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그 날, 호석은 자주 같이 놀던 친구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 나 요즘 원이랑 놀기 싫어. 걔 진짜 이상한거 알아?
- 어? 왜?
- 놀이터에서 우리 다같이 놀 때, 걔 맨날 정국이 괴롭히잖아. 너 없을 때만 골라서.
- 뭐?!
호석은 제 귀를 의심했다. 다같이 있을 땐 멀쩡하니 잘 어울려 놀던 동네 친구들이었다. 그런 원이 정국을 왜 괴롭힌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어 되묻는 호석에게, 친구는 정국이가 너한테 말도 안했느냐며 되려 반문하고는 더더욱 그가 모르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그냥 짖궂은 농담인 척 정국을 비웃었다. 말이 더디다거나, 체구가 작다거나, 울보라거나. 원래 좀 짖궂은 부분이 있는 원이었기에, 그 때는 친구들도 그것을 그냥 웃고 넘겼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금 더 지나고부터는 반응을 관찰하는 것처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다가 한 대 치거나, 공을 던져서 맞춘다거나. 그리고 그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비웃고 놀려댐으로서 아이들 사이에서 정국을 무시하는 것을 일종의 놀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자기가 손을 대는 것도 모자라 다른 친구들에게 억지로 정국을 괴롭히게 만들고,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친구를 대신 때린다던가 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간다는데.
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들은 요즘 뿔뿔히 쪼개져 자기들끼리 모여서 논다던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 친구도 호석에게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호석을 꼬드겨 자기들이 노는 무리 쪽으로 합류시키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냈던 것인데. 그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던 호석만 충격을 받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친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호석은 일부러 정국만 원이와 다른 친구들이 있는 곳에 남겨두고 놀이터에서 빠져나와 몸을 숨기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고, 특히 원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왜 이유도 없이 정국을 괴롭힌단 말인가.
그리고, 그러한 호석의 믿음은 보기 좋게 배신 당했다. 제가 몸을 숨기고 지켜본지 5분도 안되어서.
더 보고 있기도 힘들었던 호석은 곧장 뛰쳐나와 원을 비롯한 덩치 큰 아이들 틈바구니에 끼어있던 정국의 손을 붙잡아 끌고 나왔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원의 다급하고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애들을 불러놓고 대장 놀이를 하며 자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애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것이 역겹고 꼴보기 싫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짓을 다른 애들에게까지 돌려가며 시키는 잔인함에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일부러 자신이 없는 때만 골라서 괴롭혔다는 사실에 배신감으로 치가 떨렸다. 그런게 제 소꿉친구라니. 화가 부글부글 솟구쳐 손발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었다. 말도 섞고 싶지 않고,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나 싫어졌다.
그 날 이후 호석은 철저하게 원을 무시했다. 마치 없는 사람인 것 처럼.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한 원은 교실에서 다짜고짜 호석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쳤다. 왜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네가 뭔데 나를 무시하냐며. 그렇게 울분에 차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호석도 가만히 받아주지 않았다.
- 네가 정국이 괴롭히고 다녔잖아! 나쁜 새끼...! 너랑 이제 안놀거야!
- 고작 그런걸로...! 언제는..., 언제는 내 편이라고 해놓고...! 나랑 짝꿍이라고 하더니!! 정호석, 이 배신자!
- 네가 나쁜짓 했으면서 왜 나보고 배신자래?! 그리고 애들 괴롭히는게 너한텐 '고작 그런거'야?! 나 네 편 안해! 너랑 안놀아! 나한테 말시키지 마!! 너 꼴도 보기 싫어!!! 너 싫어!!!
