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묘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 주십시요.
by Impulse
- ...가 걔야?
- ...부터 알ㄷ... ...있으면 다 해결될 ......
- 그쪽 동ㄴ... ... 니가......온다더니?
뿌연 안개가 낀 듯한 의식 중에 멀리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오가는 것이 들려왔다. 누구일까. 무슨 소리일까. 그것은 가까이 들렸다가도 또 멀어지기도 하며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통과 내장을 헤집는 듯 메슥거리는 불쾌한 기분. 마취 기운이 사라져가는 탓일까. 그에 더해 부자연스럽게 결박되어 있는 팔다리와 지끈거리는 옆구리의 통증 탓에 호석은 저도 모르게 끙, 하는 신음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깼나보네?"
그 익숙하고도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저를 향해 말을 걸어왔을 때, 호석은 정신을 잃기 전 자신과 정국이 당한 일들을 떠올리곤 이를 악물었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지던 정국. 놀라서 정국을 부축하려던 자신을 붙잡는 험악한 손길과, 옆구리로부터 꽂혀들어와 온 몸을 태워버릴 듯 했던 그 끔찍한 전기 충격. 비명이 터져나오던 제 입을 틀어막던 손. 점점 힘이 빠지고 몽롱해지던 의식. 그리고, 지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 곳. 제게 말을 걸어오는 원의 목소리.
기어이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고만 원에게 호석은 깊은 환멸감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호석은 모로 뉘여진 채 결박 당해 제대로 운신하기 힘든 몸을 비틀어가며 시선을 최대한 여기저기로 굴려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스무평 남짓한 크기의 낡은 창고로 보이는 이 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명이 다해가 껌벅거리거나 둔한 빛을 내고 있는 누런색 불빛, 듬성듬성 두서없이 바닥에 널부러진 박스들과 알 수도 없는 물건들이 늘어선 선반들. 그 너머로, 칙칙하고 곰팡이가 검게 서린 벽에 위치한 창문이 눈에 들어온다.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검은 락카가 잔뜩 칠해진 그것은 이 창고가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벽에 기대어 선 원과 쌓여진 박스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또 다른 인물이 호석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둑한 불빛 아래 커다란 덩치를 하고 수그리고 앉은 몸이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웅크리고 앉아 먹이를 노리고 있는 곰 같기도. 호석은 느닷없이 자신들을 습격했던 사람이 저 낯선이였을 것임을 확신했다. 누구일까. 원의 협력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는 왜 원을 돕는 것일까. 자신을 이곳으로 납치해 온 이유는 무얼까. 학교에서 원과 있었던 일로 자신과 정국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렇다면 상관도 없는 저 사람이 굳이 이 일에 협력하거나 가담할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타인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워서? 아니면 원에게 무언가 빚을 지기라도? 그도 아니라면, 자신에게서 어떠한 이득을 취할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들이 의문투성이였다.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인한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와중에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은 채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곳 저곳을 바쁘게 관찰하고 있는 호석을 유심히 보고 있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갑자기 박수를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네 말대로 확실히 지금까지 봤던 애들이랑 다르네! 보통은 다짜고짜 물어 뜯으려고 달려들던가 아니면 쌍욕부터 내뱉던데! 형질이 다람쥐라 그런가?"
낯선이가 자신의 형질 특성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을 제멋대로 떠벌리는 그 상스러운 무례함. 그 수치심과 불쾌감에 목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발설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했기에, 호석은 원망과 혐오가 섞인 눈빛을 제 곁으로 다가와 선 원을 향해 던졌다.
"...넌 이제 나가봐.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 사람'한테도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호석의 시선을 못 본 척 회피하며 낯선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원의 말투는 어딘가 명령조이면서도 동시에 어떻게든 강한 척을 하고 싶은 비굴함이 섞여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호석에게 감추고 싶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것을 파악하고 있는 듯 비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거구의 사내는, 그러나 원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얼핏 슬쩍 어깨가 맞부딫혔다 싶은 순간, 제법 키가 큰 원의 몸이 뒤로 넘어갈 듯 크게 비틀거렸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덩치 만큼이나 거친 힘을 가진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호석은 꽈직,하고 울리던 그 둔탁한 소음과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지던 정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국이는 괜찮은걸까.
호석은 자신이 처한 상황 못지 않게 정국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 몰려왔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정호석."
가면을 쓴 듯 딱딱하고 냉랭하게 굳은 표정을 한 원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원망과 책임전가는 무척 불쾌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이다. 전학을 온 이후로 그는 줄곧 자신이 무언가 무례하거나 잘못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곧잘 하곤 했다. 마치 호석의 마음에 부채감을 주입시키고 심리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것처럼. 실제로도 호석은 그의 그런 말에 말려들어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그의 편을 들어준 경우가 여러 번이나 되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말로 자신을 억누르려 할까. 또 어떤 말로 스스로를 피해자인 양 포장할까. 가면이 벗겨진 원의 말에 더 이상은 휘둘리지 않으리라 호석은 스스로를 다짐한다.
"내가 이 꼴이 된 건 다 네가 함부로 뱉은 말 때문인걸 아직도 몰라? 너는 어릴 때부터 꼭 그래. 나를 착각하게 만들지. 네가 먼저 말했잖아, 넌 내 편이라고. 그렇게 말해놓고는... 전정국, 그 새끼가 나타나고부터 넌 변했어. 전정국만 관련되면 넌 손바닥 뒤집듯이 날 배신했지. 나를 몰아세우고 나쁜놈으로 만들고는, 그것도 모자라 나를 사람들 앞에서 모욕 주고 내 자존심을 아주 박살내다 못해 짓뭉개버리기까지...! 나는 그저... 너가 내 편이라는, 네가 내 짝꿍이라는 네 말을 믿었던 것 뿐인데...! 네가 내 믿음을 배신한거잖아...! 안그래?!"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감싸쥐고 한껏 몸을 웅크린 원의 모습은 흐릿하게 깜박거리는 조명 아래 더욱 극적인 움직임으로 비춰보인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온통 우울한 자기 연민에 빠져 어둠 속에 잠식되어가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원 스스로가 어필하고 싶은 '비통함' 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그것은 '혐오감'을 동반하는 '괴이함'이다. 선우원은 그 스스로가 쌓아올린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 지금까지 그에게 벌어진 모든 어긋난 일들의 원인을 호석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구구절절한 자기 변명과 뒤틀린 피해 의식에 호석은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호석에게서 일말의 반응이라도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원은 고개를 숙인채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호석 역시 원의 피해의식의 재료가 될 그 어떠한 말도 섣불리 그에게 줄 생각이 없었기에. 둘 사이에는 불편하고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침묵만이 흐른다.
그리고 그 침묵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재차 입을 열게 된 것은, 원이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호석아... 나한테도 내 편을 들어주는 무리들이 생겼다는 거야...! 너 말고도 내 편이라는게 생겼지 뭐야?! 정말 불행 중 다행... 아니, 불행인가...? 어? 아하하하하!!!!"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원은 호석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폭발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붉게 충혈된 눈,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허공에서 갈퀴처럼 굳어버린 손가락. 호석은 그런 원에게서 소름끼치는 '광기'를 느끼고 있었다.
온 몸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듯 했다.
억겁의 열화 속에서 정수리 꼭대기부터 새끼 발가락 끝마디까지 통채로 숯덩이가 되어버릴 것 같은 그 열기, 그 고통, 그 압박감. 용암처럼 들끓는 에너지는 스스로의 심지로부터 왈칵왈칵 뿜어져 나와 온 몸을 불사를 듯 했기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을 치지도 못하는 정국은 제 자리에서 네 발로 웅크린 채 신음했다.
