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결국 나는 변한 것 하나 없이 또 그에게 차이고 말았다. 심지어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망가졌구나 싶을 정도로. 그 뒤에 내가 할 일이라면, 찢어진 상처를 알코올로 소독하듯 술을 퍼마시는 일 뿐이다.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마음이 위장 속에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 아픔 좀 씻어 보겠다고 짬만 나면 술을 들이켰다. 그냥 세상이 다 끝난 것 마냥 며칠을 계속 그랬다.
- 나올 수 있어?
어느 주말 숙취로 속을 다 게워낸 후, 그의 문자를 보기 전까지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커피숍으로 향하면서도 생각은 비틀거리듯 양극단을 오락가락 한다. 그렇게나 그에게 상처를 줘놓고 무슨 염치가 있어서. 그렇게나 그에게서 상처를 받아놓고 또 얼마나 더 고생을 하려고. 더 이상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조용히 혼자서 마음이 사그라질 때를 기다리던 예전 같은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한참이나 고민했던 것도,
"어휴, 술냄새."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울먹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민망스러운 웃음과 함께 그런 말을 건네는 그의 앞에 싸그리 사라져 버린다. 술을 아무리 퍼마셔도 잊혀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던 생각들이 그의 앞에서는 그렇게나 쉽게 사라진다. 그것이 마법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렇게 또 최면에라도 빠진 듯 이 마음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의 앞에 앉아,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그가 내게 줄 말을 얌전히 기다리게 된다.
다만, 오늘의 그는 조금 어려웠다. 평소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빤히 쳐다보는 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는데. 그것을 반대로 지금, 그가 내게 하고 있다.
내게 내려쪼이는 그의 눈빛 속에는 차마 내가 가늠치도 못할 생각들이 깊은 바다 만큼이나 담겨 반짝반짝 빛나거나, 혹은 넘실넘실 출렁이거나 하였다. 그 눈을 피할 생각조차 잊은 채 나는 또 다시 그에 대한 감상에 잠기고야 만다. 마지막 만남 이후 그가 어떠했을지를 가늠하며.
많이 야위었다. 세필로 섬세하게 그린 듯 부드러운 선을 지녔던 얼굴에는 베일 듯한 날카로움이 섞여보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예쁘고 순한 눈매는 조금 붉게 부어올라있다. 많이 울었을까. 헤아림 만으로도 나의 코 끝이 시큰해진다.
문득 그에게 미안해졌다. 무엇이,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영 버려지지 않는 내 마음까지도. 결국 나는 고개를 떨구고야 만다.
문득, 그는 나직하고도 사근한 목소리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정국아. 데이트 하자, 나랑, 오늘. 어때?"
...오늘 그는 정말 이상하다. 아니,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다. 회사 앞에서 그를 재회했던 그 날만큼이나 이상한 날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여실히 깨닫는다.
아아,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이구나.
그와 나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 그러나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그 데이트의 시작은. 화려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은, 우연히 커피숍 근처에 있었던, 그저 그런 해장국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다보니 그와 몸을 먼저 섞었다고는 해도 영 분위기가 없는 그 시작이다. 혼자 오랫동안 꿈꿔오고 소망했던 것 치고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볼품이 없는. 그러나 도중에 그의 앞에서 숙취로 갑자기 속을 게워내는 것 보다는, 그래도 썩 괜찮은 시작인 듯도 하다.
"...대학교 때 생각난다. 너 그 때, 술 왕창 마시고 나한테 고백하고. 내가 거절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니까 너 울면서 주사 부리고. 해장국집 데려가서 내가 밥 사먹이고 그랬던거. 기억나?"
묵묵히 수저를 놀리고 있을 때, 그가 문득 그런 말을 하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올라온다. 그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와 내가 여전히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기억나죠... 학교 정문 앞에, 24시간 뼈해장국 집에서. 차도 다 끊겨서 결국 첫차 다시 다닐 때까지 형이 같이 있어줬잖아요. 밤새도록 진짜 별 희안한 이야기를 다 하면서. 뭐더라? 복숭아는 물복숭아냐 딱복숭아냐, 달걀은 완숙이냐 반숙이냐, 그런 쓸데없는거 있잖아요. 내가 질질 짜면서 고백한건 완전 뒷전이었고."
