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어느날, 화산을 청소하고 커피나무에 물을 주던 정국은 무척 커다란 씨앗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때껏 자신의 별에서 본 적이 없는 그 씨앗이 정국은 너무나도 신기했습니다.
그 씨앗 속에는 어떤 꽃이 숨어있을까.
정국은 씨앗을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고, 잘 말린 별똥별 가루를 뿌려두었습니다. 씨앗이 추워할 것 같아서 밤에는 뭉개 구름에서 떼어낸 솜뭉치로 이불을 만들어 주었고, 목이 마르면 안되니 무지개로부터 떨어진 물방울들을 모아 씨앗을 적셔주었습니다.
매일 매일을 그렇게 정성을 들여 씨앗을 돌보는 것이 정국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꽃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지고 벅차올랐습니다. 마음이 몸보다 가벼워져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만큼 말이죠. 그럴 때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열심히 화산을 청소했습니다.
석양이 지는 것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은 채, 정국은 그렇게 매일을 기쁨으로 씨앗을 지켜보았습니다.
꽃을 맞이 할 날을 기다리면서요.
정국이 자신의 별로부터 여행을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어느 별의 한 왕국이었습니다. 우연히 도착한 정국을 그 왕국의 왕인 남준이 옥좌에 앉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서 오시게, 해가 134430 번 바뀌는 동안 처음으로 방문한 손님이여. 나는 이 나라의 왕일세."
정국은 멋들어진 옥좌 위에 앉은 왕도 놀라웠지만,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더욱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의 별에 있어야만 할 그의 꽃이 남준의 곁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국은 남준에게 차를 대접받으면서도 자신의 꽃, 혹은 자신의 꽃과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남준은 귀한 존재를 자랑하는 듯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정국에게 그를 소개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나의 친구 호석은 이 왕국의 국무대신이자, 국방대신이자, 경제대신이며, 교육대신인 것과 동시에, 또... 아무튼. 이 왕국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 이 왕국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자, 이 왕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나와 함께 했던 사람이지.""...이 왕국이 세워지기 전부터요? 그게 언제인가요?"
"글쎄. 아마도 해가 134430 번보다 훨씬 더 많이 바뀌기 전이 아니었을까. 내가 기억하기도 훨씬 전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으니까."
정국은 자신이 별을 떠난 것이 고작 두 밤 전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곤 남준의 곁에 선 호석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쩜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까 놀라워했죠. 그럼에도 혹시 저 사람은 자신의 꽃이 맞고, 남준과 함께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스러운 마음은 여전하였습니다. 호석에게 되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말이죠.
"저를 아시나요?"
"오늘 이 왕국에 처음 온 것이라 하지 않았니?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 만나는 게 분명해."
"...그럼, 그럼 저의 꽃을 아시나요? 당신과 똑같이 생긴 꽃이에요."
"글쎄, 나는 이 왕국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고, 또한 나와 똑같이 생긴 존재는 이곳에서 본 적이 없단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나."
호석은 자신의 꽃을 알지 못한다는 말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정국에게 미안해 했습니다.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말이죠. 그 사과하는 목소리마저 자신의 꽃과 똑같은데, 그는 자신의 꽃이 아니라니.
정국은 혼란스러웠지만 좋은 왕자가 되기 위해서는 참고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별 밖의 세상에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요.
정국은 남준과 호석에게 차와 다과를 대접받는 동안 왕국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남준은 처음부터 왕이 아니었으며, 왕국은 처음부터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별과, 그냥 평범한 별의 주인, 그리고 그의 친구가 있었을 뿐이죠. 그러던 어느날 사람들이 그들의 별에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정국처럼 말이에요. 남준은 그들이 이 별을 좋아해주길 바랐습니다. 순수한 환영과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으로 남준과 호석은 그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했고, 그것을 함께 즐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의 입소문은 빛만큼이나 빠릅니다. 남준의 별에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관광을 하다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별이 좋아 정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남준과 호석 역시 무척 바빠졌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바빠질 수록 찾아오는 사람들은 더더욱 늘어났습니다. 별이 가득가득 찰 만큼이나요.
"그 때가 나와 나의 친구에게는 가장 즐거웠던 때였던 것 같군."
그렇게 말하는 남준의 표정에는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났습니다. 그러고보니 정국은 그가 말하던 그 사람들이 이 왕국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많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궁금했지만 정국은 남준의 이야기를 재촉하거나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쩐지 그가 곤란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더욱 더 늘어나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 사이를 묶어줄 결속력과 소속감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별의 주인인 남준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대표하고 자신들을 한데 묶어주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게 모두의 의견에 의해 남준은 왕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자다가 깨어보니 왕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말이에요.
