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언제부터였을까.
이 끝을 알 수 없는 악순환의 연속은.
거의 매일이 전쟁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호석은 잔소리를 하고 들었고, 태형은 지지 않고 고함을 치며 반박을 했다.
"형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는 좋아해 줄 수 없다는 거네요? 예, 잘 알겠어요."
그 오해 섞인 못된 말을 매번 방패처럼 들이밀며 저를 궁지로 몰아넣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매달리는 저를 보며 내심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저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며 어디론가 나가 버리고. 그런 저와 태형의 엇나간 말과 행동은 모두 자신의 말과,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가난의 탓임을 알기에 미안해하고.
어떤 때는 새벽녘에 몰래 들어와 서늘한 부엌 구석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콜록대며 잠이 든 태형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 모습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또 다시 싸우고. 그렇게 또 집을 나가고.
어떤 때는 아예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혼자 남은 호석은 불안함을 쪼개어 삭히며 버티고. 그렇게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취하도록 마시고. 그렇게 잔뜩 취하면 밤동네를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집착증 환자가 되어 저만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태형을 찾아 배회하다가.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져 잠이 들고.
때론 깨워주는 이가 없어 차가운 새벽이슬에 잠이 깨어 딱딱하게 굳은 다리를 질질 끌며 아무도 없는 컴컴한 집으로 홀로 들어가기도 하고. 운이 좋은 날이면 제가 집에 없는 것을 깨달은 태형이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저를 찾기도 하고. 그렇게 저를 찾아내면 축 늘어진 몸뚱이를 업어들고 밭은기침을 뱉으며 집으로 향한다. 그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으로. 그 계단 아래, 가난의 무덤 같은 방으로.
매번 같은 상처를 서로에게 입히면서.
문득,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호랑이들이 아이를 쫓는 도중 서로 싸우느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찌는듯한 태양 빛 아래서 너무 빠르게 돌던 나머지 결국 녹아버려 버터가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어릴 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코웃음을 쳤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저와 태형이 딱 그 꼴이라며 호석은 자조하며 웃었다.
콜록, 콜록... 콜록...
저를 업고 걸어가느라 발걸음마다 몸뚱이가 흔들릴 때면, 가슴 속에 묵혀둔 저를 향한 원망과 사랑을 덜컥이며 뱉어내는 그 기침 소리.
"......태형아, ......감기 걸렸어?"
"아니요. 형 찾아 다니느라 힘들어서 그런거 잖아요. 그러게 매번 왜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아이, 됐어요."
걱정을 담은 물음에 매번 핀잔이 섞인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 아파서, 호석은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는 태형에게 묻는다. 진짜 그림 안그릴거야? 지긋지긋하게 물었던 말이기에, 돌아올 답 역시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네, 안그릴거에요. 질리고 싫증 났어요. 이젠 싫어요.
그리고 그 말이 거짓임을 호석은 안다.
자신이 잠 든 사이, 불 꺼진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예전 저에게 선물했던 자신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태형의 옆모습을 안다. 그림 따위 이제 질려서 그리고 싶지도 않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저 몰래 신문이던 종이 쪼가리에던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그것들을 저에게 들킬세라 잘게 찢어서 버려버리는 것도 안다. 산책을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나가서는, 옆 동네의 작은 화방 앞을 괜히 오가며 기웃거리거나 그 안에 전시된 그림들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는 것 역시, 잘 안다.
그렇게나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런 머리 아픈 돈 걱정 따위 저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될 텐데. 그러나 호석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태형의 마음 역시 이해한다. 저로 인해 상대방의 인생이 희생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꼭, 저가 태형을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저가 태형을 놓지 못하는 걸까.
태형이 저를 놓지 못하는 걸까.
이대로 가다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면 사이좋게 녹아버려 버터가 될까.
호석은 태형의 목에 두른 팔에 가만히 힘을 주어 감싸 안았다.
"...태형아, 그냥... 너 맘대로 해... 앞으로 아무 말 안 할게."
또 그렇게 먼저 두 손을 들고야 마는 것은 자신이라고, 호석은 짜내는 듯한 말을 태형의 귓가에 속삭이며 생각한다. 사랑을 이유로 부족한 저의 삶으로 굴러들어오겠다고 하던 그 찌는 듯한 여름밤도, 그리고 그 가난한 삶에 완전히 매몰된 채 스스로의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곁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하는 지금도. 결국 태형의 고집에 항복하고야 마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다.
져주는 것이 사랑이라는데.
