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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완결]

[국홉, 뷔홉]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12

by 1mpulse 2020. 6. 16.

by Impulse

 

 

 

 

 

최근 사흘간 호석은 대체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주부터 시작된 하수도 공사가 하필이면 정비소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이잉 위잉 포크레인 소리와 쿵쿵 쾅쾅 무언가 두들겨 부수는 소리, 드드득 다다닥 드릴로 바닥을 파내는 소리가 아침 출근해서부터 저녁 퇴근할 때까지 계속되다 보니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라고, 입 끝을 축 늘어뜨린 호석이 그렇게 투덜거린다. 

 

호석의 기분이 엉망인 것과는 별개로, 정국은 대체적으로 기분이 몹시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음과 땅에서부터 울려오는 진동을 참다못한 호석이 하루가 멀다하고 파출소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다. 정비소 철문까지 닫아걸고는, 무슨 일이 있으면 파출소로 찾아오라는 쪽지까지 붙여놓는 철저함까지. 빈손으로 오기에는 미안했는지 꼭 군것질거리까지 사 들고 온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데도.

 

그러한 호석의 행동에서, 정국은 저를 향해 높게 쌓여있던 그의 마음의 벽이 상당 부분 허물어져 있음을 읽는다. 그리고, 봄이라 부르기엔 아직 쌀쌀했던 그때의 호석을 떠올리며 가슴 한가득 뿌듯함을 채워 넣는다.

 

"공사하는 아저씨가 원래 어제로 끝날 일이라고 했다고! 근데 오늘도 또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 어우씨, 진짜 장마도 온다는데 대체 언제 끝내려고 이러는데!!"

 

어지간히 짜증이 났던지 정국에게 늘어놓는 푸념에는 가시가 잔뜩 돋혀 한껏 목청이 커져있었다. 목소리는 그렇게 잔뜩 심통이 났는데, 파출소 벽돌 화단 위에 걸터앉아 입에 물린 분홍색 쭈쭈바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듯 질겅질겅 씹어대며 발을 달랑달랑 흔들어 대는 모습은 또 나이에 답지 않게 아이같아서. 그 말투와 행동 간의 괴리감에 정국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흘렸다. 

 

숙인 시선 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반팔 소매로 길게 빠져나온 호석의 곧은 팔과, 다리가 진자 운동을 할 때마다 바지 끝단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는 가느다란 발목. 그것들이 유혹을 하듯 자꾸 눈길을 잡아 끌었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들고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여름이니까. 등줄기를 타고 발갛게 오르는 열기를 그렇게 애써 무시한다.

 

그렇다.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다.

 

공기 중에는 습기와 열기가 후덥지근하게 차오르고, 파출소 화단에 심어진 수국이 푸른 꽃들을 동그랗게 만개하기 시작했다. 호석이 일하는 정비소 마당의 살구나무에는 꽃이 피었던 그 자리에 열매들이 동글동글 맺혀 있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매실처럼 파란빛을 띄고 땡글땡글 했던 그것들이, 이제는 제법 자라 노란빛에 서서히 물들어 가며 그 달큰한 향을 뿌려대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포옥 익어, 침이 고일 정도로 시큼하면서도 혀가 녹을 정도로 달콤한 노오랗고 탐스러운 열매로 무르익을 날을 정국은 기다린다.

 

여름 더위를 식혀줄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아웅다웅, 시답잖은 농담들을 나누며 노닥거렸다. 파출소 앞으로 오가는 동네 사람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너무 더워지면 안으로 들어가 차가운 보리차를 마시기도 했으며,

 

"아저씨! 자전거 고쳐주세요."

 

...이렇게 파출소로 직접 찾아오는 정비소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어어? 너 얼마 전에도 내가 고쳐줬잖아. 근데 왜 또 고장 났어?"
"그때는 바퀴가 이상해서 그랬구요! 오늘은 자전거가 잘 안멈춰요! 우리 오빠가 타서 그래요! 맨날 그래요! 그러구서 나보고 맨날 뭐라고 그러고!"
"너희 오빠는 대체 자전거를 어떻게 타길래 여기저기 자꾸 망가지냐? 어디 한 번 보자"

 

여자아이의 자전거를 보기 위해 화단에서 훌쩍 뛰어내려 브레이크 페달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으응, 브레이크 와이어 고정대가 많이 닳았네. 이거 계속 타다가 큰일 나기 전에 얼른 고치는 게 낫겠다."

