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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국홉/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08

by 1mpulse 2020. 5. 2.

* 과격한 언어와 행동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면역력이 없으신 분들은 주의해 주십시요.


 

by Impulse

 

 

 

 

 

"선배도 그림 한 번 그려보실래요?"
"...난... 그림 못그려."
"그럼 제가 가르쳐 줄게요."

 

그리고 있던 스케치북을 훌떡 한 장 넘기고, 태형은 호석의 팔을 잡아 일으켜 제가 앉았던 이젤 앞으로 끌고와 자리에 앉혔다. 노트 필기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연필을 쥐게 만들고, 그 손 위에 커다란 태형의 손이 겹쳐온다. 

 

"...팔을 이렇게 하는거에요."

 

등에 딱 붙은 태형의 가슴과, 어깨에 걸쳐진 턱이 마치 뒤에서 껴안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붙잡힌 손이 들어올려져 스케치북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죽, 크게 선을 긋는 시늉을 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는 땀으로 축축해졌고,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은 발갛게 열이 올랐다. 손을 잡고 있지 않은 태형의 다른 손이 감싸듯이 호석의 허리를 둘러온다. 숨이 막혀왔다. 

 

"선배랑 평생 이러고 살았으면 좋겠다... 계속. 쭉. 그쵸?"

 

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새하얀 빛, 새하얀 석고상, 새하얀 스케치북. 

 

쿵쾅대는 심장과, 

 

새하얀 머리 속.

 

순진했고, 무지했던 나날들.

 

 

 

 


 

 

 

 

지직거리는 교실 스피커에서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가 느슨하게 들려오면, 도시락은 진작에 까먹은 녀석들이 우당탕탕 시끌벅적 운동장으로 몰려나간다. 예전이라면 은근슬쩍 밖으로 나가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멀거니 운동장에서 바람을 쐬던가 아니면 교실로 돌아와 못다한 잠을 청했을 호석에겐, 얼마 전부터는 조금 다른 일과가 생겼다.

 

점심 시간 마다 태형은 호석을 찾아와 그를 끌고 미술실을 향했다.

 

존재하던 줄도 몰랐던 학교 한구석의 미술실은 그 날, 그 때 이후로 둘 만의 비밀을 간직한 은밀한 장소로서 존재감을 달리했다. 적어도, 호석에게는 그러했다. 

 

괜스레 죄 짓는 사람처럼 남들 눈을 피해 끌려가는 그 발걸음에는 두근두근 스릴이 넘쳤고, 미닫이 문 손잡이에 태형이 손가락을 걸어 넣을 때면 마음을 단단히 먹듯 뒤에서 입술에 꾸욱 힘을 주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을 때, 창으로 비쳐들어오는 햇살을 뒤로하고 온 얼굴로 웃으며 저를 그 안으로 끌어당기는 태형을 볼 때면, 그렇게 가슴이 벅차오를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이, 감정이, 마치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밀크 초콜릿처럼 달콤해서, 호석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매일 매일 그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것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는 조금 다르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을, 호석은 나중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과 계급이 존재하고, 아직 정신적 성장이 미숙한 청소년인 사회원들은 그것에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끼고 배척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유복하고 인기가 많은 태형은,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높은 지위에서 동경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 존재이다. 반대로 가난하고 생활고 탓에 교우 생활마저 빈곤한 호석은 낮은 지위에서 시선의 그늘 속을 걷는다. 학년마저 다른 이 둘이 갑자기 은밀한 방식으로 어울린다는 것은 그들의 작은 사회에 특이점이 발생했다는 뜻이고, 이 청소년들의 불안정한 사회에는 자신들의 잣대대로 튀어나온 못에 정을 내려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자들로 가득했다.

 

 

 

 

담임의 종례가 끝난 후에도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깨지 못하고 있던 호석이 퍼뜩 불쾌감과 함께 눈을 뜨게 된 것은, 누군가가 그의 발을 냅다 걷어찼기 때문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올린 시선 위로 동혁이 놈 패거리가 호석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뭐야? 깨우려면 곱게 깨우던가."

 

별 볼 일 없이 껄렁하게 노는 패거리에 엮여 좋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사내놈들이 힘 자랑에 세력 싸움을 한다며 유치하게 거들먹거리는 것에 대꾸해줄 만큼 혈기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부시시 일어나 둘러싼 놈들을 무시하며 가방을 챙기는 중에, 동혁이 이번엔 호석의 신발을 꾸욱 밟았다. 아플만큼 센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불쾌함에 불쾌함을 곱할 수 있을 만큼의 힘으로.

