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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뷔홉, 국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1

by 1mpulse 2020. 5. 23.

by Impulse

 

 

 

 

 

땅에 반쯤 묻혀있는 그 단칸방에서, 태형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뜨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 작업장으로 나가기 위해 일으키는 몸을 커다란 손에 붙잡혀 품에 갖혀선, 뺨과 목덜미에 부비적대고 들어오는 입술을 키득거리며 받아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자라고 하는데도 굳이 신발장까지 배웅을 나와 채 뜨지 못한 눈을 하고 손을 흔드는 태형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아침 공기를 맞이하며 집을 나서는 것 역시, 익숙해지는데에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면에 겨우 솟아 있는 창문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시간엔 늘 커텐이 드리워져 있었다. 덕분에 대체적으로 어둑했던 그 방 안은 늘 찬기와 습기로 눅눅해지기 일쑤라, 호석은 벽지에 거뭇한 곰팡이가 피는 것이 늘 걱정이고 스트레스였었다. 

 

그 반지하의 단칸방은 그렇게 얼룩덜룩 검고 우울한 무채색을 띄고 있는 주제에, 저와 태형의 매일은 온통 핑크빛으로 가득했다. 

 

가만히 손만 맞대고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태형은 호석과 함께 살게 되면서 집으로부터의 원조가 끊기게 되었다. 호석은 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철저히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때 그의 집 앞에서 도망치며 자신의 뒤로 들리던 중년 남성의 고압적인 목소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가 강제로 전학을 가게 되었던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태형은 대학을 다니며 간간히 벽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일은 태형의 학비나 재료비를 충당하기엔 꽤나 불안정한 수입원이었던데다, 호석에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빚도 남아 있었기에, 생활비는 거의 남지 않거나 적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것을 메꾸기 위해 호석은 정비소 일 외에도 자주 휴일을 쪼개어 막역일을 나갔다.

 

하루를 종일 공사판에 꼴아박아 흙가루와 시멘트가루를 뒤집어 쓴 만신창이가 되어 이른 저녁 돌아오면, 수고했다며 피로하고 긴장한 근육을 주물러주는 태형의 손길에 제 온 몸을 맡기는 것을 좋아했다. 뭉치고 굳어있는 근육을 귀신같이 잘도 알아서 섬세한 손끝으로 노곤노곤하게 풀어주는 것이 신기했기에, 벽화보다 마사지사를 하는게 벌어도 더 벌겠다고 별 생각 없는 농담을 툭 던지곤 했는데.

 

처음에는 묵묵히 말이 없거나, 피식 웃음으로 흘려넘기던 태형이 언젠가 한 번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림으로 먹고 살아야지 자존심도 없냐며, 게다가 자기가 형 말고 다른 사람 몸을 이렇게 만져도 좋겠냐고 왈칵 성을 낸 이후로 호석은 더 이상 그런 속 없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멋도 모르는 저 자신이 태형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것 같아 미안해서.

 

 

 


 

 

 

 

잠자리에 몸을 포개고 누워서는 태형에게 대학교 이야기를 해달라고 곧잘 졸라대곤 했다. 제가 겪어보지 못한 캠퍼스 라이프에 대한 동경심도 있었고, 저가 모르는 세상에서의 태형이 궁금하기도, 아울러 자신의 무지함으로 인해 태형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풀어내는 그 이야기들은, 특히 어려운 전문 용어와 요상한 외국인들의 이름이 잔뜩 섞인 미술 전공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때면, 저의 형편 없는 그림 실력까지 더해져 별세계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신기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때론 뭐가 뭔지 잘 모를 때도 있었지만,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태형이 대견하고 예뻐서 몰라도 아는 척 응응, 그렇게 대답을 하기도 하였다.

 

이야기 속의 학교에는 다양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태형에게 친절했고, 태형은 그런 그들과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운 듯 했다. 교수들 중에는 태형이 특별히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도 있었다. 그 교수의 수업이나 작품을 이야기 하노라면, 까물락 까물락 잠이 들려는 호석을 흔들어 깨워서라도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어할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열망에 부풀어 있었다. 언젠간 그 교수의 작품처럼, 제가 그리는 그림도 많은 이들이 찾아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고, 한껏 빛나는 소망을 담아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신이 나서 환하게 웃는 태형이, 호석은 좋았다.

 

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한 태형은 자신감이 넘쳤고, 열정에 가득 차 빛이 나 보였다. 그렇기에 호석은 그 빛이 계속해서 태형에게 머물기를 소망했다. 태형이 행복한 것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 신봉했다. 꿈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제 옆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사랑했다. 태형이 원하는 꿈을 다 이루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그것을 잃게하고 싶지 않았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로맨틱한 것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태형이 유별난 것이었을까. 때때로 태형은 짜잔-, 하는 소리와 함께 일에 지쳐 돌아온 호석의 눈 앞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이밀며 뿌듯한 웃음을 흘리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역 앞에서 팔고 있었더라며, 이 꽃이 꼭 형 같아서 사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 한아름 장미꽃 다발 중에 가장 형을 닮은 아이 하나를 데려왔다며, 그렇게 커다란 두 눈에 칭찬과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을 한껏 담고 호석을 바라보면서. 