나의 말에 그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를 또렷히 기억해 낸 듯 맞장구를 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 우리는 같은 때 같은 장소 같은 장면 속으로 함께 회귀했다. 그 뒤로 실에 꿰인 듯 줄줄이 엮여 떠오르는 보석같은 추억들까지도 모두 함께. 숟가락을 놀리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이나 그 때의 추억에 대해 함께 떠들었다. 학교는 이랬었고, 교수는 저랬었고, 누구는 그랬었고. ...그리고, 우리는 어땠었고.
그가 밝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많이 보고 싶었던 모습이다. 여름의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그는 여전히 내게 빛이었다.
단 한 번 뿐일 그와의 데이트는.
이제껏 혼자서는 괜스러워 발도 들이지 못했던 그럴싸한 디저트 가게에 함께 들어가 달콤함으로 입 안을 충족시키고. 나오는 길에 근처에 있던 오락실에 들어가 시끌벅적하게 웃으며 신나게 게임을 즐기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옆자리에 허벅지를 붙이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한강 둔치에 도착해서는 자전거를 빌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참을 바람을 맞으며 타고 놀다가. 날이 슬슬 어둑해 질 무렵에는 잔디밭에 마주 앉아 치킨을 먹으며. 야경의 운치가 무르익을 즈음엔, 어깨를 마주 기댄 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것들을 구경했다. 핸드폰에 좋아하는 곡을 틀고 말 없이 함께 들었다. 그를 한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냄새에 취했다. 순간을 음미했다. 한없이 행복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늦은 시각, 한산한 강변을 그와 걸었다. 특별한 오늘의 유난히 더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 민팀장은 없었던 것. 내가 없었던 그의 이야기, 그가 없었던 나의 이야기, 그리고 그와 내가 함께였던 이야기. 그것만이 둘 사이에 오갔다. 다만, 그 안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기에. 그렇기에 이 순간 이 일분 일초가 마치 물거품처럼 스러져 가는 것 같아서. 비 온 뒤 잠시 하늘을 예쁘게 수놓았다가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기억만 남기고 사라질 듯 꼭 그래서. 동이 트기 직전의 가장 반짝이는 새벽별 같이 느껴져서.
조금 슬퍼지려던 나는, 스치는 그의 팔을 붙잡아 그 부드러운 손에 내 손을 엮어 끼웠다. 그가 나를 받아준다면, 언젠가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된다면 꼭 해보고 싶었던 나의 꿈이자 바람이었던 그것. 오늘의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오늘만큼은 '데이트' 라 규정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닐까. 그가 그런 나를 바라다 보기에, 그런 뻔뻔함과 욕심을 담아 그를 마주했다. 사실 내심은, 그가 그것을 자연스레 풀어내거나 혹은 나에게 어처구니 없는 핀잔을 뱉어내진 않을까 하는 한심한 걱정들로 안절부절 했던 주제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맑은 그 눈을 내리 깔고는 나의 손을 맞잡은 채로 천천히 하던 걸음을 마저 옮긴다. 그런 그에 이끌려 나 역시 발걸음을 옮긴다. 눈커풀에서 이어진 그의 길고 예쁜 속눈썹을 홀린 듯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깍지 껴진 손바닥으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심장의 고동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맞추어.
우리는 그 밤을 걸었다.
이제사 잊지 못할 아픈 사랑에 또 다시 빠졌다.
어느덧 우리는 다리를 건넌다. 주홍색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진 그 길의 아래, 까만 강물은 머나먼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이윽고, 그 다리의 가운데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난간에 기대기에 나 역시 난간에 기대었다. 그는 머나먼 야경을 바라보았지만, 나는 내 앞의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마음으로서 마지막을 준비한다.
"오늘 재밌었어."
"...저도요."
그 대답에 그는 나를 바라다보며 눈웃음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길고 곧은 팔이 나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그의 말갛고 예쁜 얼굴이 내게로 다가와, 그 부드럽고 얇은 입술이 나의 입술 위로 겹쳐지며. 그리고, 그 두 팔은 나의 목에 둘리어 더욱 그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긴다.
