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시리즈를 끝내고 쓰는 후기입니다. 오랜간 붙잡고 있던 시리즈였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지금의 기분과 마음을 되짚어보기 위한 기록으로서 또 이렇게 자판을 두들깁니다. 할 이야기가 많다보니 장문의 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그 모든 후기들처럼, 이것 역시 걸러들으시거나, 거르고 안 읽어 주셔도 됩니다. 후기는 모다? 뽀너스 스테이지다.
지금까지의 후기들은, 시리즈를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에 후루룩 썼던 것 같은데. 이번 후기는 조금 제게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네요.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데, 그래서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를 기분입니다. 그 막연한 기분에 이번 후기는 시리즈를 마친 후로도 한동안 안쓰고 도망을 다니다 일주일은 훌쩍 넘어서야 겨우 이렇게 붙잡을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제가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거의 집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세세히 쓴 글이다보니, 여타 다른 후기들보다 TMI가 많을 예정입니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은 이런 내용]
봄과 꽃과 국홉
1. 끝까지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완결까지 오는데에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이야기 자체로도, 개인적인 사정으로도. 트위터에는 우울감에 빠져 여러 번 징징거리기도 했고, 연재 중단 정도가 아니라 다 지워버리고, 이 포스타입도 트위터도 모두 다 없애버리고, 연성 따위 때려 치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했습니다. 심지어 완결까지 다 쓴 직후에도, 그리고 지금 이 후기를 쓰기 직전에도 또 다시 그런 충동에 휩싸이고, 그리고 그 충동을 또 다시 억지로 붙잡아 참습니다. 그리고 그 충동을 결국 붙잡아 주시는 것은 잘 읽었다 댓글로 말씀해 주시고, 후원으로도 하트로도 표현해 주셨던 여러분들입니다.
이 글이 그렇게나 애증스러웠어요. 정말 죽을 때까지 마음에 품고 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아끼고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이 따위 취향 타는 글, 혼자만 의미 부여하는 글, 기껏해야 팬픽일 뿐인 이까짓 글에 존재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며 불살라버리고 싶었고 말살시켜 버리고도 싶었습니다. 여전히 이 글은 제 포스타입에 있는 글들 중,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글 중 하나임과 동시에 가장 아픈 손가락 같은 글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좋아한다고 보고 싶다고 표현해 주셨던 분들께 - 특히, 예전 멤버십 가입 댓글에 이 글을 기다린다고 말씀해주셨던 분들께 - 진심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죽어가던, 혹은 죽을뻔한 글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 한 마디 인 듯 싶습니다. 쓰는 동안 참 많이 외로웠지만, 그리고 포타 업데이트로 더더욱 외로워졌지만, 결국 되짚어보면 저 혼자 쓴 글이 아니에요. 언제나 그렇지만, 이 시리즈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후기를 다 쓰고 나면, 이제는 이 글을 마음 한 곳에 싫은 마음 없이 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2019, 2020년이 담긴 글이었습니다.
2. 이 모든 일의 발단과 구성
원래 이 글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한국 전쟁 직후의 부산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전쟁 고아들이 주된 인물들이었고, 고아들끼리 모여 살며 유사가족을 이루어 지내다가 세상 풍파를 맞고 그 가족의 균열과 붕괴를 겪는, 뭐 그런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메인도 국홉, 랩홉, 거기에 후반에는 뤱찐까지 이야기 구성을 생각했었습니다만... 딱 이 설명만으로도 각이 나오지 않습니까...?
연재 중단, 글삭튀가 예고되어 있겠지.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영원히 빛을 볼 일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티비씨에서 Super 밴드라는 경연 프로그램을 보게 되고 (제티비씨 음악 경연 프로 애청자), 거기에서 찌리릿 영감을 받아 이야기의 노선을 바꾸고 그 안에 설정 되어 있던 요소들을 빼다가 얼개를 맞춘 것이 지금 이 시리즈,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입니다.
아마도 가수 본인은 지금 이때의 영상이나 노래를 꽤 부끄러워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이 노래를 처음 보고 들었을 때 가슴을 콱 쑤시고 지나가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에드 시런이 부른 원곡은 개인적으로 좀 자신감 넘치고 능숙한 느낌이랄까, 젊은 사람이 인생의 한 지점에서 (대체적으로 결혼식...) 나이든 후까지도 기약하는 노래 가사와는 다르게 저는 이 노래의 원곡이 어쩐지 노년의 부부가 황혼식 즈음에 하는 말처럼도 들리거든요.