호석의 말에 원은 적잖히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씨근덕대더니, 이내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엉엉 울면서도 입으로는 계속해서 배신자, 배신자 새끼, 아는 말이 그것 뿐인 것처럼 되뇌이며 호석을 저주해댔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호석은 제 자리로 돌아가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떼를 쓰듯 징징거리는 원을 외면했다. 마지막까지 사과도 반성도 않는 원에게 남아있던 정나미도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날 원은 내내 울어댔다. 수업시간에도 엎드러져 훌쩍거려서 담임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으나, 대답은 않고 계속 울기만 했다. 결국 상황을 지켜본 반 아이들이 호석과 원이 싸웠다는 것을 말했고, 담임은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그랬느냐며 둘을 다그쳤다. 그러나 정작,
- 원이가 애들 때리고 괴롭히고 다녔어요. 그래서 저랑 싸웠어요.
라는 호석의 대답에 담임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다가 '그렇지, 애들을 괴롭히면 안되지.' 라는 말을 흘리고는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 수업을 시작해버렸다. 그리고 한 교시가 끝날 때까지도 울음을 멈추지 않던 원을 데리고 나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날 이후로 원은 굉장히 어두워지고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아이들과 말도 하지 않았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학교에 오기가 싫은 듯 자주 결석하거나 지각을 했고, 왔다가도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조퇴를 하거나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 동안이나.
그쯤되자 호석은 그런 원에게 조금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제가 너무 말을 심하게 한걸까 싶어서. 그러다가도 원이 정국에게 하던 것을 떠올리면 먼저 다가가 달래줄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다만, 저렇게까지 울고 시무룩한 것을 보면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 역시 들었다. 그러니 호석은 원이 먼저 다가와 정국이던 누구에게던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괴롭히고 함부로 하지 않겠다, 정국에게 사과하겠다, 그렇게만 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놀 마음이 있었다. 그냥 그것 뿐이면 되었다.
그러나 호석의 그러한 바람보다 먼저, 원은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담임의 말로는 집안 사정 때문이라 하였지만, 과연 그것 뿐이었을까. 원의 등교 거부가 더 큰 원인일 것이라 짐작을 하면서도, 호석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기로 하였다. 그것 말고도 호석에게는 재밌고 즐거운 일들이 많았다. 같이 놀 친구들도 많았다.
기억은 시간에 의해 풍화되기 마련이다.
호석의 원에 대한 기억 역시 점점 마모되어, 그와 싸웠던 나쁜 기억보다는 그보다 더 어릴적 함께 놀았던 즐거운 추억이나 어쩐지 안타깝고 미안했던 감정의 흔적만 남았다.
호석이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한 원의 '잘 지내?' 라는 짧은 문자에 스스럼 없이 반가워하며 답장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기억의 풍화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편리하고,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원이 학교에서 그 난동을 부리고 사라진 이후, 호석은 이상한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원이 보였던 행동이 초등학교 시절 있었던 일과 오버랩 되며, 그의 집착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의 원인이 마치 어린 시절 제가 했던 말들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쩐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도대체 전학간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일전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말했던 이야기들과 유년시절의 마지막 기억들을 연결해 생각해보면, 자신과 사이가 틀어져 잔뜩 의기소침해 있던 그는 전학을 간 곳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어 있었기에, 또 다시 그곳에서도 일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호승심과 자존심이 강한 원이었다. 그런 그가 계속해서 그러한 좌절을 겪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을까. 그가 이야기한 바로는 주변 인물들과 계속해서 충돌이 있었음은 확실했다. 특히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더더욱.
분명 이곳으로 다시 이사오기 전,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고 원은 말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원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호석은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SNS와 대형 커뮤니티 등지를 돌며 원이 있던 동네와 학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1, 2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중점적으로. 그러던 중, 특정 키워드가 묘하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투기장.
