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20 [완결]

by 1mpulse 2020. 8. 6.

by Impulse

 

 

 

 

 

 

 

"...널 찾으러 갔었어."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듣는 호석의 목소리이다. 이미 자정이 지났으니, 정확하게는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라며, 정국은 호석의 동그란 머리통 위에 뺨을 얹은 채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빗속에서의 긴 입맞춤 끝에 찾아온 묘하고 어색한 분위기에는 묵언의 주문이라도 걸려있던 것일까. 손가락을 걸어잡은 채 비를 맞으며 함께 오르막길을 따라 옥탑방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상대방의 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들고 욕실 앞에서 저 씻을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미 한참이나 늦은 시각이지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벽에 나란히하고 앉아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지금까지, 두 사람 모두 말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쑥스러워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던 것이 첫 번째. 갑작스러운 일들의 연속에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속으로 헤아리고 있던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어쩐지 할 말이 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호석을 언제나처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세 번째. 그리고 지금, 그 세 번째 이유의 때가 영글은 듯했다.

 

"...저녁때 온다고 했는데... 안 오잖아."
"아... 미안해요. 사고가 좀 생겨서..."
"알아... 지붕에서 떨어진 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싶어 되물으니, 온 동네에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워낙 사건 사고가 없는 조용한 동네다 보니 구급차가 좁은 골목길을 쑤시고 들어온 것만으로도 아주 큰 일이 벌어진 것처럼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수해까지 겪었던지라 다들 사건사고에 예민해 있던 이유도 있을 것이고. 

 

다만, 사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이야기가 심하게 와전이 되어있어, 정국은 헛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경찰 둘이 지붕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대가리가 깨져선 골수가 철철 흐르고 뼈는 몽땅 부러진 반병신이 되어서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이야기. 그래서 아까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 걸까. 정말 머리통 깨졌는지 걱정되어서. 정국은 어쩐지 웃기면서도 간질거리는 기분에, 괜히 맞대어 기대고 있던 호석의 어깨에 치대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서 너 찾으러 병원에를 갔어..."
"병원에요? 내 이름으로 입원 환자 찾았어도 없었을 텐데"
"몰라... 못 들어갔어."
"...예?"
"병원에를... 못들어갔어. 그냥, 무서워서... 못 들어갔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깨질 듯 예민한 옆선을 지닌 그 얼굴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수그러져 엄한 무릎을 손톱으로 깨작이고 있다. 정국은 웅크리고 앉은 호석의 앞으로 엉덩이를 옮겨 꼼지락거리는 그 두 손을 그러잡았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워서 이 손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옴짝달싹 못하고 비 오는 병원 밖을 서성였던 것일까. 무엇이 그리도 무서워서 그렇게.

 

마주하고 앉아 눈을 마주쳐오는 정국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그렁거리는 눈동자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말을 쉽사리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달싹, 그러다가 물고기처럼 빠끔빠끔. 그리고 꿀꺽, 꾹 참은 눈물이 목울대로 넘어가고, 킁, 콧물을 한 번 들이키고 나서야 겨우 하고 싶었던 말이 퐁퐁 튀어나온다.

 

"...너가 나 때문에 다쳤으면 어떡해."
"...왜 내가 형 때문에 다쳐요? 그건 그냥 사고였는데."
"몰라. 그냥, 난, 뭘 해도 안되는 놈이니까. 나같은 불행덩어리는 누굴 좋아할 자격도 없고 좋아해서도 안되는 거니까. 근데 그런 내가 널 자꾸 좋아해서... 나 따위가 널 좋아하면, 너도 다치고 힘들고 아플 일이 생길 건데... 그래서 숨겼는데... 결국, 그 벌 받을 마음을 품고있는 것 만으로 또 그렇게 나쁜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너가 나 때문에 그렇게 사고가 난 것 같아서. 무서워서... 못들어갔어."

 

참회를 하듯 말을 다 마친 고개는 붙잡힌 두 손 위로 푹 수그러졌다. 수그린 고개 밑으로 정국의 손등에 닿는 그 속눈썹은 길어서 간질거렸고 축축해서 가슴이 아렸다. 