그런데 경연에서 나왔던 이 곡은, 정말 너무나도 풋풋하고 절절하고 떨리는 첫사랑의 향기가 너무나도 진해서 듣는 사람이 어찌하지 못하고 동동거리게 만드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어요. 아마 가수 본인이 경연에서 긴장하고 떨어서 그렇겠지만. ㅋㅋㅋㅋ
지금 속이 너무나도 떨리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말도 잘 안나오는데, 그럼에도 당신을 좋아하는 이 마음은 똑바로 전하고 싶어!! 그런 느낌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최대한 정국이에게 투사를 시켰습니다. 지금 다시 들어도 이 글의 정국이의 이미지를 음악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네요. 그리고,
사족이지만, 이 Love Me Through The Night은 이 경연에서 나온 곡들 중 여전히 저의 최애곡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레트로 감성이 물씬한 시티팝을 들었을 때, 어딘가 서투르고 촌스러우면서도 풋풋한 첫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시절인 90년대 초반으로 시대상이 정해졌습니다. 핸드폰도 없고, 디지털 음원도 없고, 노래 하나 녹음해서 선물하는데도 그렇게나 많은 정성과 시간이 드는. 많은 것들에 직접적인 행동과 노력을 요했던 시절이죠. 버블시대의 도시를 달리는 곡에는 그 시절만의 세련됨과 따뜻함이 있습니다. 특히나 이 곡은 제게 따뜻한 봄과 시원한 여름날 밤을 떠올리게 해요.
이 두 곡으로 정국이가 가진 기본 정서와 호석이를 향한 마음, 그리고 그 시대상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기존에 있던 암울한 이야기에서의 겁 많고 자기 희생적인 호석이의 설정을 가져오면서 정국이에게 마음을 연듯 안 연듯 알쏭달쏭한 태도를 취하게 되며, 그런 호석이의 과거를 쥐고 흔드는 인물로는 남준이 대신 태형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태형이의 어딘가 좀 고집스러운 성격은, 원래는 남준이로 설정되어있던 이야기 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결핵 설정도 원래는 태형이가 아닌 남준이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구성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 제목이 정해졌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제목의 일반적인 인식은 '숨길 수 없는 것' 을 지칭하는 말이며, 그 중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하여 표현하고자 할 때 종종 쓰이는 말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의 제목은, 동시에 중의적인 의미와 이 이야기의 복선을 품고 있습니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하고 사랑의 뒤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붙어있는 것은 그 뒤에 더 이어질 말이 온다는 뜻, 숨기고 있는 내용이 있다는 뜻이며, (I,My,Me,Mine, 때와 같죠.) 그것은 호석이가 과거에 겪었던 세 가지 시련을 관통하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이 가지 않는 행위이며 숨겨야 하는 사랑이라는 것에서 다가오는 아픔, 가난으로 인해 꿈과 이상이 희생되는 현실에서 다가오는 슬픔, 그리고 결국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얻은 질병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친 것에 대한 절망. 이 세 가지 시련을 호석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고, 그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게 되었죠. 그로 인한 죄책감이자 삶을 짖누르고 있는 마음의 짐,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림돌로서 저 세 가지 키워드는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감춰진 진짜 제목은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호석의 스스로 짊어진 죄' 가 되며, 그 짐 아래 눌린 호석이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또 다시 같은 시련을 받으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저주가 담긴 '벌', 그리고 종내에 그 모든 것들을 품고 함께 극복하자며 일으켜 세우는 정국의 순수한 애정은 '구원' 으로서 구성되었습니다.
이 모든 설정이 2019년 4월, 5월 무렵에 정해졌습니다. 처음 예정은 길어야 13편 정도겠다 싶었는데... 그러니까, 이 글을 저는 1년 4개월 정도를 손에 쥐고 있었던 데다가, 글의 길이도 외전 포함 22편까지 늘려놨다는 말이 되네요... 진짜 징하다... (셀프 환멸) 이 글이 그렇게까지 길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줄이자면 5편으로도 끝날 수 있는 내용 아냐? 라며 짜증이 났던 적도 있습니다만... 뭐, 이렇게 길어진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글이기 때문이겠죠... (땅굴 파다가 갑분 해탈의 경지)
아울러 비슷한 시기에 여기에서는 쓰일 수 없는 감성을 모아 조금 드라이하고, 현대적이고, 성인물에 대한 도전정신으로서 함께 쓰기 시작한 것이 '1도 모를 1' 이었습니다. '1도 모를 1'을 쓰고 다시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을 쓰다가 뷔홉 파트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현실도피성으로 쓴 것이 로코로 발전한 '1는 알아도 2은 모른다' 와 역키잡의 정석으로 쓰여진 '여우비' 이고요. 특히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과 '숫자 시리즈' 는 한 줄기에서 갈라져 자라난 형제와도 같은 글이에요.
2. 회수하지 못한 떡밥 (회.못.떡)
이야기 틀을 이렇게 짜놓았다 보니, 복선으로 넣어 둔 떡밥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아마 완결, 후기,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다 보신 후에 1편부터 다시 읽으신다면, 그 때는 모르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던 것들이 소소하게 다시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이 있으실거라고 봅니다. (다시 읽기엔 꽤나 무거운 글이지만 말입니다. 그냥 잊고 계셨다가 내년 봄 꽃이 필 무렵 문득 생각이 나 다시 꺼내 읽어주시는 정도로도 저는 너무나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복선은 거즘 다 회수가 되었습니다만, 단 한가지, 뷔홉 파트에서 회수되지 못한 채 맥거핀으로 변질되어버린 내용이 있어서 이곳에 남깁니다. 훗날 이 후기를 되돌아볼 저를 위해 남기는 기록에 가깝겠네요. 넣으려고 하다가 너무 이야기가 질질 늘어지고 정신적으로 힘들고 괴로워서 과감하게 삭제한 장면입니다.