자신이 태형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매번 그가 원하는대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져준다는 위선의 뒷편으로, 태형의 인생을 희생시켜가며까지 제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집착을 스스로 부리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마음속에는 어느샌가 그에 대한 부채만이 벽처럼 높이 쌓여버렸다. 마치 제 아버지가 어머니와 저에게 남겨두고 떠나간 그 빚처럼. 태형의 마음과 꿈을 담보로 삼은.
콜록... 콜록... 콜록...
제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닌지, 대답 대신 이제는 버릇처럼 되어버린 그 기침 소리가 쓰리고 어두운 골목에 들러붙는다. 미안한 마음에 숙여진 그 뒤통수에 제 뺨을 부볐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술에 취해 잠에 빠진 호석의 몸은 알코올과 더위로 인해 뜨거웠고, 그를 업은 정국의 등 역시 땀이 비 오듯 흘러 눅눅하게 젖어버렸다.
허잇짜, 땀으로 흘러내리는 호석의 몸을 추슬러 올리자, 힝 하는 콧소리를 내며 제 목에 두른 팔이 매달리듯 바싹 힘을 주는 것이 귀엽고 웃겨서 정국은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깨어있었다면 웃지 말라며 한 소리 들을 판인데, 조용한 것을 보니 어지간히 취하긴 취했나보다 싶어 정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작 소주 반병도 안되는 주량이라니.
초봄이었던 그 밤, 가로등 아래 쓰러져 있던 호석을 주워 파출소로 업고 갈 때는 이렇게 덥지도 습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쌀쌀해서 호석의 체온이 더욱 기분 좋게 느껴졌었던 듯도 했다. 집에 데려다준다고 이 길을 함께 걸어 올라갈 땐 어땠던가. 흥얼거리던 저를 보고 노래가 예쁘다던 그 수줍은 목소리를 기억한다. 제가 부른 노래가 아로새겨진 그 골목들을 기억한다. 그때 제게 처음으로 미소 지었던 그 눈웃음이 예뻐서, 컴컴한 집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아쉬워서, 한참을 저도 모를 기분으로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던 그 밤을 기억한다.
그 밤,
마치 마법이 별가루처럼 뿌려졌던 것 같던 그 밤.
그러나 당신은 고작 소주 몇 잔에 그리도 취해, 간절한 누군가를 찾아 어둠 속을 헤메고 다니며 외로워했을 그 밤. 그리고 당신에게서 나던 은은한 장미 향기는, 그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했다는 증거.
정국의 고개가 땅바닥으로 떨궈진다.
반지하 계단에 호석을 앉히고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으려다 문득,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곤히 잠든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으로 깜깜히 먹혀버린 중에도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한 줄기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 옆얼굴이 달맞이꽃처럼 말갛게 빛나 보였다.
"형,"
아무렇게나 떨궈져 있는 두 손을 주워들어 가만히 무릎 위로 맞잡으면, 제 손 가득 차오르는 따듯한 온기. 술이 올라 유달리 쿵쾅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손 끝을 타고 호석에게 전해질까 싶어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들여다보지만, 술과 잠의 마법에 빠진 두 눈은 뜨여질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아쉬움을 담은 정국의 두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간다.
"...형은 나한테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거에요...?"
언젠가 호석은 저에게 왜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냐고 답답한듯 담담한듯 그렇게 물었을 때. 그때의 저는 호석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아서, 라고 답했었다. 그렇다면 호석도,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아서 이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럴지도 모르겠거니 마냥 희망적으로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그러나 자신의 행동들이 우연히도 호석의 기억 속에 숨겨두었던 태형이라는 존재와 겹치고 있었다는 것들을 인식하고부터는, 이미 시간에 떠내려간 허상에 질투하고 혼자서 호승심을 부리며 그 이야기의 끝을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미 끝난 인연이라면 저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감을 방패 삼아 제 마음을 보호하고, 이제는 제법 가까워졌기에 더더욱 저에게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굳건히 믿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어둠으로 검게 잠긴 계단은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 같았기에, 정국은 가만히 제 손안에 그러잡은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힘들게 맺힌 장미가 한창일 때는 그리도 질투가 나다가, 서서히 시들어가는 때에는 어째서 이리도 불안한 마음만 커져가는지. 제멋대로 피었다가 흩뿌려지고 처절하게 추락하는 꽃잎.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호석이 저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정국은 오늘에서야 겨우 깨달았다.
