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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3

by 1mpulse 2020. 6. 20.

by Impulse

 

 

 

 

 

기어이 태형은 휴학을 하겠다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와 생활비는 스스로가 벌겠다며, 태형은 일주일에 나흘은 노동판으로 일을 나갔고, 나머지 날들은 집에서 몸을 쉬거나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히려 둘이서 같이 보내는 시간도 늘고, 태형도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며 꽤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쳤었다. 더 이상 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일하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나 어떤 일을 하고 왔는가, 어떤 일이 더 벌이가 좋은가, 어떻게 해야 일의 요령이 느는가 등에 대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 때는, 자기도 확실히 아는 이야기라 맞장구도 칠 수 있고 정보도 줄 수 있어 오히려 전보다도 더 즐거웠었다. 

 

몇 달은 그랬었다.
처음 몇 달은.

 

 

 

 

일도 열심이고 그림도 열심인 것이 대견하니 선물을 사주겠다고 호석이 태형을 화방으로 끌고 갔을 때가, 아마도 무언가가 변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 시발점이 아니었던가 싶다. 

 

수입 화구들도 취급하는 커다란 화방에 발을 들였을 때. 풍겨오는 이질적인 물감 냄새, 종이 냄새, 그리고 나무 냄새 등이 반가웠던지 태형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호석을 보며 웃었다. 따라해 보라는 듯. 장단에 맞춰 호석 역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 폐 속 가득 차는 그 냄새는, 고등학교 때의 풋풋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법의 향수이자, 제 곁의 태형에게서 자주 맡아본 익숙한 체향이기도 했다. 그렇게 신이 한껏 난 태형은 손에 닿는 물감들이며 화구들을 한참이나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하였다. 그리웠다는 듯 그렇게 한참이나.

 

"태형아, 그 붓이 마음에 들어? 그거 살래? 형이 사줄게, 맘에 들면 사."
"에? 아뇨, 아뇨 이거... 아뇨."

 

붓 한 세트를 붙잡고 한참이나 이리저리 보고 털 끝을 만져보고 하길래 그렇게 물었더니, 불에라도 데인 듯이 쥐고 있던 것을 자리에 되돌려 놓는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호석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이라도 치듯 물감들 쪽으로 옮겨가더니만, 스윽 훑어보다가 다 떨어졌다던 색들을 하나 둘 골라내는데. 지금까지 쓰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메이커의 튜브들을 꺼내어 손에 쥐는 것이 눈에 띄였다. 호석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진열장 위에 붙어있는 가격표에 닿는다.

 

"...태형아, 괜찮으니까 너 원래 사던거 사. 너 아까 붓, 원래 사던 물감이랑, 또 뭐. 필요한거 그냥 사. 가격 생각하지 말고."
".............."
"......너는 돈 생각하지마."

 

결국 호석에게 등떠밀려 붓이며 물감, 오일, 연필, 캔버스 등등을 사서 양 손을 무겁게 하고 나오는 태형의 얼굴은, 자신의 양손 만큼이나 무거워보였다. 그리고 호석은 그 얼굴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저 역시 청소년기에 자주 지어보이던 그 표정이다. 선물을 고맙다고 말하는 태형의 말에는 저가 그로부터 장미를 선물 받을 때와 같은 마음이 담겨있었다. 돈 아깝다는, 그런 마음. 

 

그러고보니, 태형이 더 이상 장미를 사들고 오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구질구질한 기분에 얽매이기 싫어서, 태형의 그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호석은 더욱 신이 난 목소리로 태형을 이끌고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간만에 데이트니까 좀 웃으라는 호석의 말에도 태형은 고개만 얼핏 끄덕였을 뿐, 내내 생각이 많아 버거워보였다.

 

그 날,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태형은 사들고 온 화구들이 들어있는 봉지만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들을 봉지에서 꺼내들지도 않고 마냥 그렇게.

 

 

 

 

 

 


 

 

 

 

 

"태형아, 너 왜 요즘 그림 안그려?"
"......무슨 상관이에요."

 

함께 화방을 다녀온 그 날 이후, 태형은 일하는 날을 늘였다. 주말 하루 빼고는 매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어스른 밤공기를 헤치고 일을 나섰다. 저녁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에 쩔어 대강 씻고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말수는 줄었고 피로에 의한 짜증은 늘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언젠가부터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쑥 사라져버렸다. 방 한구석에 세워진 이젤과 그 위에 얹힌 캔버스 위에는 어느새 뽀얗게 먼지가 앉았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태형의 눈치를 한참이나 보다가 겨우 물은 그 질문에, 한껏 짜증 섞인 뾰족한 대답이 호석에게 돌아왔다. 

 

"너 조금만 더 벌면 재료비랑 학비 일 년치 다 모으잖아. 복학 준비 해야지. 이제 이렇게 힘들게 일 안해도 돼."
"..................아뇨."

 

태형이 잔뜩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제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호석은 어느 때부터인가 태형의 그러한 얼굴이 무서워졌다. 이 생활이 싫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떠나겠다고 언제 말을 꺼낼까 싶어 조마조마 해서. 