태형이의 아버지가 태형이의 연애관에 대해 강경하고 과격하게 반대하는 입장인 것은 작중에서 은근하게 표현이 되었습니다만,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죠. 17편 태형이의 대사 중에도, '집으로 돌아가겠다. 돌아간다고 연락도 이미 넣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나오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17편 병원에서 태형이와의 길었던 연인 관계를 정리한 후, 호석은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원에서부터 뒤따라온 태형의 아버지에게 피습을 당하게 됩니다. 백주대낮에 동네 길거리에서 죽을 정도로 두들겨맞고, 온갖 저주와 폭언을 들으며, 온 동네에 아웃팅을 당하는 바람에 결국 일터도 눈에 띄지 않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른 동네로 쫓기듯 이사를 가게 되구요. 그렇게, 그나마 소중하게 간직될 수 있었던 사랑마저도 처참하게 짖밟히고 부정당하고, 태형의 나이 든 얼굴을 한 그 남자의 말로서 호석은 자신이 사랑을 했던 것/하는 것 자체가 죄이자 벌이라고 세뇌당하는 것이 뷔홉의 진엔딩이었습니다만...
아이, 뭐, 그르케 됐수다.
문맥만으로도 느끼시겠지만, 굉장히 어둠의 다크에서 새드의 찌통을 맛보게 되는,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정신 공격이 엄청난 끔찍한 내용임과 동시에 이 이상 내용이 늘어지게 되는 부분이라서, 더는 못해먹겠다며 과감히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후회합니다...
이로 인해 기침, 가난, 사랑, 이 세가지의 무게 밸런스가 많이 달라지게 되어버렸습니다. 저 셋 중에 사랑의 죄가 가장 가볍게 (거의 없는 듯) 느껴지는 이유도, 호석이가 자신의 사랑이 벌이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조금 약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유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엔딩의 설득력이 약간 부족한 듯 느껴지는 이유도, 모두 이 내용이 삭제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렇게 느껴져요...)
아마 이 내용이 들어갔다면 엔딩의 두 사람의 대화내용도 많이 달라졌을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다 쓰고 난 다음에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며 후회해봤자 이미 지난 일이고 제 선택에 의해 결정된 내용이니, 그냥 저는 이만 놔버릴라요.
소개 받아 들어간 직장이 그럭저럭 번듯한 곳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다리 부러지니까 봉급 삭감하는 곳이지만...) 지금은 한적한 동네 조촐한 정비소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직원이 뭔 짓을 하고 농땡이를 부려도 잔소리 1도 없고 심지어 사장도 잘 안나오는 곳...) 위화감은 좀 있지만, 뭐 오래 직장생활 하다보니 돈 덜나와도 몸 편하고 마음 편한 곳으로 이직 했거니 그렇게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집이야 뭐, from 반지하 to 반지하 라서 위화감도 없고...
그리고 뷔홉 파트 묘사를 가만히 뜯어보면, 태형이가 정국이마냥 일터에 놀러간다던가 한 적도 없고, 둘이 동거하는 동네에는 현재 파트에서 자주 등장하던 오르막 내리막 묘사도 없어요. 골목은 있을지언정, 경사진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같은 직장도 같은 동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저만 알고 있는 이야기, 제가 제 안에 지어놓은 세계, 그리고 그냥 모르고 지나가도 상관이 없을 내용이므로, 그랬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TMI다...
3. 꽃, 꽃, 그리고 꽃
제가 이 글을 가장 아끼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작정을 하고 호석이를 꽃에 비유하며 쓴, 그야말로 정호석 애찬가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스스로를 꽃으로 비유하곤 하는 호석이는, 비단 스스로가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로 그는 꽃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그 마음을 이 글에 최대한으로 녹여내고 싶었습니다. 그냥 예쁘다는 것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하기에 호석이는 꽃다운 사람이라는 말이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요.