우연이지만 어딘가 태형의 언동을 연상시키는 저라는 사람은, 그와의 좋은 기억들 뿐 아니라 외롭고 아프고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조차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이기에. 아마도 마음을 에일 정도로 괴로웠을 그 끝마저도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기에. 그 살구꽃이 만발했던 봄날, 저의 마음에 시리도록 내뱉어진 그 말의 의미를 정국은 이제야 살풋 알 듯도 하였다.
저라는 사람을 통해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우연히 맞닥뜨릴 때 마다, 호석은 벌을 받는 기분이었을까? 그렇게나 고통스러웠을까? 많이 아팠을까?
정국은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입 안이 썼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이 이야기는, 자신의 짝사랑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일지도 모른다. 호석의 상냥함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에서 호석은, 이제 사정을 다 알았으면 더 이상 자신의 아픈 상처 건드리지 말고 그만 제 마음을 접어달라 부탁할지도 모른다. 괴로웠던 추억들을 자꾸 되돌아보게 만드는 저가 밉고도 안쓰러우니, 그냥 시작조차 하지 말자고 할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끝이 나면, 다시 원점으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저에게 부탁할지도 모른다.
정국은 스스로의 마음을 접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호석이 힘들고 아프다면, 어쩌면 그것을 천천히 배워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자신은, 죄다 모르는 것투성이다.
"형,"
언젠가 접어야 할 마음이라면, 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제 마음 가는 대로 굴어도 되는 것일까.
"키스해도 되요?"
여전히 벽에 기대어 눈을 감은 호석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쭈그리고 앉았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 올려다보이던 잠든 얼굴이 이제는 제 얼굴 밑으로 내려다 보이고,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나던 얼굴은 제 얼굴 그림자에 가리워진다. 마치 개기일식처럼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드리워진 그림자 만큼 그렇게.
호석의 얼굴께로 점점 수그러지는 상체를 버티기 위해 한 손은 콘크리트 벽을 짚었다.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술에 취한 이 여름밤의 현실감을 더했다. 비어있는 맞은편 손을 들어 그 손가락 등으로 잠에 빠진 말갛고 동그란 뺨을 쓰다듬으면, 전해져오는 그 포슬하면서도 따스한 체온에 심장이 고장이라도 날 듯 튀어 오르고 요동을 친다.
뺨을 따라 귓바퀴로,
귓바퀴에서 턱선으로.
다다른 손가락이 턱 끝을 잡아 살며시 끌어당겨 올리면, 알코올 섞인 호흡이 지근거리에서 뒤섞이여 결국 서로의 숨결을 공유하는 무르익은 때에.
가만히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개어 얹었다.
온 몸의 신경이 맞닿은 온기에 쏠려, 계속해서 그 부드러움에 감겨있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내었을 때, 지금까지 감겨있던 까만 눈동자가 제 앞에서 천천히 깜박이고 있었다. 설마 깰 줄은 몰랐던지라 당황스러움에 주욱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등줄기와,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를 제멋대로 떠올리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머리 속과, 이다음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함과 긴장감으로 꿀꺽 침이 넘어가는 목울대.
그런 정국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까만 두 눈은 물러나지도 않고 잘도 그렇게 한참을 마주쳐왔다. 그 고요히 잠긴 눈 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는, 저를 밖으로 밀어내려는 것일까, 아니면 저를 더욱 깊은 곳으로 이끌려는 것일까.
"............잘자, 경찰아저씨."
그 영겁 같은 순간 끝에, 정국의 입술 위로 호석의 호흡 섞인 인사가 스쳐 지나갔다. 올려다보며 마주하고 있던 시선은 수그러지고, 무릎 위에 얹혀져 있던 두 손은 지그시 정국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 그 손길에 밀려 가만히 뒤로 물러선 정국의 몸을 지나친 그 가느다란 몸은, 예의 그 싸구려 알루미늄 문을 열쇠로 열고 어둠 속으로 그림자처럼 먹히듯 조용히 사라졌다.
호석이 그렇게 떠나간 자리에, 정국은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 앉았다. 오늘 밤 정국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 문을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진 호석이, 저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못 이기고 술김에 다시 밖으로 나올까 봐. 또 그렇게 헤매고 다닐까 봐. 또 그렇게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까 봐.
정국은 그렇지 않길 바라며 그 앞을 지켜야만 했다. 저를 알고부터는 그런 고약한 술버릇 따위 진작에 없어졌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얇은 문을 사이에 둔 채
마음을 깎아내는 아픈 밤이 지나가고
푸른 새벽이 온다.
2020.04.30. &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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