불법 도박 같은 것을 행하는 하우스 같은 곳을 말하는 것일까. 궁금함에 조금 더 연관 검색어를 뒤져보다가, 그것이 정확하게는 '이종 격투 투기장' 을 일컫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종 격투' 는 '다른 무술이나 격투술을 겨루는 스포츠' 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종족, 다시 말해 형질을 발현시킨 수인들, 또는 그러한 수인과 인간이 싸우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즉, 불법 싸움판이라는 소리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인이 고의적으로 형질을 발현해 타인을 공격하거나 싸우는 것은 중범죄 중 하나이다. 혈기왕성한 청소년기라도 만약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즉각 퇴학 처분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속 당해 법정에 서게 될 정도로 사안이 중대하고 무거운 범죄인데, 그것을 버젓이 행하고 있는 곳이 있다니. 심지어 돈까지 걸어가면서.
그러나 그러한 음성적인 곳일수록 수면 밑에서는 오히려 호황인듯, 암호화 된 정보들을 가지고 베팅을 걸라는 광고라던가, 또는 새로운 선수를 모집한다는 글들이 성인 사이트 등지에서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그 투기장 중 하나가 원이 살던 곳 부근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당 지역은 요 근래 몇 년 사이 치안이 무척 나빠졌다는 평판이다.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늘어나 일반 학생이나 시민들을 위협하고 다니는 일들이 빈번한데다, 학교들 간에 크고 작은 항쟁 같은 것도 간간히 벌어지는 바람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불만, 또는 탄식의 소리가 인터넷에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와중 싸움질을 하며 생긴 무용담을 커뮤니티나 SNS에 올리는 멍청한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의 계정이나 글들을 따라가다가 얻게된 정보들 중, 호석은 그들이 어떠한 공통적인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변 지인들, 또는 계정 주인 본인의 행방불명. 비행 청소년들이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일들이 비일비재 한걸까. 가출을 한다거나, 또는 돈을 벌러 간다며 자랑을 하고는 돌아오지 않는 일들이 그렇게나 흔한걸까.
그리고 묘하게도, '투기장' 과 '행방불명'. 그 두가지 키워드를 이어주는 듯한 도시전설이 마치 유행하는 무서운 이야기인 양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처에 있는 투기장은 혈기왕성한 미성년자들도 종족 무차별 격투 선수로서 받아 경기에 내보내고 그것으로 큰 배팅을 걸기도 하는데, 그것을 노리고 출전을 했던 미성년자가 불운한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거나 심한 경우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주최측은 그것을 숨기고 무마시키기 위해, 그러한 부상자 또는 사망자의 신체를 '육식 동물' 의 형질을 가진, 소위 '청소부' 라 불리우는 수인들에게 처리하도록 하는데. 그 '처리 방법' 이 어떠한지는... 읽는 이들의 상상하는 바와 같다, 라는 골자의 도시전설이었다.
더 나아가 이 이야기의 화룡점정은, 이것의 원글은 어느샌가 삭제되었고 해당 유저의 글은 이것을 끝으로 더 이상 커뮤니티에 올라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퍼지고 있는 글들은 모두 복사본, 또는 화면 캡쳐일 뿐이라는 끝맺음은 '그렇다면 원글을 쓴 작성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으스스한 의문으로 귀결되는데.
에이, 설마.
호석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아무리 원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보이긴 했어도, 이러한 끔찍한 범죄와 연관이 되어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와 자신에게 집착하는 태도 사이에도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이것저것 검색을 하며 돌아다니다보니, 필요 이상의 정보에 휩쓸려 당치도 않는 것을 본 것 같아 호석은 괜히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답답한 기운을 환기시키려 호석은 제 방의 창문을 열어 젖혔다. 훅 하고 밀려드는 여름날의 뜨끈한 저녁 공기. 그것이 어쩐지 한기가 느껴지던 몸을 덥혀주는 듯 기분이 좋았다. 선선하니 부는 바람에 실린 여름 냄새도 좋았다. 좋지 않은 내용의 글들을 읽고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나아지며 서서히 현실로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조용하고, 평온하고, 익숙한, 제가 나고 자란 이 곳. 그리고 이 곳에는...