그 아름다운 이면에는, 그 꽃을 틔우기까지의 노력과 강한 생명력이 존재하지요. 꽃은 자신의 때에 자신의 할 것을 최선을 다해 마치면 다른 생명에게 계절을 양보하고는 겸허히 숨을 죽이고 씨앗과 열매를 맺으며 자신의 철이 되돌아 올 때를 기다립니다. 매번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움트고, 그렇게 아름답고 화려하게 자신을 피우고, 그렇게 때에 맞춰 자신을 마감하고. 그 모든 생명의 규칙 조차 아름다운 것이 꽃이라는 생물이기에. 정호석이라는 사람은, 그렇게나 참으로 꽃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호석 참으로 본인잘알)
말이 길어졌는데, 그냥, 평생 가까이서 만날 일도 없을텐데, 글에서나마 잔뜩 꽃으로 치장해 주고 싶었어요.(그런데 그님은 평생 볼 일이 없는 팬픽) (...이런 나라서 미안하다 호바...) 호석이와 그의 계절을 표현하는데는 참으로 많은 꽃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봉선화, 장미꽃, 개나리, 살구꽃, 벚꽃, 안개꽃, 제비꽃, 등나무꽃, 아카시아꽃, 수국, 해바라기, 달맞이꽃, 봄꽃, 들꽃, 꽃, 꽃, 그리고 꽃.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꽃의 개화시기를 조사하고, 그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사건의 페이스를 조절하게 되었습니다. 봄에는 꽃이 많이 피잖아요. 개나리부터 시작해서 살구꽃, 벚꽃, 등나무꽃, 아카시아 꽃까지. 이 이야기의 국홉 파트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꽃들입니다만, 3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철을 겹쳐가며 피는 꽃들이죠. 국홉의 이야기는 시간의 진행이 이 꽃들의 개화 시기에 맞춰져 있기에 그 감정의 호흡과 발전이 굉장히 느리고, 그렇기에 무척 그 감정이 디테일 해 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 감정들을 오롯이 전달하고 싶어서 이야기의 진행을 서두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렇기에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어쩌면 조금 답답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수 많은 꽃들 중에 이 이야기의 가장 메인이 되는 꽃은, 다들 인식하셨겠지만, 살구꽃입니다. 살구꽃은 매화나 벚꽃과도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진분홍빛 꽃받침이 왕관처럼 뒤집혀 있는 작고 예쁜 꽃이에요. 요즘의 인식으로는 봄하면 떠오르는 꽃들이라기엔 조금 생소하실 분들이 많음에도 살구꽃을 메인으로 삼은 이유는, 원래 우리나라의 봄꽃하면 벚꽃보다는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인 것과 (고향의 봄 노래 가사에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나오죠), 이 세 꽃 중 유일하게 과실을 맺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분명하죠. 사랑이 꽃과 함께 개화하고 그 사랑의 결실로서 열매를 맺으며, 그것을 함께 베어무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완결이 될 예정이었으니까요. (원래 비 많이 오면 과일 당도 떨어지는데... 이... 은유를 위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해 주십사...) 복사꽃 (복숭아 꽃) 도 염두에는 두고 있었는데, 복사꽃의 다른 이름은 도화. '도화살' 할 때의 '도화' 가 복숭아 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가 심어지는 것을 경계하여 제외했습니다.
계획대로 마지막편은 살구를 함께 배어먹는 장면의 연출로서 이 이야기는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정국이와 호석이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은유적으로 아우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또한 엔딩인 20편에는 고의적으로 두 사람의 꽃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정국이의 탄생화 꽃말인 '나를 사랑해 주세요' 와 호석이의 탄생화 꽃말인 '천진난만'. 이 후기를 읽기 전에 '혹시...' 싶으신 분들이 있으셨을까 궁금하네요. ㅎㅎ
4. 그 동네
이 이야기에서 제가 도전하고 싶었던 여러가지 요소 중, 꽤나 심혈을 기울였던 것 중 하나가 제 머리 속에 있는 그 동네를 읽고 계신 분들의 머리 속에도 함께 집어넣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셉션처럼 여러분의 꿈 속에 들어가 제멋대로 동네를 설계를 할 순 없어도, 제가 설계를 한 동네를 언어의 묘사로서 최대한 여러분의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순 있지 않을까요?
모티브가 되는 제 기억 속 몇몇 동네들을 얽어서 만든 동네가 이 글 속에 존재합니다. 아마 각자의 상상으로서 조금씩 다 다른 지도를 가진 동네이겠지만, 그럼에도 읽으시는 분들 뇌리 속에는 정확히 지정된 키워드와 이미지들이 존재할거에요.
조금 낙후된 느낌은 있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봄에는 개나리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높다란 담장이 있는 곳. 그 외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봄꽃이 피는 곳. 그 동네에는 학교가 있고, 파출소가 있고, 정비소가 있고. 그것도 큰 살구나무가 있는 정비소. 어두운 밤에는 드문드문 주황빛 가로등이 서 있는 골목. 경사가 많아 오르내리막이 많은 동네. 오르막길 제일 꼭대기에는 정국이의 옥탑방. 내리막길 아래쪽으로는 정비소와 파출소. 그 중간 어디 즈음에 호석이의 반지하 방.
이 키워드들을 지속적으로 언급함에 따라 읽으시는 분들의 머리 속에 배치가 되어 나름의 지도로서 생성되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활동하는 느낌을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이 이 글에 담겨 있습니다. 그냥, 정말 90년대 어딘가에서 있었을 것 같은 그런 동네의 그냥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어쩌다 그런 사랑 이야기처럼 다가가길 바랐어요. 그것이 잘 전달 되었을지는... 늘 그렇듯 제가 판단할 것은 아니기에.
이 동네가 경사가 진 곳으로 설정이 된 이유는, 정국이와 호석이의 심리 상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참 좌절감과 죄책감을 안고 사는 호석이는 아래로. 아랫 동네의 반지하에 사는 호석이는 삶에 깊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작중에도 심리적으로 좌절하거나 암담한 상황이 생길 때, 인물들이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이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나옵니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이 말을 여러번 반복해서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첫사랑을 떠안고 있는 정국이는 대체적으로 위쪽에 있거나 위로 향하는 묘사가 의식적으로 들어간 편입니다. 동네 꼭대기의 옥탑방에서 살고 있는 것은 심리적으로 고조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래에 있는 사람을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그리고 상황을 극복하고 상승하기 위한 위치적 우세함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유일하게 위로, 위로, 위로. 딱 한 번 나오는 이 말도 정국이에게 쓰여졌습니다.