온 몸이 갑갑하고 답답했다. 마치 붕대에 온 몸이 둘둘 말려 꽉꽉 조여진 듯, 그렇게나 숨이 턱턱 막혀온다.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정국은 자신의 기도를 꽉 조이고 있는 셔츠의 목덜미를 신경질적으로 확 잡아챘다. 켁켁거리는 스스로의 기침 소리.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단추들. 셔츠가 마치 종이짝이라도 된 듯 너절하게 찢겨나간다.
온 몸이 새카맣게 타버릴 듯한 고통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두 팔이 땅을 힘주어 긁어내리면,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이 마치 흙바닥을 긁은 것 처럼 깊은 상흔을 내며 패여나간다. 그 땅을 짚은 제 두 손은 정말로 숯이라도 되어버린걸까, 어느샌가 새카맣게 변질되어 자글자글 타오르는 듯 희뿌연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니, 그것이 과연 손이 맞기는 한걸까.
쿠후욱, 크그그그... 목울대에서 울리는 소리는 심호흡이나 신음소리라기 보다는 낮은 주파로 땅을 울리는 진동음에 가까웠다. 번쩍, 번쩍, 망막의 뒷편에서 플래쉬가 터지는 듯 찰나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단편적인 영상들. 놀란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던 호석의 목소리, 눈 앞에서 필사적으로 버둥대다가 힘 없이 축 늘어져버린 그 다리, 저를 향해 달려오던 발소리, 지긋지긋한 그 목소리, 위기감, 그리고,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 호석...!
킁, 하고 냄새를 들이키자 평소보다도 강렬한 후각 정보들이 사방 천지에서 뇌리를 뚫고 들어온다. 그 중에 익숙한 호석의 체취를 솎아내어 신경을 곤두세우면, 어둑한 골목을 따라 그 냄새의 정보가 이어진다. 그리고 배알을 뒤틀리게 만드는 또 다른 채취, 그것들을 싣고서 떠나버린 자동차의 매캐한 매연 냄새.
그들이 호석을 어디론가 끌고갔다.
호석이 끌려가 버렸다.
감히 내 눈 앞에서.
내 반려를.
나의.
미간으로 날카로운 송곳이 찌르고 들어오는 감각이다. 심장께가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어 떨궈져 나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나 고통스럽고 그렇게나 공허감이 몰려온다. 속으로는 분노가 들끓어 오르고 밖으로는 상실감에 살이 에이는 듯한, 그 어쩌지도 못하는 환상통 속에서 정국은 마침내 호석이 끌려가버린 어둠 서린 골목을 향해 비통한 울음을 토해내었다.
커흥, 커허흐훙...!!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과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주파수를 가진 그 소리가 순식간에 일대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정국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분노와 상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과도 같은 처절하고도 속들끓는 고함이다. 그리고, 그 소리에 사로잡힌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춘고 재빨리 적막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정국에게 감각적으로 느껴져왔다. 그것은 강력한 힘 앞에 잔뜩 기가 눌려 눈치를 보는 약자들의 미약하고 밭은 숨소리일 것이다. 마치 세상이 제 힘 앞에 굴복하고 무릎 꿇는 것처럼. 난생 처음 겪는 낯설고도 어리둥절한 감각.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꽤나 통쾌한 기분이었기에. 정국은 킁, 하고 만족스러운 콧망울을 울리고는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차고 어둠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민감한 후각에 의존하여, 끌려가 버린 호석과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선우원의 흔적을 정국은 필사적으로 쫓는다. 마치 흑색 유성처럼 내달리는 그의 머리속은 아드레날린으로 범벅이 된 생각들고 가득차, 사냥감에 대한 목표 의식을 한껏 고양시키고 있었다.
그 자식을 찾아내면 어떻게 만들어줄까. 감히 나의 반려에게 저지른 짓에 곱절, 또 곱절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리라. 팔다리를 물어 뜯어 옴짝달싹을 못하게 만들어 버릴까. 아니, 척추뼈를 으스러놓아 바닥을 절절 기어다니게 만드는건 어떨까.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쏟아내 줄까. 그렇게 된 놈을 한참이나 가지고 놀아줄테다. 그러다가 질려버린 뒤엔, 어떻게 숨통을 끊어줄까. 목덜미를 물어 뜯어버릴까? 아니면, 두개골에 위아래로 바람구멍을 뚫어줄까? 아니면, 아예 형태가 틀어질 정도로 박살을 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렇게 걸레짝이 된 놈을 나의 반려에게 선물로 바치리라. 아아, 그도 분명 기뻐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정국은 사냥감을 쫓는 쾌락에 흠뻑 취해 빠른 속도로 도심을 내달렸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
비번이었던 김형사는 그 날 친구를 만나 꽤나 많은 양의 소맥을 들이켜 얼큰한 상태였다. 그 탓에 숙취 해소제와 해장용 라면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가 어슬렁 거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때, 느닷없이 여러 명의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우루루 편의점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진짜...!"
"저거 수인이야? 수인이 저런다고? 길거리에서?! 미친거 아냐?!"
"와, 나 저런거 처음 본다, 세상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제각각 창문에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며 그렇게 한두마디 씩을 내뱉고 있기에. 호기심과 함께 직업정신이 발동한 김형사 역시 그들과 함께 유리창에 달라붙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꿈벅 꿈벅, 술에 취한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면서.
그것은 마치 검은 포탄이 눈 앞에서 쉬이익 하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전쟁이라도 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포탄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는 대형 맹수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허겁지겁 편의점에서 뛰쳐나와 한참이나 저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나서의 일이다. 그리고, 그 짐승이 달려나가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놀라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술과 졸음이 단번에 달아나는 아비규환이 아닐 수 없다.
김형사는 허겁지겁 핸드폰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수인본부 강력계 형사과 김훈입니다. 형질 발현시키고 폭주 중인 수인 발견, 속히 지원 요청 바랍니다."
전학간 곳에서도 강압적이고 서열 주의적이며 제멋대로였던 태도를 고치지 못했던 선우원의 교우관계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랬던 것이 슬슬 2차 성징이 발달하고 사춘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억압된 스트레스가 폭력성으로 전면에 드러나면서, 선우원은 주변 학생들과 뻑하면 주먹질을 하며 싸움박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감정에 휩쓸려 교내에서 주먹질을 벌였다가 선생들에게 불려가 혼나거나 정학을 맞는 일이 빈번했던 그는 그것이 무척 귀찮은 일임을 학습하곤 학교 옥상이나 공터, 또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오래된 창고 등지에서 선생이나 어른들의 눈을 피해 싸움판을 벌여댔다.
오늘은 누구랑 누구가 싸웠다더라, 몇 대 몇으로 싸웠다더라, 내일은 누구 차례라더라. 그런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소문은 한창 혈기왕성한 학생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스포츠 소식 마냥 알음알음 퍼져나갔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쪽에 붙어 여러 무리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초기에는 일대일이거나 소수의 싸움이었던 것이 종내에는 큰 패싸움으로까지 번져나가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불린 선우원은 교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로 원정까지 다니며 자신의 서열을 위시하고 몸집을 불려나갔다. 이쯤되면, 오히려 학교나 선생 쪽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물리적 보복이 두려우니까.
