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정국의 꽃은 아름다운 그의 겉모습과는 달리 겁이 무척 많았습니다.
특히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무서워해서, 처음 화산이 터졌을 땐 펄쩍 뛰어올라 정국의 품에 숨어 바들바들 떨 정도였으니까요.
그 탓에 정국은 할 일이 늘어났습니다. 화산이 터지는 소리를 무서워하는 그의 꽃 탓에 정국은 매일 화산을 청소해야 했거든요. 또 화산이 터질 즈음이 되면 꽃을 품 안에 담아 소리에 놀라지 않도록 보듬어야 했습니다. 꽝! 하는 소리가 지나고 나면 품 안의 꽃이 괜찮은지도 살펴야 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그의 꽃은,
"익, 익숙해져서 별로 큰 소리도 아닌걸? 오늘은 놀라지 않았거든! 사실은 어제도 그닥 놀라지 않았다구! 그러니 너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
콧대를 높이고 허세를 부려댔습니다. 또 다시 큰 소리가 나게 되면 여지 없이 정국의 품 속으로 뛰어들게 되면서도 말이죠. 꽃은 왜 솔직하지 못할까. 정국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정국의 꽃은 말이 많고 시끄러웠죠.
"정국아! 저기 좀 봐봐! 별똥별이야!"
"정국아! 바느질은 어떻게 하는거야?"
"정국아! 화산이 또 움찔거려!"
꽃은 무슨 일만 있으면 호들갑을 떨며 정국아, 정국아 쉼 없이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마치 정국의 별을 그의 이름으로 꽉 채워버리고 싶은 것처럼 말이에요. 게다가 세상의 모든 일들을 정국에게 읊어주고 싶은 것처럼 하루 종일 일어났던 일들을 종알종알 떠들어댔습니다. 물론 꽃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정국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이기에, 정국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죠.
그럴 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도 다 알아."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꾸하면 그의 꽃은 정국이 만들어 준 옷 만큼이나 발갛게 얼굴이 붉히고는, '아, 그렇지' 하고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정국의 별은 조용해 졌지만, 반대로 정국의 마음은 미안함으로 무척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조잘조잘 말을 걸어오는 꽃 때문에 이내 그 미안했던 마음은 옅어지고 익숙해져 버렸죠.
그러던 어느 날.
정국이 무척 석양을 바라보고 싶었던 날.
정국은 꽃의 수다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날은 그냥 기분이 그랬거든요. 누구에게나 다들 그런 날이 있잖아요? 그냥 조용히 있고 싶은 날. 그냥 혼자이고 싶은 날. 정국에게 그냥 그 날은 그런 날이었던 것 뿐인데. 꽃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옆에서 종알종알 말을 걸어오는 꽃에게 그만 참지 못하고,
"그만 좀 해! 너는 왜 그렇게 매일 호들갑스럽고 수다스러워? 나도 다 아는 이야기라니까! 시끄럽다구!!"
정국은 버럭 화를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놀람으로 동그랗게 뜨여진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꽃의 시선에 정국은 금새 그렇게 후회를 하고 말았죠. 그 말을 하는게 아니었는데. 진심도 아니었는데.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미안!"
꽃은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가볍게 사과했습니다. 오히려 후회와 미안함으로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것은 정국이었죠. 조용해진 꽃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노라면, 정국이 뱉은 가시같은 말에 진하게 생채기를 입은 그의 마음이 빤히 보여서. 그 때 바로 미안하다고 했었어야 했는데.
자신의 말에 상처를 입은 꽃에게 그렇게나 미안하고 속이 상한데, 왜인지 미안하다는 그 말이 정국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오지 못하도록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입을 꾹 다물고 이를 악물어버리고 말았죠.
왜 그랬을까요.
...왜 나는 아직도 호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요.