- 드르륵,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맞은 편 집의 창문이 열리고. 그 방의 주인인 정국이 창문 너머로 호석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호석은 창틀에 턱을 괴고 그런 정국을 말 없이 응시했다.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정국은 제가 이렇게 창문을 열 때면 마찬가지로 창문을 마주 열어왔던 적이 많았다. 지금까지는 제 방 창문을 여는 소리가 제법 커서 알아차렸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마도 창문을 여는 소리는, 제 생각만큼 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국이기에 '들을 수 있었던 소리' 였을지도.
생각에 잠긴 채 빤히 바라다보는 호석의 시선을 잠시간 마주쳐오던 정국은 그것이 민망해서였을까, 이내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마도 탁상 스탠드의 것으로 보이는 은은한 불빛이 그런 정국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비춰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호석은 저도 모르게 탄식과도 닮은 작은 감탄의 호흡을 내뱉었다.
어느 날 제 앞에 나타난 이상한 꼬맹이. 어느새 부쩍 자라 부드러우면서도 남자다운 선과 유려하게 쭉 뻗은 골격을 가진, 신비한 남자아이가 되어있었다.
"...정국이, 잘생겼네."
감상하듯 정국을 바라보며 호석은 혼자서 읊조리듯 그렇게 말했다. 그 때, 책장을 넘기던 정국의 손이 멈칫하고 멈추고. 곧 민망한 듯 뒷목을 긁으며 흘긋 제 쪽을 바라보는 정국은, 정말로 작게 중얼거린 그 말을 듣고 반응하는 것처럼 꼭 그랬다. 이 작은 목소리가 저기서 들리는걸까. 원과 정국이 복도에서 다퉜던 그 때, 정국이 했던 그 말이 오늘따라 유독 신경이 쓰였다. 선천적으로 귀가 좋다는게 진짜인지. 그렇다면 얼마나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건지.
"정국아."
정말로, 이 목소리가 들려?
"놀이터에 같이 산책 나갈래?"
입을 가린 채 더욱 작게 혼자 소근거리듯 그렇게 말하자. 창문 너머로 빤히 저를 바라다보던 정국은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아들고는 창문을 닫아버렸다. 잠시 후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면, 방 밖으로 아예 나가버린 듯한데. 이렇게 작은 소리까지는 듣지 못한걸까. 아니면 그 때 그 말은 그냥 원이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허풍으로 내뱉은 말이었을까. 어딘가 조금 아쉬운 기분에 불 꺼진 방의 창문을 바라보며 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 ♬♩♪
느닷없이 울린 제 핸드폰 알림 소리에 호석은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자리에서 작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 ㅇㅇ 3분 뒤에 집 앞에서 봐
정국으로부터 도착한 그 문자. 호석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이었구나. 정말로 그 때 했던 그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구나.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언뜻언뜻 위화감이나 의문을 느꼈던 때가 여러번 있었던 기억이다. 다만 그 대상이 정국이기에 그것을 나름의 이유로 생각하고 납득을 하고 넘어갔기에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이쯤되면 자신은 길에 굴러다닌 굼뱅이보다도 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호석은 생각했다.
문자대로 집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말도 없이 놀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네에 걸터앉았다.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좋을까 우물쭈물하며 앞뒤로 흔들거리는 호석과는 달리, 정국은 있는 힘껏 발을 굴러 크게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라도 뚫고 올라갈 기세로 그네를 타는 정국의 그 모습이 자못 천진해 보인다고 호석은 생각했다.
"...원래부터 귀가 좋았어?"
"응."