그렇게 모두의 왕이 생겼고 그의 애정과 통치를 바라는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별은 왕국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과 왕국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알아보고 사랑해주길 바랐죠. 그래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며 그들의 왕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노동과 노력은 곧 왕국의 기반이 되는 토대로서 굳건해지고, 남준이 앉아야 하는 옥좌는 모든 이들이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높이 높이 쌓여올라갔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남준을 위해 일했습니다. 누군가는 국무대신도 되었고, 누군가는 국방대신이, 또 누군가는 교육대신이. 그렇게 모두가 열심히 일하며 왕국은 점차 굳건하고 위대해져갔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왕국은 더욱 화려한 영광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남준은 자신의 왕국의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노고에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높다랗게 쌓여올려진 옥좌가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바람이 불 때면 흔들리는 그 자리가 너무나도 춥고 외로워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깜깜한 밤에는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어떤 날은 그곳에서 뛰어내리고도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옥좌 저 아래 까마득한 곳에서 호석이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석은 자신의 애정도 고마움도 두려움도 외로움도 모조리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거든요.
남준은 시린 밤이 되면 달빛을 불빛 삼아 쓴 편지를 그에게 가만히 내려보내었습니다. 그 편지를 통해 그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말이죠. 자신이 보낸 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어 읽고 있는 호석의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일은 남준의 마음에 큰 기쁨이자 위안이었습니다.
해는 몇 번을 뜨고 몇 번을 졌을까요.
길고도 먼 시간이 지났습니다. 혹자는 지리하도록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도 했습니다. 또 다른 혹자는 강산이 여러 번 변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도 했습니다.
왕국에는 차츰차츰 사람들이 줄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죠.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 땅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싫증을 느끼고 또 다른 별을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별로 되돌아 갔을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와 다투고 떠났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일상 속에서 왕국과 왕의 존재를 잊었을 수도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수 많은 이유들이 존재했습니다.
남준이 앉았던 옥좌의 높이도 그에 따라 천천히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땅과 가까워져 갈 때, 남준은 저 높이 하늘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 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점차 한산해져 가는 자신의 왕국이 쓸쓸하고 외롭다고 느꼈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높은 곳에 있을 때도 느껴지는 것은 외로움이었는데, 낮은 곳으로 내려왔을 때도 느껴지는 것은 외로움이라니. 어느샌가 외로움은 남준의 왕국의 오래된 주민이자 남준의 두번째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외로움은 묵묵한 친구일세. 나의 질문에는 늘 대답이 없지. 그러나 늘 내 곁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네."
정국은 남준의 그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행을 하는 동안 언젠가 그 외로움이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면 좋은 친구로서 맞이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옥좌가 땅으로 내려오고, 남준이 정말로 오랜만에 자신의 별이자 왕국에 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는 여전히 호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며 그에게 건네고 간 수 많은 직함들과 높은 곳에서 남준이 내려 보낸 편지들을 잔뜩 떠안은 채로 말이죠.
두 사람은 지친 몸을 땅바닥에 뉘이고 오랫동안 함께 웃었습니다.
해가 134430 번 바뀌어 정국이 그들의 오랜만의 손님이 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나와 호석이 언젠가 때가 되어 이 별에서 떠나 사라지게 되면 왕을 잃은 왕국 역시 사라지게 되겠지.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가 이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라네. 그렇다면 실체가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진다 해도, 누군가의 기억 안에서는 영원히 존재하게 될테니까. 그러니 그대가 여행하는 동안 우리들과 이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주지 않겠나?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이 왕국에 있는 것 중 무엇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어."
"...아니요, 이 왕국에는 제가 원하는 것이 없어요."
정국은 남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 정국은 왕국에서 바라는 것이 딱 하나 있었거든요. 그는 남준의 곁을 지키고 있는 호석이 부러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별에 있는 꽃과는 달리 단단해 보였고, 잔걱정도 없어 보였고, 유능해 보였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꽃 만큼이나 다정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국은 그 바람을 남준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왕이 아니었고, 그 왕국이 이뤄낸 모든 영광과 번영은 그의 것임과 동시에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국은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을 빼앗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에게서 호석을 빼앗아 간다면, 남준의 곁에 있는 외로움이라는 친구가 언젠가 점점 거대하게 자라날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라는 친구가 고삐를 잡아뜯고 남준을 잡아먹을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정국은 남준에게 여행하는 도중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전해줄 것을 약속하고 왕국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나며 뒤돌아 보았을 때에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손을 흔들며 정국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별에서 바라보던 석양과도 같아서, 정국은 한참이나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크게 웃어보였습니다.
차오르는 눈물은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정국은 남준과의 약속대로 나에게 그가 전해 들은 왕국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혹은 있었을 왕국과, 그 안의 왕과, 그와 언제까지고 함께할 신실한 친구를 마음으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역시 이 사막에서 나가고 나면 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주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2020.11.08
외로움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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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rince et Ses Fleur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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