여행을 다니던 중, 정국은 한 자리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풍경을 감상하는 걸까, 아니면 졸고 있는 걸까. 정국은 그 꼼작없이 한 자리에 앉아 땅만 흘낏흘낏 내려다보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왜 그러고 있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해졌습니다.
"뭘 하고 있는건가요?"
"쉿! 조용히 해. 그가 올 때가 됐다구."
참지 못하고 말을 걸자, 그는 조급한 대답과 함께 정국에게 손사레를 내저었습니다. 그에게서 친절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정국은 그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초조한 듯 손가락을 무릎에 톡톡 두들겨대면서도 입가에는 말간 미소를 띈 채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 행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정국은 그가 이토록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일지 더욱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먼 발치에서부터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이 별의 호석이었죠. 그리고 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꿈쩍도 않고 앉았던 그는 벌떡 일어나 바지춤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삐딱하게 자리에 섰습니다. 거드름을 피우듯 턱은 약간 하늘을 향해 쳐들고 말이죠.
길을 따라 걸어가던 호석은 자리에 일어선 그를 발견하고 밝게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좋은 날이네요!"
호석의 인사에 그는 별 일도 아니라는 양 고개를 까딱해 보이곤 바지춤에 끼워넣었던 손을 빼내어 살짝 흔들어보이며 말했습니다.
"어, 그러게. 오늘도 좋은 하루."
그렇게 인사한 그는 호석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에야 다시금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겨우 정국을 바라보고는 인사를 나눴죠.
"그는 매일 내 그림자가 이 바위를 다 덮을 때 즈음 이 곳을 지나가지."
자신을 윤기라 소개한 그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호석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꽤나 수다스러운 사람이기도 했죠. 그는 정국이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매일 이곳을 지나가는 호석과 그를 기다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자랑하듯 술술 이야기 했으니까요.
"내 그림자가 이 바위에 살짝 걸칠때면, 그를 오늘도 볼 생각에 나는 조금씩 설레기 시작하지. 그것은 조금 후 그가 이 길 위로 나타날 거라는 신호이니까. 그리고 내 그림자가 이 바위를 절반이나 덮으면, 왜 시간이 빠르게 흐르지 않을까 나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해. 그 초조함을 견디기 위해 나는 예전에 보았던 그의 모습이나, 그가 나에게 건넨 인삿말을 떠올리며 오늘은 그에게 어떻게 대답할까 마음 속으로 연습을 하는거야. 그리고 마침내 그림자가 바위를 다 덮게되면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버리지. 그리고 준비한 말들을 입 속에 세 번 되뇌이면, 나는 드디어 그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게 되는거야."
정국은 윤기가 말하는 것에서 자신이 씨앗으로부터 자신의 꽃을 기다릴 때에 가졌던 기대감과 설레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죠. 그렇게나 호석을 기다려 마지 않는다면, 왜 그는 저 길 끝에 먼저 다가가 호석을 맞이하지 않는걸까요.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간다면 조금 더 많이 호석을 볼 수 있고 조금 더 오래 호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텐데 말이죠.
정국의 그러한 질문에 윤기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건 그의 성실함을 모독하는 일이야."
"성실함이요? "
정국은 윤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조금 더 빨리 그를 만나고 조금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게 그의 성실함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는 걸까요.
"꼬맹아, 너는 성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보구나. 생각해 봐. 만일 네가 똑같은 일을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세 번 반복한다면 너는 성실한 사람이 될까?"
그의 물음에 정국은 자신의 손가락을 꼽으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세 번은 너무 적은 것 같아요."
"그렇지? 고작 세 번으로는 너는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없어. 다섯 번도, 열 번도 모자라겠지. 성실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기억하지 못할 때부터 시작되어 어느새 누군가의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까지 꾸준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해. 그리고 그는 저 길 너머에 있는 가로등에 불을 붙이기 위해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가지. 내가 그를 기억하기 전부터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어. 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가로등 불이 켜 왔지.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가고, 매일 같은 시간에 가로등의 불을 켜게 될거야.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는 어느샌가 약속이자 법칙이 되어있었지. 그는 성실함으로 그렇게 그의 주변의 세상을 길들인거야."