그렇구나... 그렇게 흘리듯 중얼거리며 호석은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그렇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더 파고 들기 애매하다 싶었다. 궁금하긴 한데, 그것이 혹여 정국의 상처이거나 혹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일까 싶어 조심스러운 마음이 더 큰 것이다. 유독 정국에게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 원에게 괴롭힘 당하던 어린 시절에 대해서나, 어릴 때부터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나,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청각능력에 대해서나. 그가 곤란해 하거나 난감해하는 것에 대해 억지로 캐묻고 싶지 않았다. 또는, 그의 입에서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까봐 두려운 것도 있었다. 그러니 굳이 캐묻지 않아도, 그리고 잘 이해할 순 없어도, 정국이 그렇다면 그러려니 생각하고 통째로 삼키듯 받아들이는 것이 호석에게는 익숙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조심스러운 마음은 어디서부터 오는걸까. 정국을 유독 아끼는 마음과 배려일까. 과연 그게 다일까. 그리고 지금도 그에게 그러한 배려를 하는 것이 옳은걸까. 이게 배려가 맞기는 한걸까. ...원도 그렇고, 정국도 그렇고, 호석은 태어나서 요즘처럼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작게 앞뒤로 흔들리고만 있을 때. 정국은 있는 힘껏 그네를 박차고 올랐다가, 가장 높은 곳에서 펄쩍 뛰어올라 저 멀리에 가뿐한 몸놀림으로 착지했다. 그 모습은 마치 숙련된 체조선수나, 또는 날렵한 야생 동물처럼도 보여서. 호석은 제가 본 것을 재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듯 눈을 깜박였다. 뛰어올라 착지할 때까지의 그 몸놀림에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고, 몸의 탄성은 마치 용수철로 되어있기라도 한 듯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이었다.
얘가 이렇게나 운동신경이 좋았던가. 호석은 정글짐 꼭대기에서 삐약삐약 울어대던 어린 시절의 정국과 지금 눈 앞의 정국 사이에서 묘한 간극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집 앞에서 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밖으로 나와 저를 비호하고 막아서던 정국에게 느꼈던 낯설음과도 무척 닮아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긴 호석의 앞으로 정국이 다가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어딘가, 낯설은 오늘.
"...형은 다정한데, 차갑게 다정해."
"...무슨 말이야?"
"가끔... 형은 나한테 관심이 없는건가, 그래서 나한테 궁금한게 아무것도 없는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쩐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콕 찝는 것 같은 정국의 말에 호석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추러트렸다. 그런게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네. 올려다보는 정국의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불만과 불안과 기대를 모두 떠안고 있는 것처럼.
"그런거 아니야... 그냥..."
"그냥?"
"네가 말하고 싶지 않거나 곤란해 할 걸 물어보고 싶지 않아. 너가 그걸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나한테 너는 있는 그대로 너니까."
흫. 일순 숨을 들이키는 듯, 숨을 참는 듯, 그런 상반된 행위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정국에게서 들려왔다. 올려다보는 호석의 시선을 빤히 마주 바라보고 있는 정국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유독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두 눈. 어쩔 줄 모르는 듯 허공을 이리저리 방황하던 정국의 두 손이, 호석이 앉은 그네의 줄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형이 좋아."
"...고마워...?"
제가 한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느닷없는 정국의 말이 자신의 답변에 대한 칭찬인 것인지 아니면 쑥쓰러움을 감추기 위한 농담 섞인 대꾸인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멀거니 그렇게 대답하는 호석을 내려다보는 정국의 표정은, 그러나 사뭇 진지해서.
"형한테 내가 대답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기 곤란한 건 없어. 그러니까..."
"응..."
"나를 보듬지만 말고... 형이 나를 궁금해해줬으면 좋겠어. 나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아주 많았으면 좋겠어. 나한테 바라는 것도, 그리고 해달라는 것도 많았으면 좋겠어. 나는 형이 바라면 뭐든지... 다 대답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어. 내가... 형한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호석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말은 꽤나 묘하게 들린다. 친구나 선후배, 또는 친한 형동생 사이에 바라는 것이라기엔 어딘가 조금 다른, 묘한 간질거림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랑이는 봄꽃으로 마음을 간지르는 듯, 연분홍빛 쑥스러움을 담고 있기에.
문득, '형이면 다 좋아' 라고 했던 정국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의 두근거림이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도.