 

호석이 자전거를 붙잡고 일어서며 뒤에 앉은 저의 눈치를 흘낏 본다. 왜일까. 그 시끄러운 소리가 난무하는 정비소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아니면 그 봄날, 개나리 밑에서 마주한 저의 처참했던 자전거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그 봄날의 자전거.

 

문득 정국은 잊고 있었던 그 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저 혼자 제멋대로 만들어버린 그 약속을.

 

 

 

 

"형!"

 

자전거를 끌고 정비소를 향하는 그 동그란 뒤통수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득이 돌린 얼굴은,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화사하게 빛이 난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이따 저녁에 한잔할래요? 제가 밥 살게요!"

 

그 느닷없는 제안에 잠시 엉뚱한 말을 들은 듯 멍하니 정국을 바라보던 호석이, 마침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분명, 그 역시 제가 생각한 그 날, 그때, 그 순간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기에, 정국 역시 크게 입을 열고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 둘 사이에서, 어서 제 자전거나 고쳐줬으면 좋겠는 꼬마만이 영문을 모르고 뿌루퉁 할 뿐이다.

 

"아저씨, 저 경찰 아저씨랑 친해요?"
"응?"

 

둘이서만 텔레파시라도 나누는 듯 말은 않고 웃고만 있는 것이 꽤나 이상해 보였는지 여자아이는 그렇게 물어왔다. 그 당돌하고도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것은 호석, 그리고 순간 바짝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정국이다. 저 질문에 대한 호석의 대답은, 둘 사이의 지난 시간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다.

 

아니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 그래도 그렇게 뻔질나게 통화도 하고 같이 이야기도 나눴으면 양심적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라고 해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긴장감, 설레임, 두려움이 제멋대로 뒤엉킨 감정을 삭히기 위해, 정국은 쓰고 있던 경찰모를 벗어 부채질하며 제가 서 있는 파출소 계단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이런 사소한 것에 의미를 멋대로 부여하고 아등바등 속을 끓이는 저 자신이 이쯤 되면 조금 불쌍해지기도 한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란 어쩜 이렇게나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란 말인가. 

 

 

"...어, 제일 친해."

 

 

그 말이 제 고막을 지나 머리로 전해지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온 몸에 퍼져나갔다. 정국은 손에 든 경찰모로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으하핫 하고 터져나간 웃음소리는 미처 모자 안에 숨어있지 못하고 훌쩍 세상으로 도망나간다. 그렇게 잔뜩 신이 난 제 웃음소리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어버렸을 것만 같았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차마 들지도 못하고 몸만 베베 틀었다.

 

"...그럼 이따 저녁에 봐, 경찰 아저씨!"

 

그렇게 말하는 호석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저가 봐도 스스로가 참 우습고 바보 같지 않은가. 그래, 웃으면 웃으라지, 이렇게나 좋은걸 어쩌겠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빼꼼 모자 밖으로 시선을 빼내었을 때, 조금씩 멀어져가는 호석과 꼬마의 뒷모습이 하얗게 쏟아지는 여름 햇빛 아래 부서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암팡진 아이는 뭐 그리 수다가 많은지 저를 뒤돌아보며, 저 경찰 아저씨는 친구가 많이 없나 봐요, 그렇게 아이다운 감상을 큰 소리로 이야기 하고, 그 옆에 자전거를 끌며 나란히 걷던 호석의 자지러질 듯 웃는 소리는 뜨거운 여름 공기를 타고 그렇게 정국에게로 전해져 온다.

 

 

 

 

 

 

그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에, 덩달아 웃음이 맺힌다.

 

 

 

 

 

 

 

 


 

 

 

 

 

 

 

 

 

 

 

에덴동산 한가운데에는
유일하게 먹어서는 안될 열매가 있다.

 

 

 

 

 

 

 

 

 

 

 

태형이 새 학기를 맞을 때마다 적지 않은 비용의 학비를 제출해야 했고, 그 외에도 생활비와 빚에 더해 태형의 과제나 작업을 위한 지출 역시 만만치 않았다. 태형의 수입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그것을 메꾸기 위해 호석은 거의 매주 주말을 정비소 외의 일을 하러 나가야만 했다. 