 

"내 맘이 자꾸 내 맘대로 안되서... 미안해."

 

...홍수가 났던 날, 뜬금없이 제게 사과를 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땐 이유를 알 수 없던 그 말은, 이런 그의 아픈 마음을 한가득 담고 일렁이고 있었을까.

 

이상한 마음이었다. 그에게 잔뜩 트라우마만 심어주고 떠난 태형이라는 사람이 미웠다. 제게 일어난 모든 안좋은 일을 죄다 스스로가 품은 마음 탓으로 돌려버리려는 호석의 깊게 패인 아픔이 미웠다. 저를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가 기쁨으로 심장을 힘껏 두방망이질 치도록 만들었다가도, 제 맘을 어찌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반대로 마음을 세게 내려치고 저밋하게 만들었다. 

 

"...나는 병원이 싫어. 무서워. 너 아픈 거 보는 거 싫어. 그러니까... 아프지 마, 정국아. ...너는 나 때문에 아프면 안돼."

 

숙어진 고개 밑으로 꺼져 들어가듯 웅얼거리는, 아프지 말라는 그 말이 귀에 익었다.

 

언젠가 제가 심하게 앓고 난 후, 호석에게 멀쩡한 자전거를 내팽개치며 화를 냈던 날. 처음으로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던 날. 봄비가 왔던 날. 그때도 호석은 저에게 미안하다며, 아프지 말라며 그 말을 했었다. 

 

그리고 정국은 깨닫는다. 호석은, 그때 이미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저를 마음에 한가득 담고 있었다는 것을. 제가 느낀 그와의 거리감과 벽은, 홍수처럼 불어나버린 스스로의 마음에서 저를 어거지로 퍼내려던 호석의 무던한 발버둥이었음을. 

 

그 모든 이유는 그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되풀이 될까 무서워서.
정국의 마음이 다칠까 불안해서.
정국의 몸이 아플까 두려워서.

 

 

 

안타까운 사람.
바보 같은 사람.
한없이 예쁜 사람.

 

 

 

정국은 눈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호석의 머리 위에 가만히 입술을 떨궜다.

 

"...오늘 내가 다치지 않은 건, 형 덕분인 거 알아요?"

 

무슨 말이냐는 듯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호기심이 반, 서러움이 반. 그런 호석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애정이 반, 연민이 반. 맞잡은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슬 쓰다듬으며 정국은 두서없이 섞였던 제 마음 담긴 말을 정리한다.

 

"지붕에서 떨어지는데, 형이 딱 떠오르는 거예요. 형이... 형한테 나는 할 말이 아직 많은데, 여기서 떨어져서 다치면 형이 그 말들을 안 들어 줄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내가 필사적으로 공중에서 몸을 막 비틀어서, 그 왜 내가 어제 말했던 선배, 김경장님, 그 사람을 내 밑으로 깔고는 이렇게 멱살을 딱 붙잡아서 고정을 시키고, 그 위로 빡 떨어졌어요. 떨어지면서 낙법도 이렇게 빠박, 치고. 그래서 나 하나도 안다쳤어요. 어어? 왜 웃어? 진짜 하나도 안다쳤다니까?"

 

귀 기울여 정국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호기심 어린 얼굴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듣는 듯 얼이 빠지다가, 이내 손사래를 쳐가며 웃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무척 진지하게 하는 이야기인데, 자지러지게 웃기만 하는 호석이 제 말을 못알아듣는 것 같아 답답했던 정국은 더욱 더 열심히 피력을 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 웃음소리를 따라 저도 웃고야 만다.

 

"거짓말 하고 있어! 내가 바본 줄 아냐?"
"진짜라니까! 거짓말이면 왜 나만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그 선배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난 당장 내일부터 그 선배 일을 모조리 떠안게 생겼는데. ...원래 뭐 딱히 열심히 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왜 거짓말이래, 거짓말 아니라니까. 왜 날 못 믿구...!"