처음이었다. 그가 먼저 내게 입을 맞춰온 것은. 침대 위에서는 언제나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그가. 놀람으로 크게 뜨여진 내 눈 앞에서 그의 감겨진 얇은 눈커풀과 긴 속눈썹이 바람 앞에 수줍은 꽃잎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나의 가슴은 아릿해져 온다.
크게 들이키는 숨과 함께 입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허리를 붙잡아 당기고, 품 안에 그를 단단히 가두며, 그와 함께 얽혀 들었다. 허기진 듯 그에게 달라붙는 내 행동에 질려하며 이대로 밀치고 달아날까 두려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 떨어진 입맞춤은 그럼에도 아쉬움이 여운처럼 진하게 남아 가슴을 물들인다. 그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채, 나는 눈을 감고 이 마지막을 목구멍 깊숙히로 눌러 삼켰다. 그 때 그가 말했다.
"...윤기형이랑 처음으로 키스했을 때, 담배맛이 났어."
아아, 마지막까지 그는 이토록 잔인하다. 나는 울지 않으려 미간을 모으고, 어금니를 꽉 악물며, 마주한 그를 더욱 나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들어야만 했다.
"그게 싫어서, 형한테 담배를 끊으라고 했어. 처음에는 죽어도 못 끊겠다고 버텨서, 그래서 그걸로 나랑 초반에 꽤나 많이 싸우기도 했고... 몇 번 헤어진다 어쩐다 그러기도 하다가, 어느 날부터 점점 줄여나가더라고. 뭐, 그것도 몇 번 실패했었지. 그러다가 어느 날 진짜로 끊었어, 독하게. 왜 그렇게 담배를 좋아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나 좋아하던 걸 결국 끊었어. 끊은지 1년 되는 날 축하도 해줬다? 근데 그 때 나한테 그래.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해서 끊었으니까, 나 만나는 동안은 억울해서라도 안피우고 못피우겠다고. 정 피우고 싶으면 더 이상 내 생각이 안날 때, 나한테서 완전히 정나미 떨어질 때, 그 때가서 다시 피우겠대. 그래서 내가... 그럼 형은 다신 피울 일 없겠네, 평생 내 생각만 하면서 살테니까. 그렇게 당돌하고 철 없는 소리를 했어."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친절히 내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나의 거짓말을 간파했는지. 왜 그렇게 된 것인지. 그 날 분에 못이겨 내게 못된 말로 상처를 준 것을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그는 내게 이렇게도 차근차근히 일러준다. 나의 고백을 거절했음에도 계속해서 나를 받아주던 그는, 이렇게나 변함이 없다. 이렇게나 정호석은 여전히 정호석이었다.
"실제로 형은... 그 뒤로 담배를 거들떠도 안봤어. 냄새조차 싫어했고... 그래서 난 정말로 형이 다시 피울 일이 없을 줄 알았어. 그렇게 그만하자는 말을 들었는데도 그것 만큼은 다시 피우지 않을 줄 알았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아. 진작에 형의 마음이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더 네 말을 믿었고 의지했었나봐. 네 말이 듣기 좋았으니까. 내 마음 편하고 싶어서."
나는 저도 모르게 허공에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그 뒤에 이어질 그의 말이 예상되었고, 동시에 그 때 그 순간이 또 다시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그 날 너가 그래. 형이 담배 피운다고. 근데 그러면서 또 그래. 형이 나를 많이 그리워 하는 것 같다고. 내가 아는 형은 그 두가지가 병행될 수 없는 사람인데."
그 순간으로 되돌아 갈 수 만 있다면.
아니, 그와 나의 재회는 잘못 끼운 단추였다. 그는 내게 그러한 부탁을 해서는 안되었고, 나는 그에게 주제 넘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우리 둘 다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멈출 기회는 여러 번이나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정국아... 더 웃긴게 뭔지 알아?"
"..........."
"나는 그 날, 너한테 화가 났어."
".........죄송해요."
