사니들을 보며 과연 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이러다가 둘이 사이좋게 손 잡고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닐지 슬슬 속으로 심각하게 걱정을 하던 차에, 운이 좋게도 구조대원들이 탄 구명보트가 저희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호석을 먼저 밀어 올려 보트에 태우자, 올라타기가 무섭게 다급히 제 쪽으로 몸을 돌려 구조대원들과 함께 보트 위로 끌어올린다. 그렇게 올라탄 보트 위에서 여전히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지친듯 서로 기대고 있는 어깨 만큼 그 마음을 의지했다.
보트는 미처 대피를 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을 더 구조한 뒤에야, 이제는 피난소가 된 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운동장은 이미 물에 잠겨있던 탓에 학교 현관 앞에 배를 댄 뒤, 3분의 1 정도 침수된 중앙 계단까지 헤엄치듯 다가가 겨우겨우 내부로 힘겹게 들어갔을 때,
"전순경, 야 이노무 자식아!!! 김경장이가 아침에 연락을 한 게 언제인데 이제 와?! 정신머릴 어디다 뒀어!!! 사람 속을 아주, 어, 야, 야 이놈 셰끼야!!!!"
다짜고짜 머리통 위로 꿍하고 쥐어박힌 파출소장의 물주먹과 우레같은 잔소리가 우다다다 쏟아진다.
꿀밤을 맞은 머리를 감싸 쥐고 죄송합니다 웅얼거리며 눈치를 보는 정국에 기겁을 하는 것은 외려 호석이다. 허겁지겁 저를 구조하다가 늦게 되었다며 손사래를 치며 더 크게 죄송하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는 호석을 보고, 입에서 불을 뿜듯 화를 내던 파출소장은 이번엔 얼떨떨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고 만다. 사람 구하다 늦었다는데 다짜고짜 쥐어박고 화를 낸 것이 미안하긴 하고, 또 그렇다고 제 자식 같은 놈을 기다리는 동안 걱정을 하느라 속이 시커멓게 타버린 것은 괜히 억울하고. 파출소장은 어험어험 헛기침을 하고 진작에 말을 하지 그랬냐는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괜스럽게 호석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정국의 등을 툭툭 토닥이고는 멋쩍게 다른 일을 하러 훌쩍 도망치듯 떠나갔다.
그렇게, 물이 질펀한 복도에 둘 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미안해."
호석은 저의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일까. 저를 구조하느라 대피소에 늦게 도착한 것? 아니면, 위험한 상황에서 대피는 안 하고 정비소로 가버린 것? 아니면, 여전히 그의 흔적을 놓지 못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바닥으로 수그러진 호석의 비에 젖은 머리를, 정국은 가만히 쓰다듬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숙여진 고개 밑으로, 턱을 따라 여전히 뚝뚝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이 빗물인 줄 머리로는 알면서도 괜히 지레짐작 눈물처럼 보여서 덜컥 걱정이 앞섰다. 허겁지겁 허리를 굽히고 그 감춰진 얼굴을 들여다보자, 동그랗게 뜨여진 저의 눈과 마주친 호석이 쑥스러운 듯 피시식 웃음을 내비치는 것이 보였다.
웃는구나.
괜찮구나.
다행이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허리를 펴고, 물이 가득 찬 장화를 벗어 옆구리에 끼어들고, 제 옆에 선 호석의 손목을 잡아 피난소가 있는 위층으로 이끌었다.
이재민들이 모여있는 학교의 꼭대기 층에는 피난을 온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 단위로 모여 돗자리나 비닐 시트를 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국은 그 중 그나마 사람들이 몰려있지 않은 한 구석으로 호석을 끌어다 놓고, 신혼부부에게 맡겨놓았던 제 가방을 찾아다가 그에게 건넸다.
"그 안에 옷이랑 비상식량 조금 있어요. 젖은 옷 갈아입고, 그거 먹으면서 있어요."
"...너는? 나 이거 주면 너는 어떡해?"
"저는 경찰이잖아요, 일 해야죠. 구조대원들 도와서 구명보트 타고 또 나가야 되요. 어차피 옷도 다시 젖을거라 당장 갈아입을 일도 없고, 먹는 것도 그 사람들이랑 같이 구호품 올 때 먹을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 대신 형이 그거 써요."
