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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9

by 1mpulse 2020. 5. 9.

by Impulse

 

 

 

동네가 아무리 평화롭다곤 해도, 사람도 몇 없는 파출소에 순경 둘이 농땡이를 치다보니 안걸릴래야 안걸릴 수가 없다. 

 

얼마 전 다녀간 국회의원의 사무실에서 고생들 했다며 면피용으로 쌀포대 몇을 보냈다. 그것을 동네 어르신들께 나누어 줄 만큼 나누어 준 뒤 파출소장은 김경장, 그러니까 정국의 사수이자 선배인 그에게 허리가 편찮아 쌀을 받아가지 못하신 어르신께 가져다 드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심부름을 가기는 귀찮고 힘 좋은 후배놈은 부려먹어야 제 맛이라 생각하는 김경장은, 그날따라 아침나절부터 일찍이 호석의 정비소로 나들이를 나선 정국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 한 시간 쯤 빈둥빈둥 기다리다가, 따땃하니 날이 좋은 봄날씨의 유혹은 이기기 힘들었던 관계로, 김경장 역시 칙칙한 파출소로부터 훌쩍 탈출해버렸다. 

 

그렇게 오후가 되도록 쌀포대가 영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나머지 어르신은 아픈 허리를 힘겹게 들어 파출소까지 직접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힘겹게 도착한 파출소 문짝에는 '자리 비움' 이라는 팻말만이 덜렁, 두 명의 순경은 진작에 자리를 비우고 없었기에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느적느적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길에 복덕방 영감님과 신나게 장기를 두고 있는 파출소장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구, 저, 소장 양반, 아까 아침에 나한테 줄 거 있다고 전화하지 않았소?"
"어어, 그랬죠? 우리 애들이 아직 안갔나요?"
"글쎄...? 하도 안와서 파출소에 가봤더니 아무도 없는게 아니겠소. 안에 쌀봉지 있는건 멀쩡히 보이는데 말이오."
"...이노무 쉐에키들이!!! 에이썅!!!"

 

와장창!!!

 

"아, 아니!!! 야!! 박소장아!!!! 임마!!!!! 가려면 곱게 가지 장기판을 엎긴 왜 엎어!!!!"

 

형국이 불리했던 장기판은 하늘로 날아갔고 화살처럼 쏟아지는 복덕방 영감님의 욕지거리는 못들은척, 파출소장은 무전기를 삐익삐익 울려대며 우다다 골목길을 뛰쳐 도망갔다. 그렇게 이유야 불문하고 허겁지겁 도착한 파출소 문짝에는 여전히 '자리 비움' 팻말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고, 무전기를 그렇게 울려댔는데도 두 놈 다 한 시간 쯤 지나서야 느적느적 파출소로 되돌아 온 것이, 저녁 다 늦도록 정국과 김경장이 함께 붙들려 반성문을 쓰게 된 전말 되시겠다. 

 

그렇게 전지에 쓰여진 반성문은 둘에게 쪽팔림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다음 날 '자리 비움' 팻말 대신 파출소 문짝에 떡하니 붙여졌다. 공고문도 아닌것이.

 

정국은 적어도 일주일간은 죽은 듯 파출소에 묶여있는 셈 쳐야겠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에게도 사회인으로서 최소한의 체면과 눈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는, 저녁에 퇴근해서 정비소 가지 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엉덩이를 붙이고는 있었으나, 답답한 파출소는 너무나도 무료했고, 파출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봄 날씨는 보기만 해도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으며, 그보다도 더, 호석을 보고싶을 때 훌쩍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발 묶인 제 처지가 무척이나 울쩍했다. 게다가 제가 저녁때 간다 한 들, 지난번처럼 호석이 저를 기다려 줄 지도 미지수인 점이 그 울적함에 무게를 더했다.

 

 

 

 

늦은 오후, 그렇게 집 지키는 강아지 형상으로 턱을 괸 채 파출소 창문 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때에, 정국은 제 눈을 의심했다. 보고 싶으니까 헛것이 보이나, 창문 밖으로 씩씩한 걸음걸이를 한 호석이 휘익 빠르게 파출소 앞을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닌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쭈욱 내빼어 그 이름을 부르려다가, 어디론가 빠르게 가는 모양새였기에 그냥 입맛만 다시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걸까.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진지 아마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졌던 방향 쪽으로부터 호석이 다시금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 보였다. 벌써 일을 다 마친건가, 뭐라도 급하게 사들고 오는걸까 싶어 창 밖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걸음을 옮기던 호석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파출소 안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 던져진 시선은 마찬가지로 호석을 바라보고 있던 정국의 시선과 떡하니 공중에서 마주하게 된다.

