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너 아직도 나 좋아해?"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입 안에 든 것을 씹는 것 조차 잊은 채 제 앞에 앉은 호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놀리는걸까. 그렇다기엔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고, 스스로가 알고있는 정호석이라는 사람은 그런 것을 농담으로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취했어요? 그렇게 되묻고 싶다가도, 그가 던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자신은 아직도 그를 좋아하는가.
좋아한다. 못 본지 몇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종종 꿈에서 그를 그릴만큼. 바뀌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그의 번호를 아직까지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 가끔씩 물끄러미 바라볼만큼. 회사 앞 편의점 의자에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그를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보았을만큼. 나는 그를 내 마음 속에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어두고 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여전히.
"......좋아해요."
"그럼 나랑 자."
"...예?"
"나랑 섹스해."
SAVAGE
LOVE
호석과 나의 인연은 대학교 때, 흔하디 흔한 선후배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나의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가장 깊은 사랑이었고, 어리고 철이 없던 나는 그 우물 같이 깊고도 습한 사랑에 빠져 답도 없이 허우적 거렸었다. 일년을 끙끙거리며 앓던 끝에 비장하고도 힘겹게 내뱉은 일생일대의 고백은,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그럼에도 저를 여전히 아끼는 후배로서 옆자리를 내주고 있던 그의 상냥함을 또 다른 기회로 착각했던 나는.
술김에 취해서 고백했다가 차였고. 홧김에 윽박지르듯 고백했다가 차였고. 슬픔에 펑펑 울면서 고백했다가 차였다. 차이고, 차이고, 또 차였다.
수많은 고백 끝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아 정말로 안되는건가보다 라는 절망적인 현실. 반대로 수많은 거절들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굳은살이 잔뜩 배겨 왠만해서는 꿈적도 않게 된 바위덩이 같은 마음과 그 안에 갖혀 움쩍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린 그를 향한 애정.
결국 인정해야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피해 선택한 길은 군대로의 도피였다. 학교 선후배 동기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군대로 도망을 쳐버렸고. 그리고, 제대를 하여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졸업을 해 모습을 감춘 뒤였다. 당연하게도.
아마 복학 후에 연락을 했더라면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저를 받아주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구태여 그리 하지는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더이상 마음을 쏟지 않기로, 여전히 발갛게 불타오르는 이 마음이 다 연소되어 재가 될 때를 기다리기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뜻을 정했던 것이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잊지 못했던 마음을, 사회에 돌아왔다고 쉽게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학교를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며 슬슬 대리 직함을 다느니 마느니 하는 이 즈음까지도 나는 여전히 과거의 그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괴로워하니 말이다.
그리고. 우연히 회사 앞에서 그를 재회하게 되었을 때의 그 마음이란. 마치 잠잠히 가라앉아 있던 불씨에 공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꼭 그랬다. 화약에 폭발하는 빨간 장미꽃더미처럼, 꼭 그랬다. 그는 나에게 꼭 그랬다.
그렇게 차이고도 학습능력이 없는 것인지 멍하니 앉아있던 그에게 호기롭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저에게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하는 것으로 다시금 받아들여 준 것은 호석이었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으로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이야기가 길어지고. 그렇게 된 길에 저녁식사 겸 술 한 잔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무르익었을 무렵 그가 내게 물었다.
"너희 회사에... 민윤기라는 사람, 알아?"
"민팀장님이요?"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안면이 있다고는 할 수 있다. 옆 부서의 팀장으로서 가끔 일손이 부족하다며 우리 팀장에게 점심값을 지불하곤 저를 빌려가 엑셀 자료 정리를 한가득 안겨주곤 했으니까. 내가 가진 그의 인상은, 제법 말을 툭툭 던지며 까칠한 척 굴지만 나름의 선이 분명한 사람. 그런 그 사람에 대해 호석은 왜 제게 묻는 것일까, 뜬금도 없이.
나의 대답에 호석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술 한 잔 왈칵 들이키고 앞에 놓은 안주를 깨작깨작. 궁금하긴 해도 섣불리 물어보기 힘들었던 나 역시 손 안의 술잔만 빙글빙글. 그러다가 느닷없이 제게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냐고. 그리고.
"나랑 섹스해. 그 대신 나랑 잤다고 민윤기한테 말하고... 그 사람 반응이 어땠는지... 나한테 말해주는 조건으로... 나랑........."
"........"