 

호석은 그것에 대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라 규정했다. 이 빈곤한 동거생활은 비록 태형이 멋대로 선택한 길이었다고는 하나, 결국 그를 끝까지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 자신이 그를 이 부족한 삶으로 끌어내렸다는 죄책감, 그리고 저와의 관계만 아니었더라도 좋은 환경에서 모자랄 것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었을 태형에 대한 안쓰러움이 늘 호석의 머리 끝에 따라다녔다. 때문에 호석은 악착같이 일을 했다. 게다가 태형이 수입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다만 심하게 불안정할 뿐이기에 자신만 잘 버티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공사장에서 과로로 잘못 쓰러지는 와중에 한쪽 다리가 골절되기 전까지는.

 

 

 

주말에 하던 일은 당연히 몇 달은 못 나가게 되었고, 정비소에서도 일의 능률이 떨어졌다며 멋대로 월급을 줄여버렸다. 치료비는 치료비대로 나가고, 망가뜨린 비품은 배상을 해야 했으며, 매번 가던 인력사무소에는 이번 일로 단단히 찍혀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나마 갚아나가던 빚은 이젠 이자를 내기에도 급급해졌고, 부러져 깁스를 한 다리는 아프고, 가계부를 펼쳐놓고 이렇게 저렇게 숫자를 바꿔써 보아도 상황은 암담할 뿐이기에, 호석은 한숨을 내쉬며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태형아, 벽화일 말야..."
"....아..."

 

거기까지 말을 꺼내고는 더 이상 잇지를 못하겠어, 호석은 숙인 고개 밑으로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벌어진 일들에 대해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이러한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 자존심 상했다. 그리고 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는 태형이, 일순 밉살스러워졌다. 

 

누구 때문에 주말에까지 돈을 벌고,
그러다가 이렇게 다쳤는데. 

 

그런 생각이 불쑥 올라오는 것에 화들짝 놀라 호석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의 결과이다. 게다가 일이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은 태형의 탓이 아니고, 더군다나 그가 벽화일 외에 다른 일을 찾는 노력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미술학원 선생일은 애들한테 주입식으로 그림 가르치는 게 싫다고 해서, 과외는 입으로 뭐 가르치는 거 자신 없다고 안 한다고 버팅기다가 억지로 몇 번 해 본 적이 있긴 했다. 다만 태형의 말마따나, 정말로 가르치는 일에는 영 재능이 없던지 한 번 잡은 일이 두 달 이상을 가는 적이 없고 번번이 잘렸었다. 예전에는 정말 젬병이라며 놀리고 웃으며 넘어갔던 일들이, 궁지에 몰린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나 미련이 남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고, 아픈 다리를 힘겹게 뻗으며 자리에 누워버렸다.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태형이 뭐라 제게 말을 걸고 싶어 우물거리다가도 결국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등을 쓰다듬기에, 그 커다란 손을 위안삼아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일을 하러 나가기 위해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이미 태형은 자리에 없었다. 분명 강의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딜 간다는 쪽지도 없고, 누웠던 자리는 진작에 식어버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걱정을 하면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목발을 짚고 출근을 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형, 이거 오늘..."

 

저보다 먼저 들어와 욕실에서 씻고 나온 태형이 제 앞에 흰 봉투를 들이밀었다.

 

돈이었다.

 

"...오늘 새벽부터 벽화 그리러 나갔었어? 어제는 없던 것 같이 그러더니?"
"아... 그, 벽화 아니구요. 벽화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데, 형이 이제 너무 힘들어하고 곤란해 하시는거 같아서... 나도 형, 그 일 가는데, 오늘 한 번 조금 가 봤어요."
"어어?!"

 

일순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멀겋게 쳐다보고만 있으니 태형이 보란 듯이 두 팔을 크게 벌려 덮치듯 와락 호석을 끌어안았다. 아직 여름이 오기엔 한참 이른 날씨임에도 찬물로 씻고 나와 차가운 태형의 몸과 콜록대는 기침 소리가, 직접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이미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죄를 지은 듯한 마음만 깊어진다.

 

"형은 진짜, 날 너무 무시하는거 같아요. 나도 팔다리 멀쩡한데, 몸으로 뭐 하는 거는 할 수 있는데. 맨날 그래, 맨날. 형은 맨날 혼자서만 괜찮은 척 하고, 맨날 혼자서만 다 해결하려고 하고, 나는...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미안."

 

태형의 손에는 물감 말고는 다른 것을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치 않는 일들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가난한 삶을 온전히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 삶에 찌들어가지 않기를 원했다. 처음의 그 순수함과 특별함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단지 죄책감이나 책임감 만으로 인한 것은 아닌, 마음속 더 깊은 곳에 근원한다. 