 

"야, 정호석. 너 신발 좋은거 신었다?"
"...삥 뜯으려고 이러냐? 나 돈 없어, 다른데 가 봐."
"알아, 너 돈 없는 새낀거. 근데 이 신발은 어디서 났냐고."
"........"

 

약점을 찔린 기분에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도 못하고, 심지어 엄마가 사줬는데 어쩔거냐며 허풍도 못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길게 엮여 좋을 것 하나 없을 것이 뻔했기에 호석은 눈을 내리깔고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하교 길에 태형을 만나 함께 화방을 구경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런 데에 신경 쓸 시간 따위 없는데. 그런데 뒷통수에 꽂히는 말이.

 

"너 걸레짝 같은 신발 때문에 애들이랑 농구도 축구도 안하는거 아니었냐? 누가 사줬냐, 그 메이커 신발을? 돈 많은 김태형이 너 불쌍하다고 사주던? 너 그거 신고부터 뭐 빠진 똥개 새끼처럼 점심시간 마다 그 새끼 쫄래쫄래 쫓아가더라?"
"........뭐?"
"기생오래비 같이 생긴 것들이 점심 시간 마다 둘이서만 몰래 미술실에 숨어서 뭣들 하는지는..."

 

음란스러운 손짓을 하는 동혁이 놈과, 낄낄거리는 패거리들. 그리고 그 뒤에서 청소하는 척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같은 반 놈들. 그리고 그 말에 덜컥, 들켜서는 안될 비밀이 들킨걸까 등줄기에 주욱 소름이 돋는 저 자신.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 사실과 허구, 그 어느 것도 이 작은 사회에서는 중요치 않았고, 통용되지도 않았다. 무리는 쉽게 자극적인 가쉽에 휩쓸리고, 그것에 어떤 이유로든 침묵으로 일관하는 순간, 그 가쉽은 그들 사이에서 진실로 결정지어진다. 호석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바로 그 순간임을 깨달았다.

 

"신발 한 켤레 값이면 나한테도 니 후장 한 번 대줘봐라, 씹새끼가. 돈 줄게."

 

눈 뒤에서 고압 전류가 합선이라도 일으킨 듯 퍼석, 희고 강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그 뒤는, 더 이상 이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가방을 동혁에게 집어 던졌다. 그것을 피하느라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동혁의 몸 위로 달려들어 발길질을 내질렀다. 그 넘어진 몸 위에 올라타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곁에서 이죽거리고 섰던 놈들이 우르르 달겨들어 호석을 잡아 뜯어내어도 악에 받친 사람처럼 그 손길을 뿌리치고 달려들고 또 달려들고, 그 와중에 마찬가지로 얻어 맞고 걷어 차이기까지 하면서도 악착같이 동혁에게 달려들어 물고 늘어졌다. 잡아 뜯기는 손아귀에 교복 단추가 튀어 공중을 날고, 얻어 맞아 고개가 돌아가며 코피가 튀고, 이마가 찢어져 흐르는 피에 한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그 더러운 말을 내뱉은 존재를 쫓아 발을 내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고, 손에 잡히는 책걸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니가 뭘 알아.
늬들이 뭘 알아.
얻어 맞아 피가 고인 입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이다.

 

저와 태형과의 관계, 어머니가 주워오신 신발. 이 두 가지의 존재가 이 학교라는 사회 내에서의 제 입지를 지금보다도 훨씬 낮은 곳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 역겹고 신물이 났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진실도 거짓도 말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더더욱 역겨웠다. 그리고 저 자신을 그렇게 만든 동혁이 놈이, 아니 이제껏 저를 그렇게 바라봐 왔던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던 같은 반 놈들이 모두 증오스러웠다. 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남들과 그럭저럭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라미드의 중간층은 된다는 듯 구는 위선자 새끼들.

 

 

 

 

 

 

죽어버리고 싶었다.

 

 

 

 

 

 

제 마음도 제 가난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 뿐인데. 

 

 

 

 

 

 

난동은 반장이 담임을 불러오고 나서야 겨우 소요되었다. 정확하게는, 모두가 담임의 고함에 멈칫했을 때를 틈타 호석이 냅다 교실을 뛰쳐나갔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이마에서 불쾌하게 질척거리는 것이 피인지 땀인지도 모른채 소매로 대충 훔치며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뒤로는 고래 고래 뭐라 소리를 지르는 담임의 목소리가 귀 끝을 쫓아왔지만, 그것이 제 알 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불쾌감과 역겨움에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를 빠져나가려는 호석의 팔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태형이었다.