"세상을 길들여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굴데굴 굴리는 정국에게, 윤기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었습니다.
"꼬맹아, 생각해 봐.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그가 이 길을 지나는 것을 기다리지. 그런데 그가 그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내 그림자가 이 바위를 다 덮었음에도 그가 저 길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의아함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될거야. 그리고 내 눈이나 내 그림자가 이상한 거라며 자신을 탓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겠지. 마침내 내 그림자가 이 바위의 절반이나 지나갔음에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제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될거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걱정을 하고, 손톱을 물어뜯고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함에 몸을 떨겠지. 어쩌면 그 날은 세상이 변해버린 것처럼 느껴질지도 몰라. 나 뿐만이 아니라 이 길을 따라 그에게 길들여진 모든 존재들은 다들 그렇게 자신들의 일상이 달라져 버렸음을 인지하게 될거야. 그게 바로 세상을 길들인 성실함의 무서움이라는 거란다."
정국은 윤기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별에 있는 커피나무를 떠올렸습니다. 그 커피나무는 해가 378번 뜰 때 작은 꽃을 피우고, 63번 해가 더 뜨면 꽃이 지고는, 그 뒤로 218번 더 해가 뜨고나면 커피콩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해가 378번이 떴음에도 커피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는다면, 정국은 맛있는 커피콩이 자라나지 않을까 분명 걱정이 되고 불안함에 매일같이 커피나무를 들여다보고 있게 되겠죠. 그것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끔찍한 일일지! 아아, 정국은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별에 있는 커피나무에게 길들여져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정국은 그제서야 자신의 별을 떠나 여행을 하고 싶어진 마음의 진짜 이유도 깨달았습니다. 정국은 이미 매일매일 수다스럽게 조잘대던 그의 꽃에게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인해 조용해져버린 꽃과, 그로 인해 온통 변해버린 그의 세상으로부터 정국은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매일같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꽃의 다정한 성실함을 깨뜨린 것도, 그리고 그와 자신의 세상을 슬프게 만들어 버린 것도 모두 정국 자신이었던 것이죠.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에게 윤기는 말했습니다.
"네가 말한 것처럼 내가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면,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래서 그의 발걸음이 느려져 가로등 불을 늦게 켜게 된다면. 그에게 길들여진 다른 모든 존재들은 그 날은 초조함과 불안함에 덜덜 떨게될거야. 그러다가 마침내 언젠가 우리가 아주 친하게 되어서 그가 가로등 불을 켜는 일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있는 것을 중요시 하게 된다면. 그리고 결국 가로등 불을 켜지 않게 된다면. 그에게 길들여진 모든 존재들은 나로 인해 세상이 뒤집히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그런 식으로 그의 성실함을 모독하고 싶지 않아."
이제 정국은 윤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꽃에게 길들여진 자신의 세상이 뒤집혀진 그 날,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렸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 다가가는 대신, 매일 이 자리에서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건가요? 마찬가지로 그에게 성실함으로 기억되고 그의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길들이기 위해서?"
윤기는 대견하다는 듯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큰 웃음으로 의기양양하게 답했습니다.
"이제 알겠니, 꼬맹아? 그도 이제는 만약 그 시간에 내가 이 자리에 없다면 불안해하며 나를 찾게 되겠지.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는거야! 얼마나 멋진 일이니!"
2020.11.18.
세상을 길들이기 위해선, 우선 성실해질 것. 그리고 그것이 가장 힘든 것.
포스타입은 여기
Le Prince et Ses Fleur #04
by Impulse 정국의 꽃은 아름다운 그의 겉모습과는 달리 겁이 무척 많았습니다. 특히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무서워해서, 처음 화산이 터졌을 땐 펄쩍 뛰어올라 정국의 품에 숨어 바들바들 떨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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