그 와중에도 기회주의자들은 재미와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판에서 누가 이기는지를 걸고 도박판을 벌이는가 하면, 승률에 따라 강함의 순위를 매긴 유료 사이트을 운영한다던가, 또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주먹 깨나 쓴다는 학생들을 노리고 접근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조직폭력배라던가, 또는 불법 '이종 격투' 브로커 라던가.
한창 폭력성과 자극성에 굶주린 청소년들을 약점을 잡거나 원하는 것으로 꾀어내는 것 쯤은 그들에게 있어 어린애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선우원의 경우에는,
- 너같은 우성 형질자가 열등한 무형질자들하고 주먹으로 싸우는건 그냥 에너지 낭비 아닌가? 게다가, 괜한 사고 날까봐 무서워서 본능과 형질을 억누른 채 백날 처싸워봐야 괜히 헛물만 켜는 것 같고 몸만 더 근질거리지. 이딴 미련한 짓 관두고 우리 판으로 들어와. 100% 발현시킨 진정한 힘으로 싸워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너보다 열등한 놈들을 사냥하는 쾌감을 맛 볼 수 있을거야. 그렇게 신나게 본능을 불태운 보상으로 파이트 머니도 벌 수 있지. 네가 이기는 한,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네 편이야.
'그 사람'의 그 말이 선우원을 불법 이종 격투 투기장으로 이끌었다. 특히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네 편' 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투기장에서의 선우원은 꽤나 인기가 좋은 선수였다. 수인으로서 가진 동물의 형질이 수인들 중에서도 레어한 편인 중대형 맹수인 것도 있거니와, 인정 욕구에 굶주려 승리에 대한 집착도 무척 강했다. 무엇보다 본인이 그 생활에 푹 빠져 있기도 했다. 형질을 모두 개방시키고 본능에 완전히 매몰되어 눈 앞의 상대를 쫓는 것은 지독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먹이 사슬의 상위에 위치하고 호령하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싸움 놀이' 보다 더 큰 쾌락과 쾌감은 찾기가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러한 자신에게 환호하고 박수 갈채를 보내는 군중들에게 소름이 돋을 정도의 희열감을 맛보았다. 그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원이 투기장에 드나들기 시작함에 따라, 학교 생활은 반대로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싸울 이유도 재미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변 사람들에게는 좋은 놀이거리가 있다며 투기장을 권하고 적극적으로 그 판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누군가는 선우원과 같은 이유로, 또 누군가는 제법 짭잘한 파이트 머니를 이유로, 그 지역의 주먹 좀 쓰며 으스댄다는 혈기왕성한 놈들이 점차 투기장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피라미드 구조처럼 그들 사이에서 힘에 의한 계급이 생겨났다.
상위 계층에 속하는 선수들은 능력치에 따라 당연하게도 대형 맹수과 형질을 지닌 인물들이 대부분을 점했다. 그리고 본능의 특성상 소형 동물의 형질을 가진 사람들은 애초에 이러한 판에 낄 생각을 안하기에, 자연스럽게 하위 계층에는 인간들, 즉 '무형질자' 가 포진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 불만을 가진 무형질자들이 선수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쇼의 다채로움을 더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조직은 무형질자들에게도 '도구'를 허용하는 핸디캡 룰을 추가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싸움은 더더욱 난폭함과 유혈의 낭자함을 더하게 되었고, 그에 비례하게 이종 격투 투기장의 비밀스러운 인기는 날로 더해갔다.
그러니까 그것은, 도구를 사용해도 좋다는 룰에 다짜고짜 손도끼와 군용 나이프를 들고 온 어떤 또라이 새끼와 시합을 붙게 되어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그 시합에서 선우원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완전히 넘어버리고 말았다. 금방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상대가 휘두른 흉기에 제법 깊은 상처를 여러번이나 입고 피를 보게 되자 그만 눈이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열등한 무형질자 주제에 감히 제 몸에 상처를 입힌 것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분노가 속에서 불을 뿜듯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본능에 따라 제압한 상대의 목덜미를 세게 물고 놔주지 않았다. 그가 항복한다는 의사를 보이며 탭을 쳤지만, 놔주고 싶지 않았다.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 놔야한다던가, 주변의 들끓는 환호와 '죽여라' 라고 외치는 응원이 듣기 좋았다던가, 그런 이성적이거나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이유들이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제 발 밑에서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숨을 껄떡거리는 사냥감의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웠으니까.
여기서 멈춰야 할까?
아니, 내가 왜?
애초에 주제도 모른채 덤빈 놈이 잘못이지.
그렇게 본능이 원하는대로, 목덜미를 문 턱에 힘을 주고, 자신이 잡은 사냥감의 숨통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넣는 것으로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다만 그 행동이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결과를 낳을 줄 선우원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경기가 끝나고 투기장에서 내려웠을 때, '그 사람'은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눈 앞에 이미 절명한 선우원의 '사냥감'과 함께 두 가지 선택지를 들이밀었다. 이대로 경찰에 살인죄로 송치되느냐,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결과를 '청소'하고 그들의 일원이 되느냐. 무엇을 선택했는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전자를 택하거나, 혹은 요행을 노리고 도망을 쳤다가는 자신도 '청소 당할' 입장이 될 것임이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청소부'가 되는 것이란, 처음의 역겨움과 두려움만 떨쳐낸다면 그닥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저 조금 더,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또 하나의 '본능'에 한발작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일 뿐. 해내고 나니 그냥 자신이 지닌 형질의 본능에 따라 조금 독특한 날고기를 음미한 것 뿐이라 생각했다.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능력에 조금 더 솔직해진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일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테니까.
'청소부'로서 신고식을 치른 선우원은 이종 격투 투기장을 운영하는 불법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종 격투 투기장을 위시한 조직은 그런 식으로 위법적인 일들을 어둠 속에 매장시키며 한동안은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그 잘 굴러가던 돈벌이가 삐걱거리게 된 것은 결국 줄어드는 인재풀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사고로 투기장에서 뛸 사람들이 줄어가고, 밖으로는 '청소부'에 대한 소문 아닌 소문이 돌아 투기장을 제 발로 찾는 먹잇감들이 점차 줄어들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그 동네에서는 아무리 돈으로 유혹하고 그럴싸한 말로 꼬드겨도 넘어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게 되어버렸다.
조직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타격이었기에,
"그 상황에서 나는 너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어. 넌 어릴 때부터 그런거 잘 했잖아."
'그런거'. 또 다시 원은 호석에게 그와 같은 말을 했다. 그런거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전에 그가 그와 같은 말을 했을 땐 막연히 교우 관계가 좋다는 것을 칭찬하는 줄 알았던 그 말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했다. 호석은 긴장감으로 헐떡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너는 몰라? 너 그런거 잘해. 사람 묘하게 꼬드기는거. 사람들 네 주위로 불러들이는거. 네 말이면 껌벅 죽게 만드는거. 너한테 집착하게 만드는거. 그런거 네 주특기라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부터가 너한테 그렇게 절절 맬 일이 없잖아. 어디 나 뿐이야? 네 주변 사람들 좀 봐. 어떻게든 너한테 호감을 사고 싶어서 안달들이잖아. 너한테 미움 받으면 사람들 못견디고 미친다니까? 날 봐, 어떻게 됐는지. 네가 나를 배신하고 모두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결과가, 지금의 나야. 내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 걸 봤으면, 나중에라도 나한테 다가와 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안했어? 넌 상냥하고 친절한, '모두의 정호석'이잖아?"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서 말도 안되는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원의 광기 어린 눈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어 호석은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그의 말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쩐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이, 그리고 지금껏 원이 겪어온 그 말도 안되는 일들이 모두 제 탓인 것 같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자신을 좀먹는 것 같았다. 그 때 그렇게 모질게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정국을 괴롭히던 원을 섣불리 내치듯 대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말마따나 먼저 손을 내밀었더라면. 그랬다면 그가 전학을 갈 일도 없었고, 결국 그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후회와도 닮은 생각이 먹구름처럼 몰려온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너 때문에 이렇게 인생 조져버렸는데. 그러니까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너는 내 부탁 하나 쯤 들어줘야지."