 

놀람과 당황으로 새파랗게 질린채 여기 저기를 살피는 큰 눈은 꼭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이 하고서. 

 

"이거 놔."
"선배, ...무슨 일이에요?"
"놔. 나한테 오지마."
"...........왜요?"
"남들이 봐."

 

그 말을 들은 태형의 눈빛이 동요하듯 흔들렸다. 그 흔들린 눈빛에 불처럼 길길이 날뛰던 마음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순간 모든 것이 비참해졌다.

 

뿌리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호석의 팔을, 다시금 채어잡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당황함으로 느려진 호석을 앞질러서는 잰걸음으로 재촉하듯 잡아당겼다. 

 

"...놓으라고...!"
".........."
"....남들이!! 본다고!!!"
"...보면 보라고 해요."

 

그 한마디에.

 

잡힌 손아귀를 잡아 빼려던 힘이 빠져버리고 몸을 뒤로 잔뜩 젖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던 다리가 주욱 맥이 풀린다. 그 말이 무엇이나 된다고. 고작 그 한마디가 대체 뭐라고. 그러나 별 것 아닌 그 말 한마디에 깊숙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기쁨으로 훌쩍 둥실거린다. 그 기쁜 마음이, 기뻐하는 자신이, 호석은 너무도 싫었다. 너무나도 싫어서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제 마음조차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태형이 싫었다. 미웠다. 그리고 또 미웠다.

 

 

 

 

 

태형에게 이끌리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넋을 잃고 끌려다니던 끝에, 삐이익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크고 커다란, 그리고 칠흑같은 철문이 눈 앞에 있었다. 여느집 대문과는 달리 비바람에 페인트 칠이 벗겨져 본 적 조차 없어 보이는 그 문은, 마치 그 집을 수호하는 수문장처럼 묵직한 무게감과 압박감을 지니고 호석을 찍어누르는 듯 하였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서 둘러 보게 된 주변은, 이제껏 호석이 봐온 적이 없던 풍경이었다. 개별 주차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셔터가 달린 담장, 그 높다란 담장 너머로는 잘 정돈된 정원수들이 보이고, 그리고 고급스러워보이는 통유리로 멋지게 창을 낸 붉은색 벽돌집. 길에는 쓰레기 하나, 연탄재 조차 보이지 않으며, 담장에는 그 흔한 찢어진 벽보나 낙서도 없었다. 그 풍경에 당연하듯 녹아있는 것은 인터폰으로 제 가족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태형이고, 그 풍경에서 당장 사라져야 할 이질적인 존재는 피와 상처로 엉망인 호석, 자신이었다. 

 

돈 많은 김태형이 너 불쌍하다고 사주던?

 

유독 그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본능적인 박탈감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 

 

"..............나, 이제 갈래."

 

불쑥, 철 없는 아이가 내뱉듯 그렇게 그 말이 입으로부터 떨궈져 나왔다. 이 숨막히는 공간으로부터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

 

"상처 그러고 어딜 가요. 들어가서 조금 치료만이라도..."
"아니, 싫어. 나 괜찮아. 갈래."

 

뿌리치고 골목을 서둘러 걸어 내려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부자 동네도, 그리고 태형도. 그것의 원인이 태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격지심에 있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애초에 사회의 통념상 당치도 않을 관계를 시작한 것 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동혁과 그 패거리들에게 얻어맞고 찢어진 부분들이 욱신거리고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짧았던 꿈에서 깨고 현실을 자각한 것 처럼.

 

걸어내려가는 어깨가 다급하게 붙잡혀 몸이 돌아간다 싶더니만, 강하게 밀려오는 힘에 넘어지지 않으려 뒷걸음질을 치다가 쿵, 하고 등과 뒷통수가 딱딱한 벽돌 담장에 부딫혔다. 그 얼굴의 옆으로 태형의 양 팔이 담벼락을 짚고 섰다. 마치 호석이 도망치는 것을 가둬서라도 막으려는 듯.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이제 싫어. 나는 너 이제 싫어."
"...거짓말 하지 마요!"

 

상처로 부어오르지 않은 한 쪽 눈 앞으로 태형의 초조한 듯 화가 난 얼굴이 가득 들어 찬다. 쏟아질 듯 커다란 눈은 당혹감으로 일렁이고, 상처로 엉망이 된 호석의 얼굴에서 그의 말이 거짓인 증거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듯 필사적이었다.