이야기 초반에는 아래에 있는 호석이를 만나기 위해 정국이가 기꺼이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호석이 업고 있던 죄를 상징하던 그림이 홍수에 휩쓸려 간 후반부부터는, 어느샌가 가벼워진 마음을 가지고 위쪽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호석이를 향해 정국이가 뛰어 올라가는 장면들이 나오게 되죠. 이러한 위치적인 묘사들도 두 사람의 심리 상태나, 관계의 변화를 표현하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7. 비
Hundred Doller Bills,
Hun, Hundred Doller Bills
Hundred Doller Bills, H...
아니 아니야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깡하는 사람꺼 아니야!!
비 (날씨)
이 이야기에서는 국홉의 관계가 크게 진전될 때마다 비가 옵니다.
작중에 비가 크게 세 번 왔었죠. 호석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던 때, 홍수, 그리고 후반부의 클라이막스, 모두 비가 왔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선 눈이 내린다...! 그럼 뭐가 어떻게 진전될까요?! 예?!)
극적인 장면의 연출의 용도로 사용한 이유도 있고, 꽃이 피려면 물을 머금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고, 그리고 무언가를 씻어내리기 위한 자정의 이유도 있습니다. 과거를 씻어내고 새로운 관계의 꽃이 둘 사이에 피어나려면 비를 맞아야 한다, 뭐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과거 파트에서의 한 번을 제외하고는, 호석이는 비가 올 때마다 정국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정국이는 처음 두 번의 뜻을 마지막에나 가서야 이해하지만, 그 말은 사실 '내가 널 좋아해서 미안하다 = 역시 내가 널 좋아하면 네게 안좋은 일이 생긴다' 는 의미입니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
이야기의 진행이 실제 시간과도 비슷하게 흘러가다보니, 조금 더 현장감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부러 재연재를 3월부터 시작하거나 15편 올리는 시기를 장마가 올 즈음해서 올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올렸을 땐 한국에 비가 그렇게나 많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홍수 재해에 관련된 편들을 올리고 나서 비가 그렇게나 오고, 침수되는 지역이 발생하는 걸 보고, 올리면 안될 시기에 글을 올렸나 하고 조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습니다. 날씨가 제 잘못도 아니고, 비 오라고 고사지내면서 쓴 글도 아닌데 말이죠... (나는야 과몰입충... 정신 좀 차리자...)
아무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는 수해가 없었길 바랍니다.
6. 타임라인
이 이야기의 타임라인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태형이와 호석이의 첫만남 (6편) :
- 봄
- 태형 18세
- 호석 19세
호석이의 정학 사건 (8편) :
- 초여름
- 태형 18세
- 호석 19세
군대를 다녀와 재회한 시기 (10편) :
- 여름 (호석 정학 사건 이후 4년 후)
- 태형 22세 (재수해서 대학교 2학년)
- 호석 23세
동거를 시작한 시기 (10편, 11편) :
- 가을 (재회 후 몇 달 뒤)
- 태형 22세
- 호석 23세
호석이 다리를 다친 시기 (12편) :
- 봄 (동거 1년 반 차)
- 태형 24세 (대학교 4학년 졸업반 휴학)
- 호석 25세
두 사람이 헤어진 시기 (17편) :
- 겨울 (동거 2년 반 차의 1월 즈음)
- 태형 25세
- 호석 26세
정국이 호석과 만난 시기 (1편) :
- 봄 (태형과 헤어지고 약 2년 남짓 후)
- 정국 25세
- 호석 28세
생각해보면 호석이 생일이 본체와 같다면 이 타임 라인이 나올 수가... 당시에 빠른은 모두 한 해 빨리 학교를 갔으니까... 아이 뭐, 호적 늦게 등록해서 1년 늦게 갔다고 칩니다. 그냥 대강 이정도라고 알고 대충 삽시다.
태형이와 호석이의 동거기간은 약 2년 반의 시간이었고, 그 뒤로 호석이는 똑 떨어지게 2년 반이라는 시간 만큼을 죄책감에 지지고 볶고 괴로워했네요. 슬슬 그만 괴로워해도 될 타이밍에 정국이가 등장해서 그 고통에서 빼내어 준 것도 같습니다.
따흐쒸...! ...둘이서 행복해라...★
7. 정국
이 이야기의 정국이의 직업이 경찰이 된 것은, 그 때 마침 달방의 이 편을 보고 있어서. (...) 근데 해놓고 보니 찰떡이었던지라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국이가 이 이야기에서 해야할 역할에 딱 맞는 직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국이는 호석이를 향한 마음을 가지고 어쩔 줄 모르는 순수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정국이에게는 약간 슈퍼히어로스럽거나 초인적인 부분들이 언뜻언뜻 묘사로서 들어가 있어요. 신체능력이 엄청 좋은 사람이에요. 비상약 대강 아무거나 퍼먹고 며칠 잠을 자면 자연 치유로 낫는데다, 때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괴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위기 상황에서는 순간적인 판단력과 신체능력만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기도 하죠. (태릉이 빼앗긴 인재... 그리고 그걸 알고 잘도 부려먹는 김경장...)