"...너 나 아직도 좋아한다며. 옛날부터 나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말도 안되는 조건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떼를 쓰듯 뒤죽박죽 털어놓는 그의 표정은, 그 당치도 않은 내용과는 다르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얼핏 듣기에 조건을 내걸고 자신과 거래를 하자며 서툴게 유혹을 하는 것 같은 그 말은, 사실은 퍽이나 저 좀 살려달라며 애원을 하는 듯 들렸다. 심지어 저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
호석의 그 제안은 자신에게 더할나위 없이 불리한 조건만 떠안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못하겠다고 거절을 한다면, 호석과 자신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헤어져 그냥 우연히 만난 대학교 선후배로서 선이 그어지고 그는 다시금 나를 잊을 것이며, 또 그렇게 나는 이 마음의 불씨를 꺼뜨리기 위해 그리움과 애정을 삼키는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마치 무간지옥처럼 끝이 없는 굴레를 챗바퀴 돌면서.
반대로 생각하자면, 호석이 제안한 그 관계가 이 마음의 끝을 보여줄 것도 같았다.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나가다보면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쩌면 제 마음이 구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이 참에 완전히 학을 떼고 영영 그에게서 졸업할 수 있지는 않을까. 또는, 육욕을 만족시키다보면 이 마음의 불씨를 꺼뜨릴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 모든 계산과 생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감히 그의 절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이 길고도 깊은 제 사랑을 고작 몸을 섞는 것으로 만족할 싸구려 감정으로 취급 받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 말을 꺼낸 것이 그이기에 단숨에 용서가 되어버리고야 마는 이 마음은. 이렇게나 정호석에게 약한 전정국이라는 사람은 결국.
알았다고 작게 그에게 대답했다.
호텔 앞에 호석을 세워두고 콘돔을 사러 편의점에를 다녀왔다. 그것이 어디에 비치되어있는 줄을 알았음에도 일부러 편의점 안을 미적미적 둘러보다가 나왔다. 마음이 바뀌었거든 얼른 저를 두고 떠나갔으면 해서. 그럼에도 그는 제가 두고 떠났던 그 자리에 여전히 못박힌 듯 서 있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어째서 자신이 그 말을 그에게 물었어야 했을까. 이 잔인한 제안을 내민 것은 그였음에도 말이다. 그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파리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호텔 입구의 형광빛 네온 사인이 붉게 비추는 그의 얼굴에 어째서인지 목이 메어와, 나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내가 그의 몸을 가르고 끝까지 들어갔을 때. 그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모양이 예쁜 콧망울은 꽃으로 물을 들인 듯 붉게 물들었다. 허망함을 담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찾듯 허공을 유영하다가, 이내 물기로 잦아들어 반짝거린다. 이내 차오르던 눈물은 넘쳐흐르고, 콧물을 쿨쩍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가 울었다.
"...아니야.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서, 아파서 그래... 조금만,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거야."
왜 우느냐 묻지도 않았는데 호석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괜찮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가 울음을 그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힘들어 할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거칠게 그를 몰아부쳤다.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물에 내가 모를 속내가 담기지 않길 바랐다. 저의 거칠은 몸짓을 핑계로 그가 그냥 속시원히 울어버리길 바랐다. 그가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저를 탓하길 바랐다. 그의 눈물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길 바랐다.
한 몸이 되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제 바람대로. 과호흡 섞인 신음과 헐떡이는 흐느낌을 뱉어내는 그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한 척의 배처럼 나의 허리짓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막막한 어둠을 홀로 헤아리려는 듯 두 팔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린 채 그렇게. 그리고,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그가 내 얼굴을 보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그의 가슴 위로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나의 땀이라 착각했으면. 거칠게 들이쉬고 내쉬는 나의 새되고 습한 숨소리가 그저 열에 들뜬 신음소리일 뿐이라 착각했으면. 내가 이렇게나 그에게 상처 받은 것을 몰랐으면. 그랬으면. 아무쪼록 그랬으면.
누가 당신의 마음을 이토록 산산조각 낸건가요.
내가 알던 상냥했던 그 사람을 이토록 잔인하게 만든건 누구인가요.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나요.
누가.
"민팀장님."
담배를 피러 옥상으로 올라가는 팀장의 뒤를 쫓았다. 영문을 모르는 채 옆부서의 직원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의구심과 함께 꽤나 무기력해 보였다. 옆부서 팀장이 제게 볼 일이라도 있는건가. 혹은 제게 무슨 부탁이라도 있는건가. 그 어느 쪽이던 귀찮음이라는 그의 생각이 그 하얀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론 제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이야기이긴 하지만.
"저 호석이 형이랑 잤습니다."