 

".........."
".........."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호석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시선을 외면하고 후다닥 파출소 앞을 도망치듯 지나쳐 갔다. 그리고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려 일어섰던 정국의 두 눈은 무안함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니, 눈이 마주쳤으면 아는 척이라도 하던, 하다못해 눈인사라도 해 줄 것이지! 뭐야, 속상함과 억울함을 담은 그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하고 튀어나온다. 빈정이 잔뜩 상한 입술도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어 그대로 창문 밖만 주구장창 보고 있는데, 또 다시 호석이 파출소 앞으로 지나치려다가 안쪽의 정국이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것에 화들짝 놀라더니만, 이번엔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황급히 되돌아가버린다. 대체 왜 그러는거야?! 야속함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려다가 문득, 혹시나.
마치 봄비를 맞이한 소담한 꽃봉오리처럼 마음에 설레임의 희망이 봉긋 솟아오른다.

 

 

 

혹시, 날 보러 온건가?

 

 

 

생각에 이르자 정국은 더 이상 책상 앞에 붙어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파출소 문을 열었을 때, 화악, 짓쳐들어오는 봄날의 뜨끈한 햇볕을 머금은 공기와, 그리고 그것이 잔뜩 품어안은 아카시아의 향내가 눅눅함과 서늘함에 익숙한 몸을 단숨에 휘감아온다. 싱숭대는 가슴이 따사로움을 머금고 보송해진다. 열을 품고 부풀어 오른다. 그 둥실해진 마음을 보듬어 안은채로 정국은 호석이 몸을 돌려 사라진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파출소 바로 옆 골목 아카시아 나무 곁을 지나칠 때, 마치 온 신경이 한 쪽으로 뭉텅 쏠리는 본능적인 감각에, 정국은 골목 안으로 이끌리듯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정비소까지 한참을 뛰어가야 잡을 수 있을까 싶었던 그 인물이, 빨려들어간 자신의 시선 속으로 한아름 흔들리는 아카시아 꽃과 함께 가득 들어 찼을 때의 그 눈부심, 그 반가움, 그리고 그 가슴 떨리는 전율.

 

마치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려다 집주인에게 잡혀버린 아이처럼 멋쩍음과 함께 혼이 날까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이 묘하게 섞인 얼굴을 한 호석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조마조마한 눈빛이 정국의 입술만 뜯어보고 있는 것에 불뚝 짓궂은 농담이 튀어나오려다가 문득.

 

정국은 한 달 즈음 전, 저가 정비소를 찾아오지 않는 것을 궁금해 한 호석이 자전거를 돌려주는 척 파출소를 찾아 왔었다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때도 호석은 지금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파출소 앞을 오가며 안쪽을 들여다보고, 저가 있는지 없는지 가늠을 하고, 그러다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겁 많은 그 마음을 딛고 파출소 안으로 발을 들였었을까. 저를 찾아서.
......저를 찾아서.

 

 

 

어쩐지 목이 메이는 것 같기도, 가슴이 벅차는 것 같기도 한 감정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정국은 흐읍,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 한가득 아카시아 꽃 향기가 가득 찬다. 마음에 꽃 같은 사람이 가득 찬다.

 

"...날씨 참 좋다, 그죠?"
".....................응..."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눈동자가 마치 봄볕이 내려쬐인 눈조각처럼 사르르 녹아들며 부드러움을 품는 그 기적적인 찰나. 정국은 괜스레 코 끝이 시큰해지는 듯한 기분에 큼,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봄이라도 타는가, 괜히 습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들뜬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나 농땡이 피우는거 소장님한테 걸려서, 한 일주일은 얌전히 파출소에 묶여 있어야 되요. 그래서 오늘은 퇴근하고나서 형한테 가려고 했지."
"...어... 문에 붙어 있는 반성문 봤어. 진짜 웃기더라...! 솔직히 넌 지금까지 그렇게 농땡이 부린게 용한거지, 맨날 세금 날로 먹는 경찰 아저씨야."