그러니까 마지막 편에서 두 사람이 마음을 터놓을 당시 '자신은 나쁜 일을 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 는 정국이의 말은, 경험으로 다져진 확신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앞으로도 정국이는 다른 건 몰라도 몸이 크게 다치거나 아플 일은 크게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기까지 해서...
호석이는 아직 정국이의 이런 면을 잘 인식을 못하니 정국이의 말에 반신반의를 하고 여전히 잔걱정이 많지만, 언젠간 서서히 깨닫겠죠. 아, 얘는 내가 걱정을 할 만한 그릇의 인간이 아니구나... 어느날 지구에 행성이 충돌해도 얘만큼은 어떻게든 살아남겠구나... 라구요. 직업도 번듯한 공무원이고 나중엔 연금도 나올테니, 호석이는 정국이 챙길 일 없이 자기가 가진 것이나 잘 다루면 될테고, 마음 다치는거야... 그거야 뭐 연인들끼리 알아서 해야죠 뭐... 시대상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는 사랑이니 아웃팅 당할 일 없이 자기들끼리 조용히 알콩달콩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울러 이야기 도중 얼핏 흘리듯 나온 이야기지만, 정국이는 가족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모종의 재해로 가족을 잃었고, 한동안 피난소 같은 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그 탓에 군대도 현역으로 안가고 민방위 훈련만 간다는...) 피난소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는 표현은 그 때문에 나온 문장입니다. 그 사정을 아는 파출소장은 정국이를 아들처럼 마음으로 아끼기도 하고, 그래서 잔소리도 많고요. 그래서 저는 파출소장 만큼은 혹여 나중에라도 정국이와 호석이의 관계를 알게 되더라도, 그냥 모른척하고 보호해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8. 호석
호석이의 직업이 자동차 정비소 직원이 된 것에는, 사실 초반에 살짝 설명을 했던, 이 이야기의 베이스가 된 스토리에서 많은 것을 차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서는 정비소 직원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을 공부시키고 먹여살리기 위해 조선소에서 용접공 일을 하게 되는 설정이 있었습니다만, 이야기가 부산이 아니라 내륙지방의 (아마도 서울의 어딘가) 동네 이야기가 되다보니 조선소에서 일을 할 수도, 그리고 용접공 직업을 가질 복선도 없어졌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기술직인 정비공으로 노선을 틀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호석이의 유난한 희생정신이나 책임감도 모두 그 기존 설정에서 데려왔습니다. (이 이야기의 여러가지 판타지적 요소 중 하나는, 정비공임에도 손이 고운 호석이... 그래서 자주 장갑을 끼웠습니다. 로션도 잘 바르고 관리 잘 했나보지 뭐...)
이 이야기의 호석이는... 참... 불쌍해요. 빈곤한 환경도 환경이지만 그것보다는, 모질지도 못하고 마음은 한껏 다정한데 유달리 책임감만은 강하고 남탓은 하지 못하는 그 성격이 제일 불쌍해요. 성격이 그래놔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자기 탓을 하고, 도망도 못가고, 죄다 떠안으려고 하고. (그러나 축복 받은 면역 체계... 정국이 못지 않게 초인적)
태형이와의 안타까운 추억은 누구의 잘못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이야기를 쓴 입장으로는 태형이에게 더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태형이 파트에서 이야기를...) 호석이가 받아들이는 상황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다 자기 책임이라고 해요 이 바보같은 사람은. 호석이의 그러한 생각의 흐름을 오롯이 느끼실 수 있는 것이 호석이의 시점에서 화자되는 과거의 이야기이겠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호석이의 생각을 읽으며, 아... 그게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생각을 할까, 하고 안타까워 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성격이 그래먹어놔서 그래요. 인생 살기 힘들게. 그러므로 이런 호석이가 맘편히 살기 위해선, 자기가 돌보고 책임을 져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겠죠...
그리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요. 학창시절부터 친구는 없었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있던 것이 태형이었는데, 그마저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제 손으로 망쳐버렸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사랑은 안할거라고 다짐한채로, 매일 같이 집 정비소 집 정비소 집 정비소. 그 인생에 무슨 낙이 있었을까요.
동네 사람들과 교류가 있긴 했겠지만 그닥 마음을 터놓지도 않았을테고. 그런 와중에 갑자기 제 인생에 불쑥 나타나서 저 좋다고 쫓아다니는 잘생기고 예쁘고 몸도 좋은 제복남이... 얼마나 큰 유혹이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렇게 불쑥불쑥 오락가락하죠.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확 떠밀어내고 철벽치고. 그러면서도 그 감정이 너무 달콤하니까 끝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속으로 '여기까지는 친구라고 칠 수 있는 거겠지?', '이건 그냥 사람이 궁금해서 그런거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야.', '나를 좋아한다는데 모질게 굴면 미안하잖아.' 라는 식으로 조금씩 스스로를 속이던 것들이, 되돌아보면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바다까지 와버린거죠.