더 이상 정국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호석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그 얼굴에 짙게 베인 마음이 제게로 봄비처럼 밭게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 얼굴의 홍조가 제게로 옮을 것 같았다. 이제껏 알지도 못했던 마음이 움을 틔우고 단숨에 아름드리 만큼이나 자라나버릴 것 같았다. 너의 말에 담긴 그 마음의 뜻은 뭐야? 내가 생각하는게 정말 맞아? 제 머리 속을 가득 차지한 그 궁금증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일렁이며 홧홧한 열이 오르게 만든다.
이렇게나 더운 여름인데,
네게선 쑥스러운 봄향기가 느껴진다.
"...좋아해, 호석이 형."
간결하고 정직한 말.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그 말이 숙여진 호석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심장이 떨어져 내린 그 마음의 무게를 얹은 채 위 아래로 왈칵 왈칵 튀어오르는 것 같았다. 쿵쿵쿵쿵 방망이질 치는 그 소리가 제 귀에 시끄러웠다. 이렇게나 시끄러운데, 아주 작은 소리조차 다 들리는 정국의 귀에는 이것이 얼마나 크게 느껴질까. 저도 몰랐던 제 마음을 이것으로 다 들켜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바보같은 심장은 더욱 요란하게 박동한다. 그것이 부끄러웠다.
눈 앞에 보이던 정국의 다리가 천천히 구부러지고. 이내 쭈그려 앉은 자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정국의 모습이 시선 속으로 한가득 들어찬다. 그넷줄을 붙잡고 있던 손은 호석의 무릎 위로 내려와 마치 애원이라도 하듯 가만히 얹혀있으면서도, 정직한 두 눈은 형형한 확신을 가지고 첫사랑의 마음을 제게로 옭아묶는다. 모르긴 몰라도 저 두 눈에 비치는 제 얼굴은 분명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호석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런 생각을 했다.
"형도 나랑 같은 마음일까?"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무척 젠틀하게도, 동시에 짖궂게도 느껴지는 말이다. 자신의 의사를 확인하는 듯한 그 친절한 의문문에는,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확실한 답변을 끌어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섞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정국의 발간, 그러나 긴장으로 조금 굳어있는 표정. 평소에는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인지, 어떠한 감정인지 쉽게 알 수 있었던 그 무표정함이 오늘따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처럼 알쏭달쏭하고, 또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렇기에, 응... 하고 작게 대답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무엇에 대해 대답을 했는지조차 모를 정도이다.
다만, 그 대답이 자신과 정국 사이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끈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호석은 자신의 무릎 위에 얹혀진 정국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듯 얹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순간, 움찔하고 떨리던 그 손은, 이내 얹혀진 호석의 두 손을 마주 잡아왔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며 맞닿는 살과, 손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엄지손가락의 감촉과, 깊고 출렁이는 감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검고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쑥스럽고 간지러워서.
호석은 허리를 숙여 천천히 정국에게로 다가간다. 정국의 두 눈은, 놀라움으로 잠시 크게 뜨여졌다가 곧 제게 내려질 확연한 답변을 기대감과 함께 영접하듯 살풋이 감기고. 그것을 마주하며 다가가는 호석은 마치 거울이 그러하듯,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꽃잎을 마주대듯 맞붙은 두 입술의 감촉은.
열대야 하늘에 피어오른 불꽃보다도 벅차고,
장맛비 속에 흐드러진 수국들보다도 설레이며,
한여름 정오의 작열하는 태양보다도 홧홧한,
두 사람의 첫키스였다.
패스트푸드 점의 의자에 기대어 앉은 정국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옮겨다닌다. 사람들이 오가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진 다 먹은 음식 포장지를 바라보다가, 호석이 잠시 다녀오겠노라며 사라진 화장실 방향을 쳐다보다가.