나의 때 늦은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그는 내 어깨에 뺨을 기댄 채, 피시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 숨결이 간지러워, 나는 그에게 두른 팔에 힘을 더했다. 아니, 사실은 그가 내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되었다며 나를 밀어낼까 두려웠다. 여전히 그는 내게 화가 나 있을까?
그런데, 그가 내게 이상한 말을 한다.
"진짜로 이상해. 나는 그 날... 형의 마음이 진작에 나한테서 떠났다는 사실과, 네가 나한테 거짓말 했다는 사실을 같이 알게 되었는데. 근데 나는 너한테만 그렇게나 화가 나고 속이 상했던거 알아? 세상 없이 배신감을 느꼈어. 너가... 나랑 자는 것만이 목적이라 그게 아까워서 계속 거짓말을 했구나,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런거..."
"알지. 네가 왜 그랬는지, 머리로는 알아. 그리고 그렇다 한들 그것이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너한테 먼저 그런 제안을 한건... 그런 식으로 먼저 널 이용한건 나잖아. 네가 거짓말을 하던, 아니면 나를 함부로 굴리던, 무슨 짓을 하던, 그건 처음부터 내가 각오해야 했던 것들이기도 해. 그걸 몰랐던 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야. 나도 바보가 아니니까."
"............"
"...그걸 다 알면서도 나는 왜 그렇게 너한테 속상했을까? 진짜 웃기지 않냐? 왜 그렇게 너한테 과하게 화를 냈을까? 왜 그렇게... 너한테, 그랬을까 나는? 왜 그 때 나는... 형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을까...? 내가 서운했던 것이 왜 형이 아니라, 너였을까...? ...나 진짜 이상한 것 같아. 안그래?"
그렇다.
그는 정말로 이상한 말을 한다.
내게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한다.
나는 그 날 그가 나의 거짓말에 속은 것과 민팀장의 마음을 알게된 것에 대한 분풀이로서 내게 그토록 화를 낸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의 상실감을 둑처럼 막고 있었던 나의 거짓말이 들통이 났고 무너졌기에, 그 모든 감정이 내게로 쏟아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거짓말의 댓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그는 지금 내게 그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내게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고 하지만, 내게는 그 말이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들린다. 퍽 달콤한 것으로 착각하고 싶은 소리로 들린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어 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면,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그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무표정함이 무심하게 서려있어서. 나는 좀처럼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어쩐지 무서웠다. 멍청해서 한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하기만 하는 나를 불쌍히 여겨 조금 쉬운 말로 설명해 줄 순 없는걸까.
혼돈스러운 머리로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있잖아, 정국아... 너를 다시 만나고부터, 나는 내가 싫어졌어."
그는 또 다른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게 건넨다.
"...안 그러면 안돼요...?"
나의 떼를 쓰는 듯한 그 말에 그는 애매하게 웃음지었다. 여전히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나의 손을 풀어내어 그 손끝을 마주 잡는 그의 행동이 곧 내게서 영영 떠나갈 것 같이 꼭 그랬다. 알 수 없는 서늘한 기분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온다. 불안했다.
"매일 매일 쓸데없는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처음에는... 너의 말을 전해듣는 윤기형이 어땠을까 상상을 했어. 멋대로 형이 분해할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 통쾌하기도 했고, 내게 어서 연락이 주지 않을까 하루에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여다 보기도 하면서. 그러다 언젠가부터, 형에게 그런 말을 하는 너를 상상해. 네 마음이 어떨까 자꾸 생각하게 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깨달아. 내가 처음 네게 이런 제안을 했을 때가 계속해서 떠올라. 그러지 말 걸 그랬다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후회를 해."
"......안 그러면, 안돼요...?"