그 바람에 정국이가 깨나 맘고생을 했습니다만, 호석이 본인도 참 정신 못차리고 죽을 맛이었을 거에요. 자기 맘이 자꾸 맘대로 안되서 미안하다는 그 말이, 저는 쓰면서도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원래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게 사람 마음인데 말이죠.
그런 호석이에게 고백하는 정국이의 말은 참 재미있습니다. 정국이는 호석이에게 '그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혹은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함부로 죄를 사하지도, 쉽게 단언을 하지도 않아요. 다만 '당신이 걱정하는 일들 극복해 줄테니 저를 믿고 받아들여 맘껏 사랑하라' 고 말하죠. 정국이는 호석이가 과도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아요. 정국이에게 있어 그 죄책감 마저도 호석이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쓰리고 모난 부분까지 모조리 포대기에 둘둘 둘러 보쌈을 해서는 들튀해버렸죠.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런 둘에게 미래에 과연 시련이 찾아오긴 할까요? 저는 안그럴 것 같아요. 꽉 닫힌 해피 엔딩,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밖에 생각이 안나요. (물론 대부분의 제 글의 엔딩은 그렇습니다.)
9. 태형
솔직히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이 받은 태형이의 이미지가 제일 궁금합니다. 태형이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너무 궁금해요. 이 이야기의 태형이, 마냥 안타까우신가요? 위화감 느껴지거나 하진 않으셨나요?
제가 인식하고 있는 이 이야기 속의 태형이는, 정말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에요. 그야말로 부잣집 도련님. 나이에 비해 세상 물정을 너무나도 모르고, 모든 사람들에게 오냐오냐 사랑받고 자라서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임과 동시에 떠받들어지는 것에도 익숙하고, 자존심도 강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선 무척이나 고집이 센 인물입니다. 예술적 기질도 강해서 돌발적이고 충동적이며 기분파이기도 하구요. 그 모든 것들이 호석이의 시선 너머로 담겨 있으면서도, 동시에 호석이의 시선에 의해 무척 미화되고 죄책감으로 가려지고 포장이 된 부분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호석이는 두 사람의 생활비, 자기 빚, 태형이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주말 노동까지 자처해가면서 했어요. 작중에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위의 타임라인으로 볼 때 그걸 한 1년 이상을 한거에요. 그 동안 태형이는 벽화 알바를 하기는 했죠. 불규칙적으로. 드문드문히. 그리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것만. 태형이는 금전 감각과 경제 관념이 없어서, 자기가 얼마를 버는지,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 자기 학비는 얼마나 되는지, 왜 호석이는 주말에까지 일을 해야하는지, 호석이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근육통을 달고 오는지. 그걸 전혀 모르고 살았던 거에요. 과로로 쓰러지는게 당연한 건데, 쓰러지기 전까지 태형이는 그냥 모르고, 혹은 모른척하고 얹혀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비단 이 장면 뿐 아니라, 이 외에도 태형이의 부족한 면을 호석이의 죄책감/미화 필터를 거쳐 묘사한 장면이 여럿 존재합니다.
그걸 상황이 어떻다 말하지 않고 혼자 다 짊어지고 산 호석이도 답답하고, 그걸 내내 궁금해하지도 않고 알아차리지도 못한채 살은 태형이도 답답하고... 그러고 잘도 2년 반을 동거를 했다 싶어요... 둘 다 어려서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모했죠. 세상에 둘 만 있으면 다 행복할 줄 알았을거에요. 특히 태형이는.
그러나 동시에 그런 성격의 태형이가, 모든것이 부족한 호석이의 세계로 떨어져 내려와 그렇게나 버텼던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진실했고 간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그렇게 쫓아다니기도 했고, 결국 호석이 몰래 자처해서 노동판으로 뛰어들기도 했고, 그리고 그렇게나 좋아하던 그림도 포기해가면서 동거 생활에 매달리기도 했고. 병을 숨겨가면서 끝까지 붙어있으려고 했고. 구질구질한 현실에 잠식되어가며 말과 태도가 엇나가고 뾰족해져가면서도, 그럼에도 함께 있으려고 했고. 그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고집스러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읽으신 분들이 호석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태형이는 아마도 이 면모가 더 강하게 비쳐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타까우셨을거에요.
아마 태형이는 병이 그렇게까지 큰 병이 될 줄도 전혀 모르고 있었을거에요, 그 모양이 될 때까지. 그냥 숨기기 급급했겠죠. 결국 그렇게 되고 나서야 함께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던 현실을 자각하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자기 욕심이었음을 반성하며 호석이와 병행할 수 없는 다른 길로 걸어갈 마음이 생긴겁니다. 저는 이것이 태형이란 한 인간의 성장이며, 이것을 깨닫길 원치 않았던 호석이의 바람은 과보호이자 자신을 밑거름으로 삼으면서까지 지키려했던 치기 어린 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의 결말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가난이 원초적 잘못은 맞지만, 그 이전에 호석이의 혼자 다 짊어지려는 성격, 태형이의 세상물정을 모르는 천진함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두 사람의 치기 어린 자존심에 잘못이 있는 것도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어려서 그렇습니다... 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려서 그래요, 어려서...