 

호석은 그 장미꽃 향기를 사랑했다. 장미꽃을 내미는 태형의 수줍음 담긴 얼굴이 좋았다. 오가는 길마다 저를 떠올린다는 그의 빨갛고 하얀 핑크빛 애정이 애틋했다. 그래서 그 꽃에 코를 들이대고 한껏 숨을 들이키며, 불쑥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그 향기와 함께 꿀꺽 삼킨다.

 

-이런거 자꾸 사오지 마, 돈 아깝잖아.

 

식사는 라면으로 떼우기 일쑤이면서, 그 한 번의 로맨틱함을 위해 쓸모를 다할 그 장미가 마냥 아까워, 호석은 정성을 다 해 그 꽃들을 예쁘게 말렸다. 그 드라이 플라워를 모아서 벽에 장식처럼 걸어두며, 그것으로 그 꽃들이 낭비가 아니었음을 확신하고, 그 사실에 위안을 받고, 스스로의 옹색함을 용서했다.

 

그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봄, 또 다시 봄.

 

장미가 다시 필 무렵 즈음, 태형이 집으로 신문지로 꽁꽁 싸맨 캔버스 하나를 들고왔다. 호석에게 보지 말라고 등을 돌리게 시키곤 그 싸매었던 신문지들을 신이 나서 북북 찢어내는 손길이 다급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귀에 들려온, 짜잔- 하는 소리. 제게 장미꽃을 줄 때와 같은 신호이다. 

 

감았던 눈을 뜨고 뒤를 돌았을 때 시야를 한가득 메운 그 캔버스에는, 밝은 계열의 유화 물감들이 어떠한 알 수 없는 형태를 띄고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고, 추상화는 더욱 알지 못해서 난감함에 눈을 깜박이고 있는 호석에게 태형이 물었다.

 

"어떻게 보여요?"
"...음... 예뻐...?"
"그리고요? 느낌이 어떤 느낌이에요?"
"그리고...? 어... 예쁘고... 밝고, 따뜻하고... 음... 이거 꽃이야? 꽃인가? ...아, 아니, 아닌가...? 아이, 모르겠다 야. 그냥, 기분 좋은 그림인거 같아."

 

눈과 입을 한껏 크게 열고 그 말을 듣던 태형은 종내엔 함박 신이 나서 와아, 크게 함성을 질렀다. 그 한껏 기쁨을 담은 웃음에 이끌리듯, 호석 역시 쑥쓰러운 웃음을 띄웠다.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한 것들 뿐이었지만, 태형이 기뻐하면 저 역시 기뻤다.

 

"이거, 형이에요."
"...이게? 이게 왜 나야?"
"형이 느낀 그대로에요. 예쁘고, 밝고, 따뜻하고, 꽃 같고, 기분 좋은 느낌. 나도 형을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요. 그렇게 형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형이에요!"

 

건네어주는 캔버스를 받아들고 두 번 세 번 들여다보아도, 그것이 어째서 자신이라는 것인지는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무언가 부드럽게 눈길을 끌고 안정된 기분이 들게 하는 감성이 분명 그 그림 안에 존재했다. 예술이란, 애초에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성을 느끼는 것부터가 시작이라 했던가. 그 알 수 없는 형태의 물감들이 태형이 보고 있는 저를 형상하고 있다는 것에 어쩐지 명치 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 유화 물감의 냄새에는, 고등학교 때 미술실에서 품었던 첫사랑의 향수가 배어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때의 그 설레임도.

 

 

 

 

태형은 특별했다.
처음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그 때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두 팔을 크게 벌려 감싸안는 그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맞댄다. 부비고 들어오는 머리카락에 자신의 뺨을 얹었다.

 

설레임으로 뛰고 있는 이 고동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길. 

 

뜨겁게 달아오른 이 체온이 언제까지고 함께 하기를.

 

 

 

 

 

 

 

 

둘 만의 에덴 동산 속에서, 그렇게 서로에게 빈 공간 없이 꽉 찬 매일에 중독이 되어갔다.

 

 

 

 

 

 

 

 


 

 

 

 

 

 

 

 

"...오늘은 어떤 노래 불러줄까요? 뭐 듣고 싶어요?"