 

그러나, 태형의 입에서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 학교 안 돌아갈래요. 그림도... 그냥 안그릴래요."
".....무슨 소리야? 그림을 왜 안그려!"
"... 그냥 이제 그리기 싫어요. 그냥 돈이나 빨리 벌어서 형 빚 갚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나 가요. 언제까지 구질구질하게 이러고 살건데요. 허구헌날 먹는 라면도 이제 좀 그만하고요."

 

목이라도 졸린 듯 숨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원래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이 지긋지긋한 굴레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먼저 떠올릴 줄 알았던 태형은, 돈 앞에 무기력해지고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에 더 빨리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고 태형이 이 생활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무거운 추를 내리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임을 잘 알고 있기에, 호석은 더할나위 없이 비참해져버렸다. 언제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저를 버리고 떠나는 것을 그리도 두려워했는데,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하고보니 저는 그저 태형의 인생의 짐덩이로 전락해 버린 듯 했다.

 

"너가 뭔데 내 빚을 신경을 써!! 왜 그딴걸로 그림을 때려치는데!"
"그런거 아니거든요?! 그냥 이제 그리기 싫다구요! 그럼 형은 뭔데 나 그림 그리고 말고 가지고 그러는데요?!"
"너 지금 이런 꼴 보자고 지난 학기까지 내가 학비 내준 줄 알아?!"
"누가 학비 내달라고 했어요?!! 학교를 다니면 어쩔거고, 또 학교를 졸업하면 어쩔건데요!! 내가 졸업한다고 갑자기 막 유명한 작가라도 될 줄 알아요?! 그게 말이나 되냐구요! 그림을 그리려면 작업실도 빌려야 하고! 그럼 그림은 막 허공에다 그려요?! 재료들이 그냥 알아서 막 생겨요?! 전시회는 또 누가 어떻게 열어준대요?! 그거 열면 입소문이 미친듯이 나서 단번에 유명 작가가 되는 줄 알아요?! 그렇게 열면 그림이 막 날개 돋힌 듯 팔려요?! 팔리냐구요!!! 그럴 돈도! 시간도! 마음도! 이젠 없다구요!!!!"

 

태형의 쏘아대는 고함이 귀에 채 다 들어오기도 전에, 윗층 주인집에서 천장을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추렸다. 이미 한참이나 늦은 밤이고, 이대로 더 말싸움을 했다간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이성이 불쑥 되돌아온다. 동시에 불같이 치솟았던 감정은 찬물을 부은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지만, 그 대신 서늘한 패배감이 가슴을 애이듯 파고들었다.

 

결국 태형은 이 가난의 밑바닥으로 깊숙히 가라앉아버렸다.
저라는 추를 몸에 매달고.
먼 미래의 빛을 포기하고,
당장의 눈 앞의 가난에 쫓기게 되는 삶으로. 

 

호석의 절망감 따위 알 바가 아닌 듯, 한참을 저를 쏘아보던 태형은 그냥 그렇게 집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뛰쳐나간 태형을 붙잡을 기력도 용기도 없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호석은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태형은 이 야심한 밤에 저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어디로 간 것일까. 기어이 이 생활에, 그리고 저에게 학을 떼고 저 멀리 도망쳐간 것일까. 훨훨 날아 제 손이 닿을 수 없던 원래 그 곳으로 돌아간 것일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호석은 생각했다. 

 

문득 눈 앞으로 옷장이 붙어있는 벽 사이로 거뭇거뭇하게 곰팡이가 돋아난 것이 보였다. 

 

보이는 족족 청소하여 없앴는데, 저건 또 언제부터 저랬던 것일까. 어느새 또 제가 모르는 불쾌한 것들이 이 방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걸까. 이러다가 저도 모르는새 온 방이 곰팡이로 시커멓게 뒤덮히는 것은 아닐까.

 

들은 것도 별로 없는 장농을 옆으로 빼내어 공간을 만든 뒤, 소주를 꺼내와 걸레에 적셔 곰팡이가 슬은 벽을 문질렀다. 그나마도 알코올 도수가 낮은 소주로서는 한 번에 닦이지가 않아 힘을 들여 여러번 문질렀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문지르고. 최선을 다 해 노력을 했는데, 상태는 오히려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속이 상했다.
외로웠다.

 

 

벽을 닦고 남은 소주는 호석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속은 답답함에 타들어가고, 남겨진 소주를 달리 쓸 데도 없이 버리는 것은 돈이 아까워서. 

 

소주 한 모금에 벌겋게 열이 올라오기 시작하던 중, 벽에 걸어둔 드라이 플라워가 호석의 눈에 들어왔다. 검붉고 하얗고 분홍빛의 장미들. 그 예쁜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덩어리처럼 응축된 억울한 감정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 억울함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저 장미꽃들이 그 원인을 제공한 요소 중 하나임에는 틀림 없으리라. 