마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그러잡았다.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그와는 달리, 나는 벌써부터 목구멍이 칼칼해진다. 코 끝이 아릿해온다. 눈두덩이가 뜨겁다.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싶었다. 애초부터 헤어짐을 예상하고 지금을 맞이한 주제에 모순덩어리 마음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를 붙잡고 싶다. 붙잡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혼자 있는 밤이면 자꾸만 네 생각이 나. 네 품 속에서 좋았던 기분, 네 열기, 네 체향이 자꾸만 떠올라. 너에게 안기는 상상을 해.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떠올라. 나 때문에 상처 입을 너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머리 속에서 떨치지도 못한 채 중독된 것 처럼 매주 네 연락을 기다리는 내가... 나는 싫어. 형은 어느새 핑계거리가 되어버린 것 같은 내 변덕심이, 이렇게나 쉽게 변해버린 것 같은 내 마음이 나는 용서가 안돼. 정국아, 나는 내가 싫어. 진짜, 싫어."
"............안 그러면 안돼요...?"
그가 이토록 잔인한 말을 한다. 이보다 더 한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렇게나 내게 상처를 준다. 그토록 염원하며 바라마지 않던 상상, 그가 끊임없이 나를 그리는 상상, 내 생각을 하며 나를 바라는 상상... 그 모든 꿈같은 바람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음에도, 동시에 그는 그런 자신이 싫어 마지 않는다며 내게 말한다. 그렇게나 싫다고 말한다. 몇 번이고 싫다고 되뇌인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냥 있는 그대로를 그냥 받아들이면 안되는걸까.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어째서 이다지도 잔인한걸까.
그의 손을 틀어쥐고 이를 악문 채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내게서, 그는 기어이 잡혔던 손마저 빼내어 가버렸다. 비어버린 손아귀는 허전함을 감추지 못하고 굳게 주먹 쥐어진다. 눈물이 방울져 제멋대로 흘러내리는 사이, 각막에 비치는 가로등 불빛과 내 앞의 그는 엉망으로 뒤섞여 반짝반짝 주홍빛으로 빛이 났다. 이 참혹한 순간마저도 내 눈에 비치는 그는, 왜 그리도 아름다워 나의 서러운 울음을 더욱 부추기는걸까.
"......너를 이용해놓고, 네게 의지해놓고, 믿어놓고. 그런 주제에 제멋대로 상처 받고, 네게 상처주고, 또 이렇게 널 울리고... 이렇게나 제멋대로에 못된 사람이라서 너한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면, 미안하면 그냥... 형, 제발...!"
억울했다. 시작이 어떠했던, 과정이 어떠했던, 그의 마음 한켠에 발끝이나마 얹은 나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주면 안되는걸까. 그런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 방법 따윈 없는걸까. 왜, 대체 왜.
"...네가 나같은 거 사랑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가 나 같은거 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했으면 좋겠어. 네가 나 같은거에 휘둘리지 말고 너 자신을 더 사랑했으면 좋겠어."
"내가 어떻게...!! 난 그런거 몰라요!! 못한다구요!!! 형은.... 형은, 진짜!!!!"
결국 나는 애처럼 와악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속이 복받쳐 올라 엉엉 울면서도 끝까지 '당신은 나쁜 사람이다' 라고 뱉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보려 그의 가느다란 팔목을 양손 가득 그러쥐어 보지만, 그것도 결국은 흘러내리듯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려져 펑펑 울면서도 나는 끝내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그가 나보다 그 자신을 더 사랑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가 그 자신을 싫어하지 않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길바닥 한가운데 엎드러져 한참을 소리내어 울었다. 다 큰 어른이면서 쪽이 팔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속을 게워내듯 울었다. 울고있는 내게서 그의 발걸음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 다리의 건너편, 저 강 너머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을 것이다. 내게서 멀어지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싫어하지 않게 될까. 더 이상 나를 생각하지 않게 될까. 내게로서도, 민팀장에게로서도 멀어져 자유로워지게 될까.
정말로 한심하고 멍청한 나는, 끝까지 그의 생각을 이 마음에서 놓지 못한다. 숨통이 조여오고, 목구멍이 울음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이 지경이 되고도 그 마음을 미워할 생각 조차 할 줄을 모른다.
멀리서,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엎드린 내 앞에 멈춰서기가 무섭게 왈칵, 나의 어깨를 잡아당겨 일으켜 앉혔다. 느닷없는 행동에 놀라서 깜박거린 눈커풀이 두 눈에 잔뜩 맺혀있던 눈물들을 흘려보내고, 그 황망한 시야 한가득 들어차는 것은.