마주한 눈동자가 미안함과 걱정으로 한껏 흔들리고 있었다. 여전히 바보같이 어쩔 줄 모르고 그렇게 서 있는 호석이 답답하여 가방을 뒤져 수건을 꺼내어 그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쫄딱 젖은 스스로의 몸을 닦으라고 준 그 수건을, 호석은 제 앞에 선 정국의 젖은 얼굴과 머리를 바지런히 닦는데에 홀라당 사용해 버렸다. 그러라고 준 수건이 아닌데. 맨날 저보고 바보라고 부르지만, 사실 진짜 바보는 호석이라고 그 섬세하고 예쁜 손에 가만히 머리를 맡긴 채로 정국은 생각했다.
"..........조심해서 갔다와. ...기다릴게."
"형 방금 그 말 꼭 남편 배웅하는 안사람... 아이, 암것도 아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건네는 농담 반 진담 반인 그 말에도, 호석은 웃지 않았다. 발끈하지도 않았다.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다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만이 간절하기에, 정국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수건을 빼앗아 들고 호석의 젖은 머리를 와다다다 거칠게 닦아내었다. 그리고 제 거친 손길에 뾰로통해진 그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다시 일을 하러 나설 마음이 생겼다.
"...잘 다녀올게요."
온 세상을 물로 뒤덮을 기세로 내리던 비는 정오가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한풀 꺾였고, 오후 세 시를넘었을 때엔 드디어 완전히 멎었다. 한풀이를 하듯 원 없이 내리던 비는 결국 학교 건물의 1층 꼭대기 만큼이나 집어삼켰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물에 푹 잠기어 그 제일 높은 꼭지만 보일 정도였고, 온갖 것들이 험한 물살에 휩쓸려 동네를 둥둥 떠다녔다.
지붕 위에 갇혀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구하러 구명보트를 타고 물 위를 헤쳐다니는 동안에는, 오르막에서부터 떠내려오는 자동차나, 급류에 휩쓸려 뿌리째 뽑힌 나무에 부딪힐 뻔한 위험한 상황도 몇 번이나 겪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정국은, 호석의 말을 기억했다. 조심히 다녀오라던, 저를 기다린다는 그 말을.
비가 약해질 무렵부터는 구호품들을 실은 헬기들이 학교 옥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부상자, 어린이, 노약자들과 그들의 보호자, 그리고 수해 지역 외에 의탁할 곳이 있는 사람들을 순차대로 싣고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가 멀어버릴 정도로 울려대던 프로펠러 소리는 해가 지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저녁 즈음엔 물도 많이 빠져나가 1층 중반 정도까지나 수위가 낮아져, 이대로라면 다음 날 새벽에는 말짱히 평편한 땅이 드러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젖은 땅 위에는 재해가 남기고 간 파편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을 것이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캄캄한 학교 안에는 연고지가 이곳 밖에 없는 사람들과 수해지역을 돕느라 지친 공무원들과 경찰들, 소방대원들 만이 남아, 이제는 제법 사람이 없어져 공간이 넓어진 교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구호품으로 도착한 담요를 둘러쓰고 교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유령처럼 돌아다니던 정국도, 마침내 교실 한구석에서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기대어 쪼그린 채로 잠에 빠진 호석을 발견하곤 그 곁으로 총총 다가왔다.
"형... 왜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자요..."
불편해 보이는 자세에 어깨를 가만히 흔들자 잠과 피곤에 취한 눈동자가 저를 흔드는 인물이 누구인지 천천히 탐색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국인 것을 확인하자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지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쉬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달래듯 잔뜩 굳어있는 호석의 몸을 붙들어 제가 들고 온 담요 위로 가만히 밀어 넣자, 그제서야 구부정하고 잔뜩 긴장해 쪼그라져 있던 몸이 축 늘어지며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느껴졌다.
정국 역시 그 옆으로 몸을 포개어 마주 보고 누웠다. 어둠 사이에서 어른어른 비치는 속눈썹은 길고 예뻤다. 가만히 잠든 호석의 손을 더듬더듬 찾아내어 깍지를 끼우고 그 위로 담요를 덮어 숨기고는, 제 손안의 호석의 온기가 온 몸과 마음으로 퍼지는 충만감을 느끼며 정국은 후우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내뱉는 숨결을 따라 내내 귓바퀴에 달라붙어 머리 속을 흔들고 찔러대던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와 미친 듯이 쏟아지던 빗소리의 이명이 서서히 정국에게서 멀어져 간다.
빗속에서 비명처럼 저를 부르던 호석의 목소리가 옅어져 간다.
다만, 제 옆의 호석의 고른 숨소리와 체온이 그 기억을 대신 채운다.
2020.05.07.
자연재해는 정말 무서운 거에요... 그림 같은거 챙기고 있다간 목숨 못챙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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