 

호석은 그것을 충동적으로 가져와 그 꽃잎 하나를 잡아뜯어 제 입에 넣었다. 아무런 맛도 없고 향도 날아가버린 꽃잎. 그러나 제 입 안에서 바스러지는 그 감각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한참을 오물오물 씹고 있다가, 퉤하고 쓰레기통에 뱉어버릴 땐 묘한 쾌감마저 느껴지기까지 했다. 

 

 

 

소주 한 모금에,
장미꽃 꽃잎 한 장. 

 

 

 

소주병에 담긴 액체와 장미 한 송이의 꽃잎이 다 없어졌을 땐, 그 꽃에 담겼던 그 때의 마음까지 삼킨 듯 태형이 미칠듯이 보고 싶어졌다.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것이 언제였던가. 둘이서만 좋았던 때가 그리웠다. 태형이 가난함을 모르던 때가 그리웠다. ...아니, 그냥 태형이 그리웠다.

 

호석은 비틀비틀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가 슬리퍼에 발을 걸었다. 태형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속이 상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다 필요없이, 모든 것이 미안했다. 저라는 존재 자체가 태형에게 죄스러웠다.

 

슬리퍼를 꿰차 신은 발이 동네의 이곳 저곳을 목적도 목표도 잃은 채 방황했다.

 

 

 

 

 

 

 

  

태형아,
어디갔어?
언제와?

 

 

 

 

 

 

 

 

툭툭, 툭툭,
누군가 자꾸 귀찮게 어깨를 잡아 흔들고 볼을 건드리는 통에 짜증이 나서 그 손을 뿌리쳐 치우고는 방해 받은 잠을 마저 청하기 위해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러면 그 손은 더욱 강하게 어깨를 잡아 흔들며,

 

"형! 호석이 형! 왜, 왜 여기서 이러고 자는 거에요...! 미치겠네, 정말!"

 

걱정과 울화가 섞인 목소리가 호석을 부른다. 익숙한 그 목소리에 졸음과 술기운에 감겨진 눈을 억지로 뜨면, 시선 한가득 어둠 속에 묻힌 태형의 잔뜩 찌푸린 얼굴이 한 눈에 가득 찬다. 화만 내고 뛰쳐나가던 야속한 목소리를 찾아 그렇게나 온 동네를 헤메었는데. 힘이 들어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마법처럼 제 앞에 태형이 짠 하고 나타난 것이 신기하여, 호석은 헤실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렇게나 많이 보고 싶었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웠던 몸을 일으켜 베고 있던 팔을 앞으로 펼쳐보였다.

 

"아 진짜, 술냄새...! 술 마시고 어쩌자고 이런데 나와서 잠을 자요...! 빨리 업혀요!"

 

안아주길 바라서 펼친 팔이 무색하게 낮고 둔탁한 목소리가 잔소리로 되돌아온다. 그것에 조금은 서운했지만, 저 때문에 속이 상하다기에 미안한 마음에라도 고분고분 그 등 위에 제 몸을 얹었다. 

 

내내 뛰어다녔는지 씨근덕 거리는 숨을 몰아 쉴 때마다 들리는 풀피리 소리 같은 새된 숨소리와 콜록이던 기침 소리. 그리고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땀에 젖은 등. 

 

그것이 태형이 얼마나 저를 찾아 온 동네를 뛰어다녔는지를 말해주고 있었기에, 호석은 그 축축한 목덜미에 제 뺨을 얹고 가만히 웃었다. 저같은 놈 따위에 빠져서 이 거지같은 밑바닥 삶으로 떨어져버린 태형이 안타까웠다. 제 인생에 짐만 되는 놈이 뭐가 이쁘다고 사서 고생을 하며 찾으러 다니는지 한심하고 측은했다. 저만 없었더라면 이따위 궁핍한 생활은 일생 겪어볼 일도 없었을 태형이 애잔하고 불쌍했다.

 

 

 

 

"우리 태형이...."
".........."
"형이 많이 미안해..."

 

 

 

 

그렇게 못된 술버릇이 생겨났다.

 

 

 

 

 

 

 


2020.04.30.

뷔홉 이야기는 매번 너무 어려워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12, 13편은 도중에 한 번 갈아엎으면서 한 달이나 걸렸네요.

 

저는 여러분들이 이 편에 대해서 잘 납득이 가셨을지가 궁금합니다... 저는 가난함으로 인해 꿈을 꿀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경제적인 배경이 그 꿈의 뒷받침을 많이 도와준다고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꿈을 이루려 하고, 그렇기에 그 시도와 노력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인생이라 상찬하고 싶습니다. 또한 가난한 것은 절대 불행한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행복을 찾고 자신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앞으로 나올 이야기에서 호석이의 선택이 어떠하던, 태형이의 선택이 어떠하던, 이 둘의 결말이 어떻게 나던, 그것에는 타인의 경제적으로 여유치 못한 삶을 비하하거나 매도하려는 의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며, 마음의 시작과 끝을 풀어가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