그 어수선하고 안정되지 못한 시선의 이유는, 자신이 지금 백일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이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고백이 받아들여진 사흘 전 그 밤 이후, 계속해서 현실 감각이 사라지고 어딘가 붕붕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호석과 함께 영화를 보고 패스트푸드로 저녁을 먹은 오늘. 청소년들의 정석적인 첫 데이트와도 같은 그것은, 그렇기에 오히려 제 머리 속에서 멋대로 빚어낸 낸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국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행복한 현실 부적응으로 인해 정국의 뺨은 일주일 전부터 무척 혹사 당하고 있었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스스로 무던히 꼬집어도 보고 때려도 봤으니까.
그런 풋풋한 청춘 영화 같은 연애 생활의 시작과 병행하여, 정국은 호석의 발정기가 언제인지 도무지 신경이 쓰여 좌불안석이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한창 호르몬 분비가 활발한 청소년기 남자아이가 자신의 연인을 평생의 반려로 삼고 싶어하는 본능에 가까운 호기심 때문이라기 보다는 (물론 그런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정국의 머리 속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 할 수 없는 파랗고 노랗고 핑크빛인 상상들이 야무지게 들어찬 상태이다.), 자신의 일반적이지 못한 신체 특성과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원과의 악연에 대한 경계심에 의한 것이었다.
지난 번, 자신의 정수리를 노린 화분이 옥상에서 떨어져 내린 일 이후로, 정국은 의사가 자신에게 처방 내린 약을 제멋대로 중단해버렸다. 본래 의사가 처방한 약의 용도는 정국이 특정 인물의 -정확하게는 연애 감정을 품고 있는 대상 수인의- 페로몬에 과도하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그 때문에 덩달아 후각도 둔화되어 버리는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그것으로 인해 태어나서 지금껏 청각과 후각을 모두 사용하여 주변을 인지하던 정국은, 후각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대신 청각에 예민하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국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약을 복용하기 이전에 비교하여 주변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 3분의 2 정도로 둔화되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환경에 비해 과분히 넘치기만 한 능력이니까. 다만, 제 머리통을 으깨고 싶어하는 살의를 가진 인물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때의 화분 사건으로 정국은 원이 반드시 제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딴 식으로 또 다시 제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했다간, 어릴 때 멋모르고 얻어 맞았던 것과 얼마 전 일부러 맞아준 것에 더해 두 번 다시 호석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도록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아주 죽사발을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주변 근방에 원의 냄새가 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정국은 반드시 약을 끊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원과의 일이 정리되기도 전에 호석의 발정기가 먼저 찾아와 버린다거나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
"이제 갈까? 방금 엄마한테서 문자 왔어."
때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호석의 말에 정국은 얼레벌레 생각을 얼버무리며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 역시 집으로부터 언제 들어오냐는 문자를 여럿 받았었다. 그것을 '밥 먹고 들어갈게', '조금만 더 있다가', '이따가' 라는 답변으로 계속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랬던 것이 호석의 '집에 가자'는 한마디에는 단박에 의자에 붙었던 엉덩이를 뗄 마음이 생긴다. 마치 회피하거나 늦출 수 없는 절대적인 주문처럼.
함께 걷는 밤길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늘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첫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이 함께 보고 느꼈던 것을 공유하며 같은 길을 같은 마음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도 호석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껴서 함께 놀은 후 이렇게 같이 집에 돌아온 적은 많았지만, 그 때와는 다른 상큼하면서도 간질거리는 무언가가 둘 사이의 공기로서 자리메김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은근슬쩍 옆으로 바짝 붙어 걸으면 맞닿는 손등의 감촉이라던가. 그것을 느끼곤 작게 베시시 웃음이 피어오르는 호석의 얼굴이라던가. 그것에 대뜸 손깍지를 걸어 잠그고는 후훟 하고 콧망울을 울리며 웃어버리는 정국 자신이라던가.
그렇게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집 근처의 익숙한 놀이터를 지나려던 참이었다.
정국은 문득 제 코에 걸리는 낯선 냄새에 발걸음을 멈췄다. 약간 달콤한 듯 하면서도 화학 약품의 쎄하고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냄새. 이제껏 맡아본 적이 전혀 없던 냄새였다.