 

"왜 눈으로는 날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입으로는 그런 못된 말을 해요?!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이렇게 도망을 가요...? 내가 이렇게나 선배를 좋아한다는데...!"
"비켜."
"왜, 왜...! 나는, 내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데..!!"

 

속에 있는 말을 어떻게 표현할 길을 못찾고 전전긍긍하는 태형의 목소리에 답답함과 억울함이 잔뜩 맺혀있었다. 그렇게 아둥바둥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커다란 손이 호석의 뺨을 붙잡고 찢어져 아픈 입술을 허겁지겁 부비고 들어왔다. 그걸 키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 마음만 급했던 그 무례한 행동을.

 

 

 

짝----!

 

 

 

조용한 골목길에 파열음이 퍼지고, 발갛게 부어오르려 하는 한쪽 뺨을 부여잡은 태형이 고개를 숙인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몸을 밀치듯 빠져나와 골목길의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다리를 재게 놀렸다. 동혁을 때렸던 주먹은 하나도 안아픈데, 태형의 뺨을 때렸던 손바닥은 얼얼하고 시큰거렸다. 

 

그 내려가는 뒷통수 뒤로 들리는 고함소리가 있었다.

 

"김태형!!!!!!!!!"

 

그 우뢰와 같은 목소리는, 무척 태형의 것과 닮아있었지만 훨씬 나이가 들은 듯 했다.
중년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뒤로한 채.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호석은 태형으로부터 멀어졌다.

 

 

 

 

 


 

 

 

 

 

동네를 느적느적 배회하던 두 사람의 말 뿐인 순찰은 어느새 국민학교의 운동장으로 들어서, 그 한구석의 계단식 난간에 엉덩이를 붙이는 것으로 결국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진작에 어둠이 내려앉은 학교의 운동장은 낮 동안 머금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즐거운 기억들을 갈무리 하고 있는 듯, 고요하고 또 아늑했다. 그 운동장 한구석의 뽀얀 가로등 빛이 두 사람이 앉은 난간과, 그 위로 엮인 지붕을 감싸듯 타고 올라간 등나무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고서 나랑 그 싸웠던 새끼는 정학 당했어. 열흘. 정말 다시 학교 가고 싶지 않았는데, 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졸업장이라도 받으려면 억지로라도 다시 가야겠더라고. 그랬는데 반장이 그러더라. 태형이 아버지가 학교에 왔었다고."

 

왜냐고 묻는 대신 정국은 누군가 버리고 간 분필로 난간 바닥에 아무렇게나 지익 직 선을 그었다. 호석의 이야기를 저가 끊고 싶지 않기도 하고, 또 어쩐지 불쑥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나는 듯도 했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는데, 동혁이 새끼한테 손찌검을 했대. 그리고, 태형이는 끌려가듯 전학을 갔고...... 그 아버지가 뭐랬다더라? 이딴 더러운 소문이나 나고 폭력 학생들이 있는 질 나쁜 학교에 자식을 둘 수 없다고 그랬다나? ...뭐, 말이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 이야기가 그 분 귀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마음이 답답했다.

 

그것으로 태형이라는 사람과는 끝이 난 것인지, 학교로 돌아간 뒤로 호석의 학교 생활은 괜찮았던 것인지, 학교에 안가고 집에 머물던 동안 호석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한 것들, 걱정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꾸욱 참았다. 

 

정국은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먼저 일어날 생각도 없는 듯, 봄날의 따스함과 등나무 꽃의 향기와 고요한 어둠 속에 포근히 싸여있듯 그렇게.

 

무릎에 팔을 괴고 옆으로 돌아본 호석의 옆얼굴은 선이 가늘고 예민했다. 머리 위로는 늦봄을 잔뜩 머금고 영글은 등나무 꽃이 주렁주렁. 그 하얀 꽃타래들은 마치 화려한 샹들리에 장식 같다. 그 꽃들 아래, 비쳐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나는 듯한 호석의 얼굴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어쩐지 설레임을 품고 있는 듯 느껴졌다면,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호석의 무릎 위에 얹혀져 있는 그 가늘고 고운 손, 그 중 가장 여려 보이는 새끼 손가락을 살짝 그러잡았다. 그러나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호석은 가만히 주먹을 쥐어 제 손가락을 정국의 손으로부터 빼내어 숨긴다.