어떤분께서 태형이와의 마지막 편의 댓글에 그런 말씀을 써주셨어요. 태형이가 호석이보다 빨리 털고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호석이의 삶에 먼저 뛰어 든 것은 태형이었고, 그가 제자리로 돌아갔으므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롯이 호석이 뿐이에요. 남은 자리의 흔적을 호석이는 혼자 질 수 밖에 없으니 그 고통도 더 오래 갔을 것입니다.
어쨌든 태형이는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해봤잖아요, 결과가 안좋았어서 그렇지. 있는 힘껏 사랑도 해봤고, 같이 살아보기도 했고,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했으며, 그 결말을 봤잖아요. 그러니 원래 자리로, 돈도 있고 가족도 있고 꿈도 있는 생활로 돌아가는 겁니다. 병이 다 나으면, 호석이와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예쁜 추억으로, 그 당시의 힘들었던 경험은 자기 작품에의 영감으로 변환되겠죠. 잘 살거에요. 언젠간 호석이도 잊고 자기에게 맞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겁니다. (...그 그림 홍수에 안 떠내려가고, 나중에 태형이가 대작가가 되면, 그 그림 경매에 부쳐서 짭짤하니 돈 좀 받아도 좋을텐데... 라고 닳고 닳은 어른이 되어버린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뷔홉 파트는 내용이 상당히 무거워서 쓰기 힘들어했던 것도 있지만, 태형이라는 인물의 이런 면들을 호석이의 시선으로 숨기고, 누락시키고, 비호하는 내용이기도 해서 더 쓰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쓰는 이의 치졸한 복수는 에필로그 하편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물론, 팬픽은 팬픽일 뿐 과몰입 노노합니다. 다른 인물들도 그렇고, 태형이 본체가 이렇지 않다는 것은 다들 알잖아요. (찡긋-★) 더 크게 보자면, 태형이는 저의 이야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희생되었다고도 저는 생각해요.
아, 그리고 많은 분들이 혹시 태형이가 죽나?! 하고 생각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태형이가 죽게되면 이 이야기 속의 호석이 성격 상 영영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기에, 태형이의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꽤 이른 단계에서 삭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글을 쓰는 성향이 멤버를 나쁘게 쓰는 것을 그닥 반기지 않아서, 그 때문에라도 그 선택지는 일찌감치 사라졌습니다.
10. 곧 컴백
...여타 후기들에 비해 내용이 굉장히 많고 농밀한 편이네요. TMI의 홍수... 20편이나 되는 장편이다보니 얼마나 제가 할 말이 많았겠어요... 이것들이 부담스러우신 분들은 잊으셔도 좋고, 그런 것이 있었구나 싶으신 분들은 나중에 다시 읽어주실 때 이 후기의 내용들도 함께 기억해서 읽어주신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이실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18편의 정국이가 호석이에게 해주는 말들은, 사실 그 당시 하고 있던 일도 이상하게 끝나버리고, 게다가 갑자기 무 뽑히듯이 급작스럽게 미국으로 되돌아왔어야 하는 저 자신을 위로하는 말임과 동시에, 제 글을 읽는 분들 중 혹여 현재를 살아감에 있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신 분들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잘 이겨낼 수 있을거에요, 그것이 무슨 일이든. 이긴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겁니다. 다들 화이팅.
8월 21일에는 드디어 싱글이 발매도 되고, 게다가 연말에는 새 앨범 소식도 있다고 하니까, 다들 정신 단디 붙잡고 열심히 덕질하는 라이프 되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덕질에 매진하며... 예 뭐. 다시 새 글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모르겠네요, 지금으로선. 하루 좋았다 하루 자괴감 들다 그런 날들의 반복인데다 죄다 우울한 스토리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인더숲이 과연 제게 새로운 호흡기를 달아줄지 어떨지...) 아무튼.
전 세계의 많은 분들이 그렇지만, 저 역시 ㅋㄹㄴ가 입힌 영향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으로서... 어서 빨리 이 사태가 종식되고 방탄을 콘서트장에서 직접 만났으면 합니다. (아 근데 자택근무 잃는건 넘모나도 시르다...)
긴데다가 많은 것들이 들어차있어 무거운 글을 지금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나름으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와 해석 등등을 다 쓴다고는 했는데, 누락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혹시 '이 부분 왜 이랬는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싶으신 부분이 있다면 맘 편하게 질문 던져주세요. 언제나, 댓글, 포스타입 메세지 열려있고요,
익명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한 Peing, (익명을 빌어 하시고 싶으신 말들, (욕은 하지 말아주시얍... ㅠㅠ) 궁금하신 점, 기타 등등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을 던져 주세요. 개인 정보가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eing.net/ko/impulse189
그리고 포스타입 메세지가 있습니다. (로그인 필요)
https://satellite-99.postype.com/
다음 주말에 에필로그가 올라올 거에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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