 

말이야 맞는 말이기에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더니 호석도 따라서 하하핫, 특유의 주변을 단숨에 밝아지게 만드는 환한 웃음소리를 낸다. 그 웃는 얼굴을 제 품에 부둥켜 안고 싶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가, 일전 호석에게서 들었던 말을 기억하곤 그것을 되돌려 엄한 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런 정국의 행동을 따라가던 호석의 시선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곱게 웃음으로 접힌다.

 

그렇듯 갓 따낸 흰 복숭아를 한껏 배어문 것 처럼 간지러운 듯 달콤한 듯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중에, 호석이 제 작업복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는 쭈뼜대며 정국에게 내밀었다.

 

제가 녹음해서 선물한 테이프였다.

 

"..........여기 올 때마다 뭘 나한테 자꾸 돌려주려고 하네요? 나한테는 자기 찾아올 때 핑계 안대도 된다고 그랬으면서."
"아...... 있잖아, 나... 이거...... 그,"

 

당황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찾느라 한참을 어물거리는 호석을 보며, 예전, 그 돌아온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땐 끝간데 없는 초조함과 불안감에 속에서 불이라도 타오르듯 화가 치밀었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정국은 호석의 말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더이상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저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저에게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신감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호석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이거... 테이프가 늘어났어... 그래서... 밤에 들으면 소리가, 무서워."
"............아... 그, 냉동실에 좀 넣어두면 원상복귀 되던데?"
"몇 번 해봤어. 근데 또 늘어나서, 이젠 복구가 안돼... 나 이거 어떡해...?"

 

스스로의 귓볼을 몇 번 잡아 늘였다가, 귀 뒤쪽을 긁적이듯 쓰다듬다가, 혀로 입술을 훑듯이 축였다가. 안절부절, 민망함을 온 몸으로 부산스럽게 표현하던 호석이 마침내 슬쩍 정국을 올려다 보는 그 눈 속에는 곤란함과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 한가득이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며 한쪽 팔을 들어 골목의 벽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테이프를 들고 있는 다른 손은 허리춤에 걸쳐 얹고, 눈을 꾹 감은 채로 제 속 안에서 와글와글 끓어오르는 욕구를 삭혀냈다. 온 몸에 열이 올라 등줄기에 주욱 땀이 배어 오르고, 제멋대로 웃음이 차오르려는 안면근육을 굳히느라 얼굴이 아팠으며, 벽과 제 허리를 짚고 있는 양 손은 제 눈 앞의 사람을 와락 껴안고 싶은 것을 안간힘을 다해 참느라 바들바들 떨렸다. 

 

턱에 힘을 잔뜩 쥔 채로 한껏 인상을 쓰고는 훅훅 콧바람을 내뿜고 있는 정국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바라보고 있는 호석의 얼굴에 점점 미안함이 번져 나가기 시작한다. 다 늘어난 테이프를 정국에게 가져온들 별 다른 수가 있을리도 없는데. 심지어 무언가를 능숙하게 고치는 일은 정국보다는 자신이 더 잘 알텐데. 괜히 파출소까지 가져와서 정국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했다. 

 

정말로,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 귀여운 사람. 겁 많은 사람.

 

이대로 있다가는 또 다시 도망을 칠 것이다. 다시는, 제가 있는 파출소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정국은 허겁지겁 제 셔츠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어 호석에게 불쑥 내밀었다.

 

"형, 집 전화번호 적어요. 빨리."
"...........내 전화번호 왜...?"

 

급작스러운 전화번호 요구에 의문투성이인 얼굴임에도, 심상치 않은 정국의 표정에 스스로가 무언가 잘못한게 있나 싶었던지 따져 묻지 않고 순순히 전화번호를 적어 건낸다. 동글동글한 숫자가 적힌 메모지와, 평소에는 작업용 장갑에 꽁꽁 숨어있는 그 곱고 예쁜 손. 

 

그 손에 들린 하얀 종이를 받아드는 척, 우연을 가장하여 제 손 끝으로 손가락을 슬쩍 쓰다듬었다. ...그러자 저를 쳐다보던 두 눈에 의문과 함께 의심의 빛이 섞여들고, 이내, 반사작용을 보이는 미모사의 이파리처럼 사르륵, 그 손 끝이 주먹 안으로 움추러 들어간다.