 

제 말을 믿어주지 않는 호석에게 섭섭해 씩씩거리는 정국을 달래듯 모양 예쁜 손가락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면, 불퉁해졌던 마음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뽀송해져 쑥스러운 웃음이 얼굴에 맺히고야 만다. 그 작은 스침 하나에도 열이 오를 정도로, 그렇게나 좋아서.

 

"그리고 또 전에도... 그때, 아팠을 때. 술병나고 몸살 나고... 암튼 아팠을 때도. 내가 죽더라도 형 얼굴은 한 번 더 보고 죽어야겠다고 나 막 약을 얼마나 열심히 먹었는데. 나 그때도 형 생각에 나은거고."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있어. 하여튼 진짜 뻔뻔해. 뻔돌이야, 뻔돌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표정과는 달리 발갛게 달아오른 호석의 귓바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들은 것은 아니라는 듯해, 정국은 콧망울을 울리며 웃었다. 뾰루퉁해진 그를 붙잡아 그 발간 귓불을 입술로 자근자근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과는 별개로, 정국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아있었다.

 

"그리고, 홍수 났을 때도. 정비소에서. 가라지 쪽으로 가는 나를 형이 불러세우지 않았으면, 형이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지 않았으면... 난 무너지는 타이어 더미에 깔려서,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고."
"야, 그건...! 오히려 나 때문에 너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거잖아... 그걸 어떻게 나 때문에 너가 안다친거라고 해? 억지 부리지마."

 

"내가 바득바득 그림 가져오겠다고 그랬을 때도, 형이 말렸잖아요. 나 끌고 나왔잖아요. 그 덕분에 우리 둘 다 무사히 구조된 거구요."
"억지야, 순 억지...!"

 

"또 있어요. 형이 나보고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잖아요. 기다린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나 진짜로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구조하러 다녔어요. 형이 기다린다고 해서 더 열심히 무사히 돌아오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나 아무 일 없이 잘 다녀왔잖아요. 돌아왔잖아요, 형한테."
".........거짓말! 다 억지잖아, 다...!"
"억지도 거짓말도 아닌거 형도 알잖아요.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나는 형 때문에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어요. 형은 그렇게 생각 안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그 말에 제게 그러잡힌 두손에 꾸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시선이 반항심을 한가득 담고 정국을 올려다본다. 정국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여보지만, 그 입은 결국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심통을 부리듯 자신의 말을 죄다 부정하고 스스로의 가치와 자존감을 필사적으로 깎아내리려는 호석의 몸부림 속에서 정국은 역설적으로 저의 도움을 바라는 그의 외침을 듣는다. 과거의 불행과 불운에 얽매여 그것들을 신봉하면서도, 그것을 깨뜨리고 자신을 붙잡아 구원해줄 이가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읽는다.

 

정국 역시 그 사람이 자신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형을 생각하면, 나는 무언갈 반드시 극복 해내야 할 이유가 생겨요. 형이 겪은 일들 때문에 내가 형에게 벌이라 믿는다면, 나도! 나도 똑같이 내가 겪은 일들로서 형은 내게 행운이라고 믿어요. 희망이라 믿어요. 구원이라 믿어요."
"...........바보야..."
"그러니까, 형이 나를 좋아하는 것 만으로 내가 다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똑같이 내가 형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내가 그것을 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제발 믿어요. 나는 그럴 수 있어요. 그렇게 했잖아요, 지금껏 형이...! 그리고 내가! 앞으로도 형이 걱정하는거 내가 다 이겨낼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껏 좁혀든 미간을 하고 자신을 원망하듯 노려보는 호석의 눈동자 속에서 정국은 희망을 바라본다. 파르르 떨리는 호석의 숨결에서 정국은 고양된 기대감을 읽는다. 아무렇게나 튀어나오려는 부정의 말을 꾹 참으려 꽉 다물린 호석의 입술에서 정국은 저의 말에 솔깃해진 그 마음의 빈틈을 발견한다.

 

그런 그의 빈틈에 쐐기를 박아넣듯, 정국은 스스로의 바람을 그에게 한가득 불어넣었다.