 

정국은 귀와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고 무릎에 얹어놓은 기타를 고쳐 잡았다. 전화기 너머의 호석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조용했다. 이제까지는 이야기를 마치고나면 머쓱함을 억지로 지우려는 듯 이 노래 좋더라, 저 노래 아느냐며 이런 저런 말로 얼버무렸던 사람이, 오늘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침묵만을 베어물고있다. 

 

"여보세요? 끊겼나? 정호석씨 들리세요? 들리시면 대답을 하세요~!"

 

다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대답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감추고자, 정국은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너는 나한테서 이 이야길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궁금하지 않아? 싫지도 않아? 넌 왜 이걸 맨날 그냥 듣고만 있어?"

 

한참의 침묵 끝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그렇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쉽사리 말을 뱉지 못하는 입술이 삐죽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물거리는 그 정적이 어색하여 괜한 기타줄을 팅팅 튕겨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에 삐죽빼죽 가시가 돋아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얼굴도 모를 그 사람이 부러웠고, 미웠고, 질투가 나서. 어떤 날은 근무 중, 종이에 '김', '태', '형' 세 글자 적어두고 한껏 표독스럽게 노려보다가, 볼펜으로 콕콕콕 얄밉게 쪼아대다가, 마침내 북북박박 찢어버린 적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오늘 들은 이야기로 인해, 이 늦은 밤 당장 정비소로 뛰쳐내려가 자전거 벽에 걸린 그 유화를 몰수해다가 어딘가 호석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꽁꽁 숨겨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지금 호석의 곁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도 시샘을 한껏 머금은 마음은, 찬바람이 매섭게 치고간 새파란 잎새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정국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시절의 호석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 이야기 속에는 자신이 모르는 호석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 과거의, 다른 시간 속의 호석이 언젠가는 자신을 지금의 호석에게로 이끌어 줄 것임을 그저 믿으며, 이 길고도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정국은 가만히 기다린다.

 

"난 그냥 형의 이야기가 좋아요. ...그것이 무엇이든."
"....왜?"
"...계절이 지나고 봄이 오는데 이유가 어딨겠어요. 그냥 좋은데... 좋은데 뭐 어떡하라고."

 

그 말에 또 다시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그 너머의 호석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까. 뾰루퉁해서 돼지 꼬리 같은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 감고 있을까. 다만 저의 바람이라면, 그냥 제 말에 베시시 웃어줬으면 좋겠다.

 

"......진짜 바보다, 넌."
"뭐 맨날 바보래.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게 뭐가 바보예요. 형도 내가 노래 불러주는거 좋아하니까 나랑 이렇게 통화하는거 아녜요? 그럼 피차일반이지!"

 

따따부따 쏘아부치는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기는 웃어도 아니라고는 안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로 저가 노래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긴 하는가보다 싶어 피시식 쑥쓰러운 웃음이 밀려올라온다. 위안 삼아 혼자서 그럭저럭 즐기던 취미 생활이 이렇게나 뿌듯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한껏 마음이 동해서, 기타 현을 좡좡좡좡 치고, 몸통을 퉁퉁퉁 두들겨서 수화기 너머의 호석의 집중을 유도했다. 

 

"오늘은, 그냥 내가 부르고 싶은거 부를래요. 형, 뭐, 무슨 노래 듣고 싶냐고 물어봤는데 엉뚱한 대답이나 하니까, 나 그냥 부르고 싶은거 부를래."
"그래, 나 아무거나 다 좋아. 경찰 아저씨 노래 끝내주게 잘 부르지~."

 

그 띄워주는 말에 어깨가 한껏 으쓱해진다. 

 

 

 

기타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이 밤을 연주한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온전한 제 마음을 담아 이 어둠 속을 헤치고, 저 너머 반지하 단칸방을 찾아갈 것이다. 별빛으로 치장을 하고, 달빛의 안내를 받은 저의 노랫소리는 그 어둑하고 외로운 방 안에 있는 님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아무쪼록 그 속에 담긴 제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 닿기를. 

 

오늘도 정국은 간절히 소망한다.

 

 

 

 

 

 

 

 


    

 

-2020.04.03

이 글을 구상하고 쓸 때까지만해도 정국이는 유재하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부르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정국아 커버 소취.... ㅠㅠ ) 그런데 제 댓글에 어느 귀하신 분께서 이정열님의 '그대 고운 내 사랑'을 추천해주셨어요. 이 곡은 제가 쓰고 있는 시대보다는 더 뒤에 발표된 곡이라서 안타깝게도 지금 이 이야기 속의 정국이가 부르는 것이라고 묘사할 순 없지만, 곡이 너무 예쁘고 정국이의 마음과도 참 닮은 곡인데다, 오히려 처음 구상했던 곡보다도 훨씬 잘 어울려서 여기 이렇게 두 곡을 함께 첨부합니다. 찰떡같은 곡 추천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