 

"...사람들이 봐. 심지어 넌 경찰이잖아."

 

비어버린 손을 물러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넣으며 정국은 중얼거렸다.

 

"지금 사람들도 없는데... 그럼 뭐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는 괜찮은가보네."

 

한 마디를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는 저를 모난 눈으로 뾰로통하게 째려보던 호석은 이내 팩, 하고 고개를 모로 돌려버렸다. 저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그런데가 어딨다고, 라며 핀잔 주듯 중얼거리는 혼잣말도 잊지 않고. 물론 정국은 그런 곳을 안다. 

 

이른 봄날 아침의 정비소,
비오던 날의 그, 정비소,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
높다란 하늘 아래 불쑥 언덕 위로 솟아있는 제 옥탑방이 그 다음이었으면 좋겠다.

 

그곳은 진정 아무도 볼 사람 없을테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말을 삼킨다.
호석을 놀리고는 싶지만 궁지로 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오금이 저릿저릿, 발가락이 간질간질한 그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껏 몸을 늘려 기지개를 폈다. 쭉 뻗은 손가락 끝에 치렁한 등나무 꽃이 하늘하게 닿아오는 감촉이 생경하고도, 또 부드러웠다. 그것을 갖고 싶은 철없는 마음에 그 중 탐스러워보이는 꽃송이, 그 파란 줄기 윗동을 손가락으로 잡아 힘을 주니, 똑하고 가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꽃타래가 온전히 제 손으로 들어온다. 

 

"...넌 정말 나쁜 경찰 아저씨야."

 

저가 뭘하는지 궁금함에 올려다보다가 기어이 꽃을 따고야말자 저를 째려보며 탓하는 호석을 놀리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은 언제나 거스를 수가 없다, 마치 제 감정을 주체 못해 안달복달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기에,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두 눈을 마주 내려다보며 정국은 보란듯이 꽃송이로 제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그 입술이 닿았던 등나무 꽃으로 호석의 볼을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리니 무슨 영문인지 모를 표정으로 뚱하니 저를 올려다 보는 것이 귀여워서, 예뻐서, 저도 모르게 흐하핫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 꽃으로 마치 성호를 긋는 것 처럼, 봉긋한 뺨을 훑고, 모양 예쁜 이마를 훑고, 그 오똑한 코를 훑고. 그리고 마침내 얇고도 부드러운 입술을 훔친다.

 

"이 꽃이, 형한테 뽀뽀를 전해준거에요."

 

마주한 두 눈이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들은 듯 물음표를 한가득 담고 있다가, 이내 저가 했던 행동과 그 속 뜻을 파악했는지 요동을 치듯 흔들린다. 말갛던 얼굴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니 붉으락붉으락. 그러나 뭐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입술만 분하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달싹달싹. 꼭 머리 꼭대기에서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갈거야!!"
"같이 가요~."
"싫어!"

 

발딱 난간에서 일어서 씩씩대는 발걸음으로 어둑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가는 호석을 정국이 반걸음 뒤에서 쫓듯이 다리를 놀린다. 어지간히 분했는지 뒤도 한 번 안돌아보기에, 제 장난이 심했던가, 그것으로 인해 호석이 용기 내어 제게 말해 준 이야기 속의 아픈 상처를 함부로 건드려 버린 것은 아닐까 갑자기 더럭 겁이 나 정국은 우뚝 발걸음을 멈춰섰다. 진짜 화난걸까.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 받아줄까. 

 

그렇게 어물거리고 선 정국의 발소리가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앞서가던 호석이 팩하고 몸을 돌려선 빽 소리를 쳤다.

 

"바보야! 같이 가자며!!!"

 

그 말에 허겁지겁 달려가 호석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호석은 다시금 총총 발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정국의 발걸음에 맞춰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그래서 정국은 더더욱 발걸음을 늦춘다. 

 

네걸음...
다섯걸음......... 
여섯걸음................

 

 

 

 

 

 

내게 봄을 가져다 준 사람아, 그대는 겨울 어드메 쯤에 아직 머물러 서성이나요.

 

 

 

 

 

 

 


2020.01.27

...장장 넉 달 만에 탈고한 8편입니다. 내용이 무척 무겁고, 굉장히 복잡하게 엉켜버린 감정을 다루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편입니다. 그래도 이제야 겨우, 한 고비 넘겼다 싶습니다.

오랜만에 올리는 온전한 새글이다보니 기분이 무척 싱숭생숭하면서도 걱정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