 

그 밑에는 태형이 이 삶에 역정을 내고 자신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과 그림을 그리는 일을 저울에 두고 재다가 결국 후자를 선택하게 될 상황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이 어둡고 낮은 곳에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끔찍했다. 태형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갑자기 돈이 쏟아질 일은 없었고, 느닷없이 호석의 다친 다리가 나을 리도 없었으며, 태형은 이미 가난이란 것이 단순히 낡고 좁고 오래된 집에서 사는 것 만이 아님을 알아버렸다.

 

태형이 그것을 알아버리게 만든 자신이 누구보다도 미웠다. 

 

 

 

 

 

 


 

 

 

 

 

태형이 학업과 일을 병행한 지 한 달이 조금 안되었을 때.

 

"형... 나 휴학했어요."

 

어느 날 밤, 느닷없는 태형의 폭탄선언에 호석이 뉘었던 몸을 벌컥 일으켜 앉았다. 졸업을 고작 1년 남기고 휴학이라니. 지금까지 저가 기를 쓰고 일을 한 이유는 다 뭐였단 말인가. 어이가 없고 속에서 왈칵 열이 뻗쳐서 와르르 잔소리를 하려는 때에, 태형의 말이 이어졌다.

 

"지난주에, 같이 일하는 어떤 아저씨한테 들었는데요."
"뭘. 그 아저씨가 너보고 일하라고 휴학하라던?"
"...지난 달까지 나만만 나이에 젊은 사람이 주말마다 나와서 일했대요. 빚 갚으면서 동생 학비 벌어야 한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일하다가 지난 달에 결국 과로로 일하다 쓰러졌대요. 근데 쓰러지면서 들고 있던 목재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다고, 나보고도 그 꼴 나기 싫으면 적당히 일하래요. 자기 부주의로 다치면 수당도 안나오고 회사측에선 당연히 치료비는 커녕 망가진 물건들 손해배상이나 하라고 한다고."
"..........."
"......그거 형이죠?"

 

천천히 일어나 앉아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태형의 말에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어딜 봐도 자기 이야기였으니까. 그 커다란 눈에는 언제나 약했으니까.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요? 나한테는 단순히 사고였다고 했잖아요. 왜, 왜 맨날 괜찮은 척 했어요? 이렇게 힘든 일을 이렇게나 오랫동안 왜 별것 아니라고 했어요? 왜 나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왜 사람을 머저리로 만들어요?"
".....너는, 그냥 이런거 몰라도 돼. 그냥 너 하는거 열심히 하고...."
"왜! 왜 맨날 형은 혼자만 아는데요! 나보고 무슨 염치로 학교를 다니라는거에요?! 나는 정말, 진짜, 내 벽화로 벌어온 거에 조금만 더 보태면 되는 정도인 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 치고 그냥 형이 혼자 무리해서 내 학비랑 작업비 마련한거 잖아요! 그러다가 쓰러지기까지 하고...! 다리도 다치고...! 왜 이렇게 사람 속상하게... 속 터지게 하는데요!!"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에 솔직한 아이는 또 그렇게 울고야 만다. 깁스를 한 다리가 무거워 쉬이 다가가 앉지 도 못하는 제 몸과, 마냥 웃게만 해주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어버린 제 마음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이야기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호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태형이 그것을 더 늦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니 아예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호석은 여전히 생각한다. 태형은 그것을 몰랐어야 했다.

 

벽에 기대어 앉은 호석의 한숨소리와, 등을 지고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쿨쩍거리는 태형의 울음소리가 어둠을 습하게 채웠다. 물을 머금은 어둠은 무게를 지니고 두 사람의 어깨를 짓누른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진흙 같은 삶의 늪으로.

 

 

 

 

 

 

 

 


2020.04.28.

상속/포기/법 [써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인이 사망하고 3개월 이내에 그 절차를 밟았다면 빚에서 구제 받았겠지만, 호석이는 그때 군대에 있었고 주변 누구도 그 법의 존재를 몰랐죠...

 

또, 막역일은 그냥 무턱대고 나가면 안되고, 교육을 받고 수료증을 발급 받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야기에는 안 나왔지만, 태형이는 진작에 수료증을 호석이 몰래 따뒀다는 비하인드가 있지만, 이야기 흐름상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재연재의 재연재(...)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원래 돌아오려던 때보다 조금 이르게 왔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