그다.
나와 마찬가지로 잔뜩 눈물 범벅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보인다. 그것이 반가워서, 원망스러워서, 안타까워서, 혹은 감정이 동화되어서, 또 다시 장전하듯 눈물이 두 눈에 가득 솟구쳐 오를 때.
그의 입술이,
내게 말했다.
"정국아-"
SAVAGE
LOVE
계절은 벌써 몇 번이나 지났다.
시간은 그리 멋대로 흐른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속도로,
동시에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서.
대리를 다느니 마느니 하던 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정대리' 라 불리우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습관이란게 참 무섭지."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 재미난 특이점이 하나 생겨났다면,
"오늘 아침에 또 아랫층에서 내렸다고... 부서 이사한지가 벌써 몇 달이나 됐는데 가끔씩 꼭 이런다."
"팀장님도 가만 보면 참... 답이 없어요."
"너만 하겠냐?"
민팀장과는 나름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종종 점심을 함께 먹는 정도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의 절반을 회사에서 보내는 직장인으로서 다른 부서의 팀장과 그 정도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야말로 '나름'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적으로는 절대 연락하지 않는 사이긴 해도, 어쨌든.
이렇게 된 경위를 늘어놓자면.
그가 옥상에서 호석에 대해 내게 일침(?)을 날렸던 그 날 이후, 내가 영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처럼 술에 쩔어 빌빌대고, 술에 쩔지 않았을 때도 빌빌대고. 여하튼 영 좋지 못한 직장인으로의 자세로 회사에 임했기에, 직속 상사에게 어마무시하게 까였었다. 하필 부서도 옆이라서 그런 내가 싫어도 눈에 보였을 민팀장 입장에서는 그런 내게 나름 죄책감이나 책임감, 측은지심, 뭐 그런 비슷한 것들이 발동했던 듯 하다.
어느 날인가, 살아있는 시체같던 나를 끌고 나가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채 해장국을 사먹이더니, 또 어느 날은 기어이 퇴근 후에 억지로 붙잡아 저녁 식사 겸 술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술기운을 빌려 그에게 에라 모르겠다 울분 섞인 화풀이를 냅다 쏟아부었고, 그런 나에게 그는 한 마디를 지거나 포용해 주지 않은 채 쌍욕까지 섞어가며 내 말을 죄다 논파하고 패대기를 쳤기에. 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 멱살잡이까지 한 결과 - 나름 베베 뒤틀렸던 속이 어느 정도 풀어진 나는, 스스로를 사람 구실을 하는 직장인으로의 모습으로 서서히 궤도를 돌려 놓을 수 있었다.
그의 그런 면이 호석과 닮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표현 방식은 정반대로 다르거니와, 사람을 대하는 마음씀씀이에서 호석이 내게 베풀던 상냥함의 흔적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호석이 내게 그러했던 때를 떠올리며 혼자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나는 여전히 그가 그립다.
"...너 아직도 호석이 연락 기다리냐?"
"왜요? 안돼요?"
"거봐, 노답 새끼. 내가 본 꼴통 중에 너가 제일 답이 없어."
그런 욕지기를 씹듯이 내뱉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여튼간 말을 곱게 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호석에 관한 한, 누군가에게 노답이고 꼴통이란 욕을 들어도 나는 타격조차 입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스스로가 깨우칠 만큼 깨우친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거 가만 보면 닮았다, 참..."
"누구를요?"
"걔랑, 너."
그렇게 던지듯 말하고 민팀장은 더 이상 말 없이 고개를 처박고 수저를 놀린다. 그의 뜬금 없는 그 말에 나 역시 고개를 처박고 수저를 놀린다. 민팀장이 나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군데라도 내게 호석과 닮은 점이 있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던 것과.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그 역시 호석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꽤 불쾌했던 것과. 그가 마치 나에 대해 잘 아는 척 하는 것처럼 들려 은근히 재수 없게 느껴졌던 것이. 모두 뒤죽박죽 짬뽕이 되어 나의 말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사내 게시판에 민팀장의 결혼 소식이 올라왔다. 점심을 같이 하게 된 길에 단도직입적으로 '결혼 하신다면서요', 그렇게 물으니 그는 무척 심드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켜 그 자리에서 내게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왔다.