"...? 왜 그래?"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정국에게 의문을 느낀 호석이 몸을 돌려 바라볼 때. 정국은 어딘가 자신의 신경이 무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미하게나마 왠지 현기증이 나는 것도 같고, 호석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 역시 조금 분산되어 보이는 듯, 그런 이상한 감각이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 냄새는 마취제로부터 나는 냄새라는 것을. 그것이, 이 근방 어딘가에 있다.
정국은 하압, 하고 숨을 한껏 들이킨 채 자신이 코를 막았다. 그리고 붙잡은 호석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어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 벗어났어야만 했다.
"저기요."
낯선 음성. 기억에 없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고. 그 부름에 자연히 발걸음을 늦춘 호석의 몸이 목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돌아가며, 정국의 움직임 역시 일순 움찔하며 멎은 그 때.
꽈직-,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어디로부턴가 튀어나온 주먹이 정국의 턱을 강타하며 목이 꺽여 돌아가는 소리이다. 마취제를 공기 중으로 흡입해 움직임이 다소 둔해진 무방비한 상태로, 턱 끝을 세게 얻어맞은 정국의 두개골 속의 뇌는 일순 덜컹하고 크게 흔들린다. 가벼운 뇌진탕 증세. 균형감각과 운동신경을 잃은 정국의 육체가, 풀썩, 실이 끊어진 인형 마냥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야 만다.
무슨 일이 벌어진건가.
일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내 삐이이이----, 하는 이명이 고막을 찔러대며, 눈 앞은 핑글 핑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감각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정국은 그제서야 자신이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제 몸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정ㄱ....아악!!!!!"
바닥을 짚은 채 어떻게든 제 몸을 움직이게 하려 필사적인 정국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던 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타다다닥 파지지직!!' 하는 끔찍한 전류의 방출음과 함께 짧은 비명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무언가에 틀어 막힌 듯 읍읍거리는 신음소리로 변질되었고. 결국 조용해지고 말았다. 어른거리는 시야 속으로 간신히 보이는 호석의 발은 어지럽게 발버둥을 치다가 그 역시 힘을 잃고 축 늘어지고 만다. 자신이 맡았던 그 불길한 냄새의 원인이 호석에게 쓰여진 것이 틀림 없었다.
"혀...ㅇ"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어떻게든 제 몸을 움직여 호석을 보호해야 했다. 눈 뒤쪽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온 몸에서 증기라도 뿜어져 나오는 듯 뜨거웠다. 헐떡거리는 호흡과 함께 자신의 손끝, 발끝, 말초신경에 힘을 불어넣는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 때, 코 끝으로 익숙한, 그러나 달갑지 않은 체향이 제게로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웅웅거리는 귓가에 탁탁탁탁, 골목 끝에서부터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그것이 제게로 완전히 가까워지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정국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문제의 머리가 제대로 제 육체를 기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뿐. 끄으으으, 이를 악물고,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서서히 무릎 관절을 펴 제 몸을 일으키려 하던 그 때.
"전정국... 이 지긋지긋한 새끼야...!!!"
누군가, 그러나 그 정체가 확연한 어떠한 이의 무자비한 발차기가 정국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꽂히며.
정국은 의식은 까만 어둠 속으로
허무하게 꺼져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스토리 전개에 관한 투표
이후 스토리의 분기점이 되는 내용입니다. 신중한 선택 부탁드립니다...!
정신을 되찾은 정국은...
A. 분노가 차오른다. 자신의 감정에 몸을 내맡기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
B. 차갑게 냉정해진다. 호석을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선 냉정하고 계획적으로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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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선택지에 대한 간략한 해설]
A. 정국이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 원에 대한 설정 생략, 정국에 대해 알아보는 호석 루트
B. 이대로 끝날 원이 아니다. 전학간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를 해봐야겠다. → 현재 진행 중
다음 편 완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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