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직직 끄는 듯한 발자국 소리 사이로 후두둑, 옷가지가 힘없이 흘러내려 땅으로 떨어지는 작은 소음이 섞여 들리다가, 나중에는 그 신발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걸음을 옮길 때 마다 타닥, 타닥, 바닥에 긁히는 발톱 소리가 그것을 대신한다.
"...사람 좀 구해다 줘. 그것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들로. 싸울 구석이 없는 놈들이라면 네가 싸우게 만들 구실을 만드는 것도 좋겠지. 음... 예를 들면, 너는 강한 사람이 좋다는 말을 은근슬쩍 뿌리는거야. 요즘 이종 격투 투기장이 유행이라던데, 라던가. 내가 너네 학교 전학가서 보니까 그런거 들으면 좋다고 달려들 멍청한 놈들이 한트럭이더라."
제가 한 말이 스스로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원은 힉힉대며 웃었다. 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는 어느새 호석의 귓가 근처에서 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헥헥 코와 입으로 뱉어내는 미적지근한 숨결이 귓바퀴와 목덜미를 간지른다. 그 불쾌감과 혐오감에 오소소소, 온 몸에 솜털이 거꾸로 치솟는 듯 하다. 구토감에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몸이 와들와들 떨려온다. 식은땀으로 셔츠가 눅눅히 젖은 것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 대신, 내가 두 번 다시 전정국은 건드리지 않을게. 맘 같아서는 찢어죽여도 시원찮은데... 그래도 내가 많이 양보한다. 그 새끼 근처에도 안 가고, 걔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약속하지. 진심이야. 나쁘게 생각할거 하나도 없다니까? 넌 그냥 친구를 너무나도 갖길 원하는 나한테 애들만 소개 시켜주는거야. 그냥 그 뿐이야. 그리고 그 친구들과 노느라 바빠질 나는... 전정국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거고."
끙끙대는 듯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 내용이 제법 솔깃하게 들린다. '정말로 그래줄거야? 그것만 해주면 정말로 두 번 다시 정국이 건드리지 않을거야?' 그런 반색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삼키자, 쓰으으... 울음을 참는 듯한 신음소리가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다.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저 말에 그냥 그러마고 대답하면 금방이라도 풀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하지만 네가 거절한다면... 나는 내 모든걸 걸고 전정국놈의 인생을 조져놓을거야. 내가 겪었던 좆같은 일들을 그 새끼한테도 겪게 할거고, 그리고 이제껏 내가 봤던 놈들과 똑같은 결말을 맺게 해줄거야. 아주 아주... 처참한 결말을. 네가 아껴 마지 않던 전정국은 결국 너의 선택으로 인해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난 그 결말을 만족스럽게 음미하며 그놈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울거야. 아마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맛있는 식사가 되겠지. 안그래?"
가까이 다가온 주둥이가 으르렁대며 이를 드러낸다. 동시에 온몸을 옥죄여오는 듯한 살기가 제 몸 위를 덮어서듯 버티고 선 짐승의 몸에서 사정없이 뿜어져 나온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곤두서는 감각이다. 격렬한 거부반응과 함께 심장이 미친듯이 펌프질하며 과호흡으로 삑삑대는 숨소리가 제 목구멍으로부터 삐져나온다. 호석은 이 살벌한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 그가 정국에게 내비치던 그것. 그것이 이제는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위로부터 쏟아지는 그것에 짖눌려 당장이라도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그 흉흉하고 끔찍한 압박감.
"선택해. 네게 호감을 가진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의 타락? 아니면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될 전정국의 비참한 죽음? 어느걸 택할래?"
원의 노골적인 살기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호석의 머리 속은 온통 비상벨을 켜놓은듯 시끄럽게 왱왱댄다. 선택과 선택 사이에 놓인 어지러운 생각들 사이에서 '정국이는 내가 지켜야 해', 그런 버릇에 가까운 책임감이 삐죽하니 우위를 점하려 할 때. 호석은 무언가 데자뷰를 겪는 듯한 묘한 기시감에 퍼뜩 혼란에 빠져 엉망진창이 된 생각을 멈췄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머리 속에서, 마치 동영상이라도 틀어놓은 듯 그 날의 영상이 흘러 지나간다.
살기의 편린을 마주했던 그 날.
원에게서 정국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몸으로 막아서며 뛰어들었던 그 날.
그 날 정국은 제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지마
그는 신중한 어조로 분명 무언가 말했었다.
뭐라고 했었지?
정국은 제게 어떻게 하라고 했었지?
형, 다음에는 아까처럼 그런 일 있을 때 나 보호한다고 앞에 서거나 그러지마. 그냥 도망가.
그냥 도망가.
때로는 보이지 않는 제3의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다. 마치 옳지 않은 선택지만이 유일무이한 것처럼 강압적으로 강요 당해 눈과 귀가 가리워진 때에는 더더욱.
호석은 순간적으로 있는 힘을 끌어모아 자신의 다리를 있는 힘껏 차올렸다. 그 발길질은 호석의 몸 위를 덮쳐 누르듯 하고 있던 네 발 짐승의 아랫도리에 사정없이 메다꽂혔다. 케힝! 사람의 것인 것도, 짐승의 것인 것도 같은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나옴과 동시에 자신을 압박하고 있던 살기가 일순 훅 하고 사라지는 그 짧은 순간. 때를 놓치지 않고 호석은 수인으로서의 본능에 집중한다. 형질의 발현으로 순식간에 줄어든 육체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 사이로 파묻혀 모습을 숨기게 된다. 성인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몸통에, 그 몸통만큼이나 길고 풍성한 꼬리. 다람쥐의 형질을 드러낸 호석은 자신을 덮고있던 천조각들 사이를 요리조리 꿰듯이 헤쳐나갔다.
호석은 지금껏 모로 뉘여져 관찰하고 있던 창고의 부감을 계산해 필사적으로 내달린다. 목적지는 가장 높게 쌓아올려져 있던 상자더미들. 그곳을 타고 올라가 선반 위로 뛰어내리면 어떻게든 창문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을 통해 밖으로 탈출하는 계획을 목표로, 바지 밑단을 통해 옷으로부터 빠져나와 안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호석의 뒤쪽으로부터 울분에 차 악을 쓰는 소리와 무언가가 내던져져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호석, 네가 감히....!!!!"
타다닥, 타다닥, 발톱이 땅에 긁히며 내달리는 소리가 호석의 꽁무니를 쫓아온다. 그것에 붙잡히지 않으려 더더욱 빠르게 달음질하던 호석은 상자 더미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 원이 얼마나 가까이 쫓아왔을까. 그것을 확인할 여유 따위는 없다. 길고 갈고리 같은 발톱을 이용해 무아지경으로 상자의 벽을 타고 오르고 있을 때, 쿵, 하는 충격과 함께 상자더미가 밑둥부터 흔들려왔다. 호석을 쫓던 원이 그것을 몸으로 치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 진동으로 높다랗게 쌓인 상자들이 아슬하게 비틀거린다.