 

반사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비단 호석 뿐만이 아니다. 그 작은 손끝의 스침 하나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잔뜩 굳혔던 정국의 얼굴에 웃음이 벙실 떠올라버렸다. 분명 푼수처럼 보였을 것이다. 멍청이 마냥 보였을 것이다. 햇볕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웃음이 멈추지 않는 바보같은 제 얼굴이 헤퍼보일까 팔뚝으로 열심히 가리려 애를 썼으나,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제 심장은 이미 둥둥, 둥둥, 둥둥.

 

"아니, 진짜, 일부러 그런거 아니에요."
".........거짓말."
"진짜루."

 

비식비식 여전히 새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정국은 또 한 장의 메모지를 꺼내어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적어서는 뾰루퉁하니 저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호석에게 내밀었다.

 

"...뭔데?"
"형은 노래 뭐, 그거 맨날 같은 것만 들어요? 직접 불러줄게요. 신청곡도 받고, 전화를 받을 수 있을 때라면 언제든지. 그러니까, 노래 듣고 싶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아니면, 내가 전화할까? 해도 되요?"
"........너 진짜 뻔뻔하다......."

 

최대한의 어이 없음을 한껏 주워담은 호석의 목소리가 말미에는 꾸욱 쥐포처럼 눌렸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푸핫 얼굴을 모로 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국 역시 그 웃음에 이끌려 흐흐흥, 콧망울을 울리며 멋쩍게 웃는다. 때마침 지나쳐가는 봄바람에 간질러진 아카시아 꽃망울도 푸스스스 이파리를 떨며 웃음 섞인 향기를 떨군다.

 

 

 

 

모자란 제 노래 소리가 좋다고 했고
저보고 노래를 잘 한다고 했고
제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얼마나 들었는지
다 늘어진 것도 모자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쳐서 듣고 또 듣고

 

그나마도 이제는 더이상 복구가 되지 않아서
내게 도움을 청할 정도라면

 

 

 

 

당신은 분명 내가 부르는 노래 뿐만 아니라
나도 좋아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군대에서 전역을 반 년 앞두고 있을 즈음.

 

겨울이었다.

 

 

 

 

그놈의 연탄불
수 백 번도 더 갈아보았을
그놈의 연탄불 

 

 

 

 

왜 그 날 따라 불이 제대로 붙었는지 확인을 안하셨는지, 아니, 날도 추운데 왜 방 문을 꼭 안 닫고 주무셨는지, 아니, 남들은 보일러 쓴다는데 왜 우리집은 아직도 연탄불을 때는지, 아니, 왜 내가 휴가를 다녀간 뒤 한 달도 안되어 이렇게 가신건지, 아니, 전역하면 빚 갚을 것이 걱정이란 멍청한 아들놈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시질 말지, 아니, 반 년 만 그 멍청한 아들놈 전역하는거 기다리시지. 

 

그리고 같이 죽지,
같이 죽지,
같이 죽지.

 

 

 

 

찾아오는 사람도 얼마 없는 장례식장 향로 옆에 주저 앉아 그렇게 눈물로 원망도 해보고, 후회도 해보고, 두 손을 싹싹 빌며 잘못을 구해도.

 

 

 

 

이미 일어난 사고는 되돌릴 수 없다.

 

 

 

 

새벽 동이 트면 눈을 감으신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두 번째 밤, 눈물도 바싹 말라 모래알처럼 버석한 눈 앞에 검은 양복을 빼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분향을 하고, 어머니의 사진 앞에 절을 한 번, 두 번. 그리고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호석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형, 호석이 형."

 

 

 

 

 

 

 

 

아아,
다시 태형을 만났을 때,
자신은 더이상 그의 선배가 아니었다.

 

 

 

 

 

 

 

 

 


2020.03.19.

사실 아카시아 나무는, 아까시 나무가 맞습니다.

 

아카시아 껌은 있어도
아까시 껌은 없고,

 

아카시아 꿀은 있어도
아까시 꿀은 어색하기에,

 

저도 아카시아 꽃이라 썼습니다.

 

그 어감에 향수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