"아니 뭐, 내가 청첩장 줬다고 또 곧이 곧대로 고지식하게 내가 오라는 뜻으로 준거라고 생각하지는 말고."
그 애매모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루뭉술한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니,
"근데 뭐... 오고 싶으면 오던가."
...아무래도 민팀장에게는 한 번에 곱고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병이라도 있는가 싶다.
그래서 민팀장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사실은 결혼하는 상대방의 얼굴이 궁금했던 것이 아주 솔직한 나의 심경이다. 혹시 그 사람이 호석을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일까 싶어서.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민팀장을 잔뜩 경멸할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냐하면, 민팀장과 더 많이 닮은 인상과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부부가 닮으면 잘 산다는데.
저 사람은 민팀장이 담배를 피워도 괜찮은 사람인가보다.
식장에 앉아 박수를 치며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다리 위에서 나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지독한 열대야다. 낮 동안 머금었던 복사열이 늦은 밤이 되도록 식지 않고 온 사방을 찜통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데도 이미 온몸이 땀 범벅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그래도 강바람이 불어 다리 위는 시원했다.
이대로 뛰어 내려 풍덩, 저 검고 깊숙한 물 속에 온 몸이 잠기면 더욱 시원할까 싶다.
"......오래 기다렸지?"
다리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다가온 내게 인사보다도 먼저 그 말을 건네었다. 그 말은, 오늘 우리의 약속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그 날, 그 때, 그 순간.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형이,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으니까요."
나의 대답에 그는 말갛게 웃었다. 아마 그 때를 추억해내고, 그것을 똑같이 잊지 않고 지켜낸 나에 대한 웃음일 것이다.
그는 내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내게 미안해 하지 않는 것에서 나는 마음 속 깊이 안도하고 안심했다.
"정국아-,"
그의 입으로부터 오랜만에 듣는 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내게 던져진 그 시선 속에는 그 때를 기억하냐는 듯한 장난기 어린 눈빛이 밤하늘의 별을 담고 반짝이고 있었다.
"너 아직도 나 좋아해?"
사랑한다. 못 본지 몇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종종 꿈에서 그를 그릴만큼. 바뀌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그의 번호를 아직까지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 가끔씩 물끄러미 바라볼만큼. 잘못된 첫단추를 풀었다가 다시 끼울 용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그 긴 시간 동안 여전히 그리워 했을 만큼. 나는 그를 내 마음 속에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어두고 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여전히.
"...사랑해요, 형."
나의 대답에 그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대학 시절, 그 어린 날 그 때처럼 활짝 웃음지었다. 건강해 보였다. 행복해 보였다. 기뻐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와 닮게 웃을 수 있었다.
그가 한발작 더 가까이 내게로 다가온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우리 둘의 몸이 조금 수줍게 맞닿는다. 맞닿은 살이 열대야 때문인지 혹은 나의 대답 때문인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감촉이 기분 좋았다.
"...네가 좋아. 그리고... 이제는 너를 좋아하는 내가, 좋아."
그의 동그란 머리통이 나의 어깨에 기대어 온다. 그리고 나는 그의 머리 위에 나의 머리를 가만히 얹었다. 난간을 잡고 있는 그의 손 위에 나의 손을 포개었다. 그런 나의 손을 그가 깍지 껴 잡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한 채, 우리는 반짝이는 야경과 출렁이는 강물을 한동안이나 말 없이 지켜보았다. 말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수 만 가지의 이야기를 나눈 것과도 같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란.
불 같이 사랑할래,
그댈 지금.
2021.07.27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곧 후기 들고 오겠습니다.
포스타입은 여기로
https://satellite-99.postype.com/post/9973157
SAVAGE LOVE (下) [완결]
by Impulse 결국 나는 변한 것 하나 없이 또 그에게 차이고 말았다. 심지어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망가졌구나 싶을 정도로. 그 뒤에 내가 할 일이라면, 찢어진 상처를 알코올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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