"이 배신자 새끼, 넌 변한게 없어!!"
이 상자들이 흔들리다가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면. 그래서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게 된다면. 그 다음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가 않다. 호석은 더더욱 이를 악물고 상자들의 꼭대기로 내달린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 따위는 알 바가 아닌 원은 끈질기게 스스로의 몸통을 상자더미로 들이받는다. 쿵, 쿵, 쿵... 상자가 흔들릴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무서웠다.
필사적으로 기어오른 끝에, 마침내 상자의 꼭대기에 겨우 앞발이 닿았다 싶은 그 때.
쾅, 꽈직, 터덩, 쿠구궁, 아래에 쌓인 상자들의 틈이 벌어지며 상자더미들이 와르르 속절없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중력에 빨려들듯 아래로 끌려내려가는 듯한 감각. 그것에 저항하듯, 호석은 자신이 잡고 있던 상자의 벽을 박차고 있는 힘껏 뒤쪽으로 제 몸을 날렸다. 자신이 기억하는 감각이 맞다면, 선반은 분명 그 방향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은 그 작은 몸이 철제 선반에 메다꽂히듯 떨어져 켁, 하는 비명과 함께 나뒹굴게 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온 몸이 욱씬거리지만, 그래도 일차적인 목적지이자 이 창고 안에서 가장 창문에 가까운 장소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뛰어대는 심장과 헐떡거리는 호흡을 어떻게든 가다듬으려 애를 쓰며 호석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선반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형질을 모두 드러낸채 마찬가지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선우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뾰족한 귀, 푸른 눈동자, 온 몸을 뒤덮은 잿빛 털과 긴 주둥이. 그리고 그 아래로 드러난 날카로운 이빨.
얼핏 덩치 큰 개처럼 보이는 그 짐승은, 늑대이다.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몸통에는 언제 생긴 것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흉터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다른 짐승의 발톱이나 이빨 자국 같은 상흔, 또는 예리한 것에 째였거나 찍힌 것 같은 상흔. 마치 그가 자신에게 들려준 끔찍한 이야기들을 증명하는 표식처럼, 그렇게나 흉흉하고 살벌한 모양새들이 온 몸 곳곳에 새겨져있다. 호석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 거대한 늑대에게서 어린 날 철모른채 제 성질대로 강아지 같은 형질을 드러내던 원의 흔적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도무지 누구인지 진짜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네가 선택한 대로 해줄게."
땅을 긁는 듯한 차가운 으름장이 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선반에 놓여진 물건들을 다짜고짜 물어 당기고 몸으로 쓸어 죄다 바닥으로 떨어뜨려버린다.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는 그 행동만으로도 예측이 가능하다. 상자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선반마저 옆으로 쓰러뜨릴 작정인 것이다. 멍청하게 그를 내려다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호석은 다시금 달음박질하기 시작한다. 창문 쪽으로 어떻게든 가기만 한다면...!
"전정국은 죽일거야. 네 주변 사람들은 죄다 네 이름을 팔아서 우리 판으로 끌어들일거야. 거기서 싸우다 뒈지던 말던 내 알바가 아니지. 그리고 너는, 오늘 여기서 나한테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거야. 그게 정호석, 네가 선택한 결과야."
저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늑대는 선반의 기둥을 향해 몸통 박치기를 하듯 들이 받았다. 휘청, 하는 움직임과 함께 선반에 얹혀져 있던 물건들이 와그르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꼭대기 단에서 내달리고 있던 호석의 몸 역시 크게 좌우로 출렁이다 나동그라져 선반의 끝에 아슬하게 걸쳐진다. 다시금 뇌리를 찌르는 듯한 경계음이 온 머리통에 울려퍼진다. 위험하다...!
그리고, 선반 가장자리에 아슬하게 걸쳐진 호석을 본 원은 그것의 기둥을 악문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온 힘을 다해 상하좌우로 사정없이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어떻게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던 호석은 덜컥, 선반 아래로 굴러 떨어지다가, 가까스로 가장자리의 모난 부분을 앞발로 붙잡아 버텼다. 덜컹 덜컹 덜컹, 쇠들이 요란하게 끼그덕대고 부딫히는 소리. 까드득 까드드득, 이빨이 쇠선반을 우그러뜨리는 소리. 그런 소름끼치는 소음들이 창고로 울려퍼진다. 지진이라도 난 듯 정신없이 뒤흔들리는 선반에 대롱대롱 메달린 몸은 이리저리 낙엽처럼 흔들리다가,
"악.....!!!!"
결국 흔들리는 선반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앞발이 힘없이 떨궈져 나간다. 호석의 몸이 허공에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린다.
아, 이게 끝이겠구나.
벽에 부딪히던, 땅으로 떨궈지던,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것이 분명하다.
마치 어딘가에 메다꽂힐
작은 고깃덩이처럼.
시간이 유속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찰나 속에서, 호석은 그네를 박차고 새처럼 밤하늘을 가르던 정국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아올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 날의 정국을 더욱 선명히 떠올리려 두 눈을 감았다.
쨍그랑-----!!!!
창문이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창고 안으로 짓쳐들어와 땅바닥에 메다꽂히기 직전의 호석의 몸을 잽싸게 낚아챘다. 눅눅하고 뜨거운 낯선 감각. 후욱, 후욱, 거칠게 들이쉬고 내쉬는 뜨거운 바람이 호석의 부드러운 털을 이리저리 나부끼게 만들다가, 이내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놓는다. 뭘까.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걸까.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호석은 바닥에 납싹 엎드린채 감고있던 두 눈을 빠끔히 떠본다.
".......??"
어둠을 뒤집어 쓴 듯 새카만 털. 근육으로 짜여진 크고 두터운 몸. 굵고 길다란 꼬리를 가진 커다란 맹수가 호석의 앞을 가로막듯 버티고 서, 늑대와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크그그그그... 마치 바닥을 울리는 진동음과도 같은 낮은 울음소리와 머리 뒤로 바싹 젖혀진 귀는 그가 지금 대단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개를 낮게 숙인 채 눈 앞의 상대를 노려보는 황금색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린다.
당황한 것은 호석만이 아닌 듯 했다. 경계를 하느라 등의 털을 바싹 세운채 잔뜩 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늑대의 표정은 황당무계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잔뜩 얼이 빠져 있었다. 습격할 틈을 찾기 위해 뒤를 캐고 다니는 동안 줄곧 쫓았던 그 시건방지고 증오스러운 놈의 냄새가 눈 앞의 이 검은 재규어에게서 풀풀 풍기는 것을, 선우원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정국...? 니가 왜, 왜 니가 형질자야...?"
질문과 같은 혼잣말이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험악한 울음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발톱을 모두 드러낸 커다란 앞발이 얼굴로 날아드는 것을 기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맞는 순간 얼굴이 반쪽은 날아가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선우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몇 없었다.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피하는 것 뿐. 그리고, 그는 오른쪽으로 몸을 날린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커다란 덩치가 달려들며 회피하는 그 몸통을 엄청난 힘으로 들이받았다. 마치 모루로 옆구리를 내리친 듯한 엄청난 충격. 늑대는 케헥, 하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뒤로 나가떨어지고야 만다. 그러나 팔자 좋게 뻗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음 공격이 뒤따라 들어올 것이 분명했기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서면, 어느새 그 커다란 검은 짐승은 마치 어둠처럼 눈 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싸움에서 구석에 몰리는 것 만큼 수세에 불리한 것은 없다. 싸움판에서 굴렀던 경험으로 그것들을 잘 알고있는 원은 필사적으로 사이드를 노리거나 정면돌파를 감행하려는 시도를 해보지만,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수를 읽히고 오히려 점점 더 구석으로 몰리는 형세가 되어갔다.