 

"숨길 수도 없는 마음 가지고 나한테서 자꾸 도망치지 말고, 이제 그만... 나를 믿어줘요. 그리고 나를 받아들여줘요. 나를, 사랑해줘요. 사랑해줘요, 나를...! 나를!!"

 

그 초봄,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부드러운 짙은 갈색의 눈동자 속에, 이제는 말로서 다 표현 못할 만큼의 감정들이 바다만큼 담겨 깊은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한껏 무르익어 붉게 부풀어 오른 봉선화 봉오리처럼 한껏 달아올랐다가, 제 때에 찾아온 무거운 장맛비처럼 그렇게 와르르 뺨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발갛게 물든 눈두덩이와 콧망울, 숨을 몰아쉬느라 헐떡이는 어깨, 그리고 갓 배운 말을 처음으로 뱉고 싶은 것처럼 빠끔거리는 얇고 붉은 입술. 

 

그리고, 

 

마침내.

 

 

 

 

 

 

 

"...사랑해. 내가. 너를."

 

 

 

 

 

 

 

정국은 눈을 감았다.
다가간 입술 위로 맞닿은 그 따스함은


 

 

 

 

 

꽃처럼, 비처럼, 단풍처럼, 눈송이처럼
내 마음에서 피고 또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계절이 되어
당신을 품고 또 거두고

 

셀 수 없던 기다림과
길었던 이야기의 끝에서

 

새로이 맞이하는 계절처럼 시작될
당신의 또 다른 이야기
그리고 그 안의 나의 이야기

 

 

 

나와 당신의 이야기.

 

 

 

 

 

 

 

 

 

 


 

 

 

 

 

 

 

 

 

 

정국은 살구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손바닥으로 눈 위에 차양을 만들어 쨍하니 내려쬐이는 햇빛을 가리고 더욱 그 꼭대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푸릇하게 우거진 녹빛 잎사귀들 사이로 언뜻언뜻 노오란 것이 보인다.

 

"형, 여기 사다리 있어요?"

 

정비소 한 귀퉁이에서 무언가 뽀시락대던 호석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 없이 무심히 손가락으로 가라지 한 구석을 가르키면, 정국은 마치 제 일터인 양 알아서 척척 높다란 사다리를 가져다가 살구나무 아래 턱 하니 세워놓는다.

 

"나 잡아줘!"

 

저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제 할 일이 바빠 보이는 호석에게 칭얼거리듯 빽 소리를 치면, 동그란 뒤통수가 쫑긋 반응하며 제 쪽을 돌아다본다. 여름 더위에 한껏 지쳐 입끝이 축 쳐져 있으면서도 무엇이냐며, 왜 그러느냐며 저를 살피러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호석을 보면, 하루종일 보았음에도 질리지도 않는지 또 헤벌쭉 웃음이 귀에 걸린다. 

 

호석이 다가오기가 무섭게, 정국은 사다리를 타고 성큼성큼 위로 올라갔다. 그 거침없는 몸동작에 당황한 호석은 허겁지겁 사다리의 밑동을 단단히 잡아 고정시킨다.

 

높다란 사다리의 가장 꼭대기에서 중심을 잡고 힘껏 팔을 뻗으면, 그 손바닥에 잡히는 몰랑하고 뜨끈한 그 동그란 감촉. 얼핏 잡히기엔 세네 개 정도 열린 것 같아 보이지만, 정국은 일부러 그중 하나만 똑 따내었다. 막상 손에 쥐고 보니 더욱 보드랍고 탐스러운 것이 꽤나 실하고 야무진 놈으로 고른 듯싶다. 

 

샛노랗고 발그란 살구다.

 

부서질 듯 내리쬐이는 태양 빛을 머금은 듯 제 손아귀 안에서 마치 금빛으로 빛나는 그 과일이 뿌듯하여, 정국은 아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코 끝으로 가져다 대면, 지난 봄 진하고 화려한 냄새를 풍기던 꽃향기가 무르익어 동그란 과실로서 맺힌 듯, 새콤하고 달달한 그 냄새가 침샘을 고이게 만들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가지만, 과일을 입에 대는 것보다 먼저, 정국은 여전히 사다리를 붙잡고 저를 올려다보는 호석을 내려다본다.