상황은 여러모로 원에게 불리했다. 우선 투기장의 링과는 달리 이리저리 장애물들이 많은 창고는 몸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물론, 그 장애물들의 대부분은 그가 호석을 쫓느라 어그러뜨리고 쓰러넘어뜨렸기에 생겨난 것들이지만. 게다가 늑대가 제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한들 고양이과 맹수 중에서도 대형에 속하는 재규어의 체급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투기장에서도 이렇게까지 체격차가 나는 상대와 매칭이 된 적은 없었기에, 원은 더더욱 패배감과 갑갑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원을 대하는 정국의 태도는 그가 내비치는 노골적인 분노와는 달리 간접적이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사냥이나 몰이놀이를 하듯 상대에게 철저한 굴욕감과 무력감을 심어놓으려는 것처럼. 마치 죽이기 직전의 먹잇감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듯이. 꼭 고양이과 동물들이 그러하듯.
창고의 한 구석에 몰린 채 자신을 향해 으르렁대고 있는 정국에게, 원은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본능에 매몰되는 맛이 어때? 끝내주지?"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왜 그런 말을 하는걸까. 호석이 그러한 생각을 떠올린 그 찰나, 크게 입을 벌린 늑대가 재규어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인 공격은 마치 스스로를 약점에 노출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싸움판에서 구르고 구른 선우원이 굳이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가 무얼까. 그 정도로 성미가 급해졌던 걸까, 아니면 절박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걸까.
당연히 그 억지를 쓰는 듯한 습격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었다. 정국은 달려드는 원을 후려쳐 바닥으로 메다꽂아 버렸다. 그렇게, 형세는 완벽하게 기울어진다.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이상할 정도로 허무하게.
호석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다. 힘의 우위를 보여줬으니 이제는 뭘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원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찝찝한 구석은 있거니와 이대로 판이 소강상태에 들어갈 것이라 호석은 예상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우리 두 사람 곁에 얼씬도 말라는 경고를 내리고 정국과 함께 창고로부터 도망치면 될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둘에게 다가가려던 때에.
"아아아아악!!!!!!!"
재규어가 자신의 발 밑에서 버둥대고 있는 늑대의 허벅다리를 물고 자신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차없이 박아넣었다. 꽈드드드득, 엄청난 치악력에 의해 근육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그 엄청난 고통을 접한 원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창고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시끄럽고 성가시다는 양, 다음 순간 정국은 크게 몸을 휘둘러 물고 있던 원의 몸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늑대의 그 커다란 몸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큰 소리와 함께 벽에 충돌하고는 바닥으로 떨어져 힘없이 뒹구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바닥을 뒹구는 늑대의 목덜미를 문 채, 벽을 향해 그 몸을 몇 번이고 휘둘러 댔다. 휘둘리는 몸이 벽에 부딫힐 때마다 어딘가 으스러지는 듯한 참혹한 소리와 신음 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메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여과 없는 폭력성을 눈 앞에서 목격한 호석은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저, 정국아... 그만...! 그만...!!"
그 떨리는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정국은 호석의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물고 있던 원의 몸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이대로 얌전히 상황이 끝나길. 그냥 다 내버려두고 여기서 함께 도망치기를. 호석은 그렇게 간절히 바라보지만.
그것까지는 정국에게 닿지 않았던걸까. 정국은 혀를 빼문채 숨을 껄떡거리고 있는 늑대의 다리를 물고는 호석의 앞으로 질질 끌고오기 시작했다. 으스러진 다리에 온 체중이 실린 채 끌려오는 원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피거품을 내뿜으며 펄떡거리고, 질질 끌려오는 길마다 상처에서 흩뿌려진 피가 눅진한 길을 만들어냈다. 그 지옥도 같은 모습이 천천히 호석에게로 다가온다.
"....정, 국아...?"
마침내 정국은 바싹 얼어 벌벌 떨고 있는 호석의 앞에 축 늘어진 원의 몸을 풀썩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언제 그렇게 사나웠냐는 양, 앞다리와 뒷다리를 얌전히 그러모은 채 다소곳이 앉아 호석을 가만히 내려다 본다. 마치, 눈 앞의 부상 당한 원의 몸을 호석에게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처럼. 그러한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란다는 듯, 끄어웅 하는 어리광 섞인 울음소리마저 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호석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눈 앞의 이 시커먼 짐승이 자신이 알던 정국이 맞긴 한걸까. 정말로 그가 맞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쭉 이래왔던건 아닐까. 혹시 정국이 줄곧 가던 병원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그런 줄 알았다면 진작에 물어볼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스스로가 정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느껴졌다. 도대체 아까부터 말은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걸까. 마치, 정말로, 짐승이 되어버린 것 처럼...!
패닉에 빠져 옴짝달싹 못한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호석의 귀에 킬킬거리는 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물어 죽일거야. 너도, 정호석도."
땅으로 끌려들어가는 듯 중얼거리는 늑대의 얼굴을 검고 커다란 앞발이 과격하게 내리눌렀다. 방금 전까지 잠잠해졌던 정국의 성미가 다시 뻗치기 시작한 듯 경고의 진동음이 그의 목울대로부터 울려퍼지고, 제 몸 아래의 원을 향해 살벌하고 험악하고도 기운을 뿜어대기 시작한다. 원이 자신과 정국을 향해 뿜어댔던 살기를, 이제는 그가 원을 향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호석은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그 날 밤, 쏟아지던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유가 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국아...!"
"지금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꼭... 물어 뜯어 죽인다고. 알아들어?"
꺼흥, 하는 분노 섞인 외침과 함께 정국의 커다란 입이 늑대의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그대로 정국이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그 다음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그럴 수는 없었다. 호석은 공포로 바싹 얼어붙은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막아야만 했다.
"그래, 그거야. 그렇게 내 숨통을 끊어. 그런 다음은 어떻게 해야할까? 응? 지금 좀 어때? 잔뜩 화를 냈더니 배가 고프지 않아? 안그래? 날 네 눈 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 방법을 넌 알고 있지..."
미치광이가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것 같은 말들 속에서, 호석은 그가 지금 정국에게 무슨 짓을 하는 중인지, 또 아까부터 그가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는 호석을 협박하며 말하길, 모든 것을 걸고 정국의 인생을 망쳐놓을 것이라 했다. 그가 겪었던 일들을 정국에게도 겪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겪었던 것, 또한 그의 인생을 망쳐놓았던 것... 그것은 무엇일까. 그 모든 것들의 힌트는 그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에 들어있음을 호석은 상기했다.
'청소부'.
수인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자들을 부르는 별칭. 지금 원은 그 선 너머로 정국을 끌고 들어가려 하는 것이다. 망쳐버린 자신의 인생처럼, 정국의 인생도 그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발악을 하면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서까지.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집념과 증오심은 단순한 차원의 복수를 한참이나 넘어있었다. 그것 역시 선을 넘어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일 것일까. 아니면, 원 스스로가 본디 가지고 태어난 기질인 것일까.
물론 그것을 가늠하고 헤아릴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상황을 방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눈 앞의 맹수들의 살기에 짓눌려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는, 정국은 원의 도발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된다.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호석은 뻣뻣하게 굳은 스스로의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눈 앞의 늑대의 몸을 타고 올라섰다. 찐득한 피가 범벅이 된 털들을 헤치고, 고통에 찬 숨을 내뱉느라 들썩거리는 몸을 타고 올라, 마침내 그의 목 가까이로 다가가면. 콧잔등에 잔뜩 사나운 주름을 새기고 그 목울대에 칼을 겨누듯 이를 드러내고 있는 정국의 얼굴이 보인다. 이성을 잃은 두 눈은 코 앞까지 호석이 다가왔음에도 보이지도 않는 듯, 여전히 주문을 외우는 듯 중얼대는 원의 말에 청각을 집중한 채, 제 입 안의 늑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이대로 당장 숨통을 끊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듯 했다.
"안돼!! 정국아! 원이 말 듣지마!"
뭘 어떻게 해야 정국의 정신이 돌아올까. 그것을 알 수 없었던 호석이 되는대로 코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말을 알아 듣기는 할까. 분노로 흥분한 상태라 원의 도발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정국의 몸을 타고 올라가 귀에다 직접 소리를 치면 어떨까. 원의 목소리보다 제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 반응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정국의 까만 콧잔등과 이마를 타고 오르려는 때.
"으앗, 뜨거!!"
정국의 얼굴 위로 얹어둔 앞발과 뒷발이 데일듯이 뜨거워 호석은 그 몸으로부터 떨어지듯 펄쩍 뛰어내렸다. 온 몸이 불에 타고 있기라도 한 듯 엄청나게 뜨거웠다. 무언가 부작용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이것으로 정국의 현재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정신 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제 몸 위에서 당황한 채 갈팡질팡 하고 있는 다람쥐를 탁해진 눈동자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우원은 느닷없이 발작하듯 몸부림을 치고 고개를 돌리려 안간힘을 써댔다. 무언가를 씹고 싶은 듯 이빨을 딱딱 부딪혀가면서. 그 무언가는, 아마도 제 몸 위를 타고 있던 호석일 것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정국 역시 알아차린 듯, 커흥 하는 위협음과 함께 슬쩍 느슨해졌던 턱 관절을 다시금 목울대로 바짝 조였다.
"...그래, 전정구욱...! ㄴ느은 ...가 되는거야... 내,가 되어서... ㅍ... 평생, 피맛을 잊지 못한채... 짐ㅅ, 짐승으로서 살아...!"
그리고 그것은 원이 지금 가장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증오해 마지 않던 전정국이 살인자, 그리고 더 나아가 식인괴물이 되길 바라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고 싶어 원은 안달이 나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호석은 원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정국의 얼굴 가까이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크게 벌려진 입가를 잡아당겨 늘이곤, 대뜸 정국의 어금니과 원의 목덜미 사이로 자신의 머리를 쑤셔넣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부터 헉헉대며 뿜어져 나오는 습하고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혀 정신이 몽롱해 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전정국, 당장 그만둬...! 이, 이대로 입을 닫으면, 너는, 나, 나...! 나까지 죽일 셈이야?!! 정신, 좀, 차려!!!"
정국의 입 안에서 호석은 이판사판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몸의 내부에서 울려퍼진 그 목소리는 뼈를 타고 정국의 머리통 속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진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것일까, 바싹 조여있던 턱관절이 느슨해지며 의문을 담은 콧소리가 정국에게서 흘러나왔다.
"정호석, 이 하찮은 쥐새끼가...! 끝까지... 끝까지 훼방을...!!"
"정국아!! 정신 차리고 입을 벌려! 내 말 들어!!"
호석은 제 몸 밑으로 깔린 축축한 혓바닥을 앞발로 팡팡 내리치고 소리를 질러대며 어떻게 해서든 정국의 주위를 자신의 쪽으로 돌리려 애를 썼다. 입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꼬리는 호석의 행동에 따라 이리저리 번잡스럽게 팔랑거린다. 눈 앞에서 오락가락 거리는 그 털뭉치와 입 속에서 외쳐대는 고함이 신경쓰이기 시작한 것일까. 점차 입이 벌어지며 재규어의 머리가 늑대의 목덜미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원에게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죽일거야!!!!"
"안돼!!!!"
참지 못한 원이 발악을 하며 달려든 것과, 그것을 알아챈 호석이 정국의 혓바닥을 앞니로 콱 깨물어버린 것은 간발의 차이었다. 으아아악, 하는 지극히 사람다운 비명과 함께 앞발로 자신의 입을 가린 재규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가 몸부림을 치며 뒤로 나자빠졌다. 정국의 입가에 삐져나온 꼬리를 노리고 달려들던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은 허공에서 사납게 부딫히다가, 몸부림을 치는 정국의 굵은 꼬리에 세차게 얻어맞고는 바닥으로 힘없이 침몰하고 말았다.
정국이 원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을 확인한 호석은 빌빌 기다시피 그의 입으로부터 빠져나왔다. 마치 고온의 사우나 속에 오랫동안 있다가 나온 것처럼 몽롱하고 세상이 핑핑 도는 듯한 느낌. 그러나 그것보다도 정국이 걱정이 되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이리저리 살피고 있을 때,
"......ㅎ, 형..."
축 늘어진 채로 신음하듯 자신을 부르는 정국의 목소리에 호석은 뽀르르 그의 얼굴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살기를 풍겨대던 험악한 기운은 사라지고 푸욱 푸욱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으며 몽롱한 눈을 한 정국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정신은 되돌아 온 것 같긴한데, 열이 펄펄 들끓는 육체가 문제인 것 같았다.
"정국아...!"
"여기서, 빨리... 나가..."
헐떡거리며 듬성듬성 말하는 정국을 이곳에 남겨두고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지금의 정국을 끌고 나갈 수 있을만한 힘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형질로든, 인간의 몸으로든. 정국이 인간형으로 되돌아가면 부축이라도 해서 데려가겠지만 문제는,
"나... 몰라. 어떻게 하는지..."
그런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대답에 호석은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박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멀직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 창고 안에서 부상으로 헐떡거리고 있는 선우원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크르르르르... 늑대의 으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부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온 몸의 털이 오소소소 바싹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해온다.
한쪽 다리가 완전히 주저 앉은 채 세 발로 간신히 버티고 선 원이 이를 드러내고 정국과 호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 정국만 두고 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둘 다 이 모양으로 있는다고 딱히 승산이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차라리 인간형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부상 당한 늑대를 제압하는 편이 더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주변에 널부러진 물건들을 던지거나 하면서...
그런 생각으로 호석의 자그마한 머리 속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왜애애애애애앵-------!!!!!
창고의 바깥으로부터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차들이 멈춰서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정국이 뚫고 들어오느라 산산히 부서진 창문 밖으로 붉은색의 네온이 정신 없이 번쩍 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목소리와 발소리가 이 창고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경찰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파악한 듯, 원은 풀석 제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마치 앵무새처럼 '그놈들이 시킨거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라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대면서. 선우원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과 앞으로 스스로에게 다가올 미래를 예상하고는 그렇게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껏 스스로가 직면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채 늘 남의 탓만 해온 '비겁자' 다운 말로였다.