 

"뭔데? 뭐야?"

 

궁금함을 한껏 담아 저를 올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고 궁금해 하는 모습이 꼭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여름볕에 익어 발갛게 익은 동그란 뺨은 제 손안의 살구 같고,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꼭 흑진주 같기만 하다. 그도 저처럼 이 살구를 보고 좋아할까. 좋아할 것임에 틀림없다.

 

미끄러지듯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그 말간 얼굴 앞에 보란 듯이 손을 내밀면,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얼굴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한껏 채워진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정국은 제가 해낸 일에 마음이 우쭐해지고 뿌듯해진다.

 

"우와! 이게 열렸어?! 홍수 때문에 그냥 다 쓸려가고 하나도 안열릴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게 열렸지? 진짜 신기하다. 넌 또 이걸 어떻게 보고 또 땄어? 너도 진짜 대단하다."
"냄새 좋아요. 냄새 맡아봐요."

 

그 말에 스스럼 없이 제 손으로 얼굴을 가져다 대고 향을 맡는 그의 무방비함은, 매번 명치 끝을 간질거리는 쑥스러움을 가져온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제 말마따나 향이 참 좋다고 한껏 들뜬 목소리에 제 마음도 덩달아 저 높이 하늘 끝까지 치솟는다. 

 

"맛있을까?"

 

물음의 형태를 띄고 제 얼굴을 바라보는 그 눈 속에는, 먼저 먹어보라는 뜻이 숨어있다. 먼저 발견하고 따온 수고를 정국에게 우선 돌리고 싶은 배려도 있겠지만, 먹고는 싶지만 겁이 나서 선뜻 입을 대지 못하는 그의 속내가 더 클 것이란 것을 정국은 알고 있다. 

 

그런 그에게 보란 듯이 크게 한 입 베어 물면, 새큼한 육즙과 향이 혀를 자극하여 한껏 침을 고이게 만들고, 뒤이어 느껴지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과육이 온 입안을 채운다. 이 열매는 생그랍고 달큰하다. 혹독했던 계절을 버티고 자라난 만큼, 그렇게도 달고, 또 맛이 좋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빛과 높은 습도가 만나 풍기는 한여름의 향취, 살구를 우물거리는 저를 바라보는 반짝이는 당신의 시선, 그리고 제 입을 한가득 채운 계절을 담은 풍미. 그 모든 것들을 음미하듯 천천히 입안에서 굴리다 꿀꺽 목구멍으로 넘기면, 저를 바라보는 호석의 목울대가 마치 똑같은 것을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함께 고인 침을 삼킨다.

 

"맛있어?"

 

재차 확인하듯 묻는 그 말에 불쑥 제가 베어물은 그 살구를 내밀면, 제 손 마저도 그것의 일부인 양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댄다. 맛을 보느라 슬몃 내리깐 두 눈과, 달디단 과즙을 물고 오물거리는 입술, 그리고 여전히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그 두 손. 

 

아아, 여름은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쉽게 달아오르는 체온과 붉어지는 얼굴은 모두 무더위 탓이라는 훌륭한 핑계를 댈 수 있지 않은가. 

 

억지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 이런저런 것들을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푸시식 웃음을 터뜨리면, 왜 웃냐는 듯 궁금함을 가득 담고 저를 쳐다보는 그 시선조차 좋아서. 

 

이유를 알려줄 수 없는 정국은 말없이 그냥 웃는다. 그러면 이내 그 웃음이 저에게서 옮기라도 한 듯, 호석 역시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그렇게 웃음을 띄운다.

 

"진짜 맛있다!"

 

 

 

 

 

계절은 그렇게 깊어간다.

 

 

 

 

 

 

 

 

 

-완결-

 

 

 

 

 


-2020.07.20

긴 이야기를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일 후기 들고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