마침내 정국과 함께 이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게 됨에 안도하며, 호석은 헐떡거리는 정국의 콧잔등을 안심시키듯 토닥거리고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그 요란한 사건이 일어난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호석은 그 날의 일들을 떠올리자면 여전히 현기증이 돌았다. 선우원과의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의 일까지도 모두 머리 속을 들쑤시는 것 같았으니까. 창고로 들이닥쳤던 경찰들은, 호석의 바람이나 예상과는 달리 구조가 목적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날뛰는 수인을, 다시 말해 이성을 잃고 길에서 마구잡이로 내달리던 정국을 추적하고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쳤던 경찰들이었기에, 현장에 있던 인물들은 모두 불법을 자행하기 위해 모인 수인들이라 낙인 찍혀져 경찰서로 송치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부상을 심하게 당한 선우원과 열이 펄펄 들끓는 상태로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정국은 병원으로 호송되고, 정작 납치 피해자였던 호석만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오해들이 풀려가며 보호를 받는 신분으로 전환이 되긴 했지만. 하지만 소동물 형질자들을 가두기 위한 조그만 케이지에 갇혀 운반당하던 그 굴욕을 호석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추억이었지, 라며 웃으며 경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무쪼록 그러길 바란다.
선우원에 관해서는, 호석의 증언이 해당 지역의 불법 투기장에 대해 쫓고있던 형사과의 조사와 일치하는 것을 토대로 응급치료를 마치자마자 구치소로 수감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자행했던 일들이나 그 죄질이 무척 무거웠기에, 결코 가벼운 형량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견해였다. 그는 앞으로도 불법 투기장에 관련된 조직이나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추궁당하고 수사 받겠지만, 호석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떠올리거나 연관되기를 거부했다. 그에 관한 것이라면 마음의 상처로서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없었던 일, 그리고 없었던 사람으로 치부하고 싶고, 그 날의 일은 잊고 싶고, 또 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정국은.
"...왔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 앞에 네 발과 꼬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있던 검은 재규어가 다가와 호석에게 그 커다란 몸과 머리통을 이리저리 부벼댔다. 그 육중한 몸사위에 제 몸이 이리저리로 휩쓸려가는 탓에 호석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은 컨디션 좋아보이네? 어제까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니."
"...이제 좀, 네 발로 걷는게 덜 어색해진 것 같아."
정국은 아직도 형질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해 여전히 재규어인 모습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보통의 수인들은 성장과정에 있어 영유아기 무렵 수인으로서의 형질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고정형 형질을 지니고 자라난 정국에게 있어 이러한 갑작스러운 형질 발현은 모든 것들이 어색하고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때문에 열이 내리고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정국은 자꾸만 재규어의 몸으로 인간 같은 몸짓을 하려고 해, 병문안을 온 호석을 이상한 포즈로 맞이하곤 했다. 자꾸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려고 한다던가, 앉을 때도 엉덩이만 의자에 댄 채 테이블에 앞발을 걸치고 있다던가, 누울 땐 꼭 하늘을 보고 배를 드러낸 채 앞발을 양옆으로 내린다던가.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이 몸을 다루는게 힘든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정국이 웃기고 귀여워서, 그 모습들을 잔뜩 찍어대느라 호석의 핸드폰 용량은 이미 가득 차버렸다.
사건 당일, 경찰들이 정국을 쫓아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해당 사건들에 관해선 여러가지 이유들에 의해 불기소 처리로 결론 내려졌다. 납치 당한 호석을 구하기 위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점, 지금까지의 병원 기록들로 인해 모든 행동들이 때늦은 형질 발현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이성을 되찾은 지금은 형질을 다룰 줄 몰라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
병원의 형광등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는 정국의 몸은, 정확하게는 온 몸이 아예 다 새카만 것은 아니었다. 농도가 짙긴 하지만 재규어 특유의 얼룩 모양 반점이 꽃처럼 아로새겨져 있어, 그것을 들여다보고 쓰다듬는 것이 호석은 좋았다. 윤기나는 털의 감촉이 좋아서, 모양이 예뻐서, 정국이 푸르륵대는게 좋아서, 그런 모든 이유가 있지만 사실은... 그냥 새카맣게만 보이던 그 날의 사나운 짐승과, 지금 제 눈 앞에서 얼룩한 모양을 들이대며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정국이 전혀 다른 객체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날의 정국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분노와 살기가 전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호석의 깊은 마음 속에는 그가 우발적으로라도 선우원이 걸었던 길에 발을 들일 것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그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 조금 자의식과잉 같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말이다.
"...형."
멍하니 털을 쓰다듬고 있던 호석은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퍼뜩 되돌아보자, 걱정이 가득찬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정국의 얼굴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형질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땐 거의 무표정하던 정국의 얼굴은 재규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 훨씬 다양한 표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 절대로 형이 걱정하는 그런 쪽으로... 그런거 안할거니까 걱정하지마. 그것보다..."
자신의 얼굴은 그렇게나 쉽게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 만큼이나 정국도 제 감정을 잘 파악하는걸까. 호석은 정국의 그 말에 어쩐지 조금 쑥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보다?"
".......내가 혹시, ...에이, 아니다."
말을 하다말고 축 처지듯 몸을 돌려눕는 정국이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하다마느냐며 옆구리를 박박 긁고 쫑긋대는 귀를 얌얌 물어대는 호석의 장난이 간지럽고 견딜 수가 없는지, 굵고 두터운 꼬리가 팡팡 침대를 두들겨대고 귀를 이리저리 파닥거렸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 그 얼굴에 역력하면서도, 또 호석이 제 몸 이곳 저곳을 만지는 것은 또 좋아죽겠는 모양이다. 이렇게나 알기 쉬운 사람이었던가. 호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올랐다.
"...내가 만약에, 진짜 만약에... 계속 형질 숨기는거 실패하고 이 모습으로 그냥 고정되어서 평생 되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래도 형은 나 사, 사ㄹ, ........사귈거야?"
정국의 그 말에 잠깐 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찾아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면 무척 곤란하다거나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을 같이 찾아주겠다거나, 그런 현실적인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호석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꾹 참았다. 왠만큼 고민을 해서는 정국이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낼 리가 없으니, 괜한 대답으로 그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내 병원에서 형질을 다루는 것이 맘대로 잘 안되니,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게 제법... 두근거리기도 했고.
대신에, 그 쓸데없이 고민 많은 그 입가에 가만히 입술을 맞대었다.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 입맞춤을 하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고 하던데. 아니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호석에게 놀란 눈으로 무언가 뻐끔뻐끔 거리던 정국은,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푸르륵 대다가 제 곁에 앉은 호석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여기저기 치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몸짓에 밀려 호석의 몸은 또 다시 이리 저리로 힘겹게 떠밀리며 흔들거리고 만다.
그 힘겨운 몸짓에 치이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해서, 호석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며칠 후, 정국은 멀쩡하니 형질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여전히 후각, 청각 세포가 고정형으로 남아있는 것은 변함 없었지만, 이제는 제법 원할 때 형질을 드러내거나 숨기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것이 좋은 일이 될 지,
나쁜 일이 될지.
두 사람은 아직 알지 못한다.
-완결-
2022.05.29.
이래저래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까지 스토리의 분기점을 선택해, 이야기를 이끌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곧 후기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5편의 선택지에 대한 간략한 해설]
A. 분노가 차오른다. 자신의 안에서 깨어난 본능이 이끄는 감각을 따라 호석과 습격자를 추적한다. → 이 이야기의 결말
B. 차갑게 냉정해진다. 호석을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선 냉정하고 계획적으로 추적해야 한다. → 정국이 분노로 본능에 매몰되지 않은 채, 창고에 도착한 후 형질 발현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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