일순의 의문이 떠올랐던 그의 얼굴이 다음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뼈대가 굵은 주먹이 곧이라도 멱살잡이를 할 듯 허공을 그러쥐었다. 쌍욕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입이 크게 벌어졌다. 날카로운 두 눈이 악감정을 담고 저를 향해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이내 잔뜩 일그러졌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양 다시금 무기력함을 담고 냉하니 굳어진다. 그러쥐었던 주먹은 들고 올라온 담배갑을 그러쥐었다. 한사발 욕을 내뱉을 것 같았던 입은 담배를 꼬나물고 꾹 힘주어 다물렸다. 다만, 불쾌함을 담은 눈동자만은 여전히 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한테 그 말을 왜 합니까?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지?"
"팀장님이 알았으면 하니까요. 호석이 형이."
자신의 입에서 또 다시 거론된 '호석' 이라는 이름에 그의 미간이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졌다. 후우, 폐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한숨과도 닮은 숨결이 담배 연기와 함께 나직한 혼잣말로서 내뱉어진다. 불쌍한 새끼. 그 다음으로는 멀쩡한 사회인으로서의 잔소리가 나를 향해 튀어나왔다.
"정국씨는 생각이 없는건가? 걔가 그걸 나한테 말해달라, 내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면 곧이 곧대로 나한테 말하나? 사회 생활 몰라요? 생각이 없어? 여기 회사잖아.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다 그런가? 나 진짜 이해가 안가네."
"...제가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뭐?"
"........호석이 형이 아니라, 제가요."
"...꼴통 또라이 새끼, 이거."
헛,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소와 욕설이 담배를 꼬나문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의 시선은 경멸과 신기함 사이의 경계선에 머물러 마치 세상 알 수 없는 별종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한다. 나 스스로도 잘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지금 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니까.
저를 경계하듯 노려보던 그의 시선이 한동안 내 목에 걸린 사원증에 머물렀다. 눈을 가늘게 뜨는 그는 마치 무언가를 더듬어 생각해 내려는 듯. 전정국, 정국, 정국이, 그렇게 입 속으로 되뇌이더니.
"...정국씨, 혹시 호석이 대학 후배던가?"
"...........예."
"....................아아, 그래서."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지듯 말려올라간다. 비웃음. 마치 해답을 찾아내기라도 했다는 양 오만하기 그지 없는 그 승자의 미소.
"또 고백 했나봐? 이번엔 호석이가 받아줬고? 드디어 사귀나? 소원성취했네. 축하해요."
아아, 그래서...
그의 빈정거림 속에서 나는 재빠르게 많은 정보들의 간극을 채워나간다. 민팀장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그 이야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로 인해 그가 평가하는 전정국은 어떤 사람일지. 기타 등등. 그리고 대학 시절 호석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수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한순간에 흩어진다.
호석에게 있어 자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민팀장에게 어떻게 이야기 했을까. 대학교 때 자신이 정말 인기가 많았다며, 그 중에는 자신을 그렇게나 졸졸 쫓아다니는 전정국이라는 애가 있었다며 그에게 귀여운 허세를 부렸을까. 고백하다가 차인 횟수로 기록을 세웠을만큼 웃기는 놈이 있었다며 심심풀이 땅콩처럼 그 예쁜 입에 오르내렸을까. 그런 숱한 고백들을 다 떨치고 당신만 사랑한다는데 왜 안 받아주냐며 그에게 애처롭게 울며 매달렸을까.
그러나 그 어떠한 비참한 상상보다도. 내게는 그가 나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욱 크게 와닿는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그의 뇌리에 전정국이라는 사람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그가 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가슴 언저리가 저릿하면서도 뜨겁게 뜀박질할 만큼. 병신같이.
"아니요. 사귀지 않습니다."
"...? 그럼 뭐야. 아까는 나한테 호석이랑......"
"부탁했습니다. 저한테. 형이."
"....뭐를."
"............."
자는 것을.
섹스하는 것을.
당신을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한 도구가 될 것을.
당신의 사랑을 되돌려 놓기 위해 희생 당할 것을.
나는 그리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우리 둘 모두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가늘게 찌푸려진 그의 눈에 조금 전과는 다른 감정이 섞여있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까움, 동정심, 측은지심, 한심함, 뭐 그런 것들. 내가 그에 대해 옳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껏 비통한 인상을 쓴 그가 씹듯이 내뱉은 그 말.
불쌍한 새끼들.
그 말이 싫었다. 내 사랑을 동정할 권리를 가진 이는 이 세상에 오직 나와 호석 뿐이다. 그는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나는 불쌍하지 않다. 내 사랑은 불쌍하지 않다. 나의 사랑은, 결코 불쌍하지 않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민윤기가 싫어졌다.
"...진짜로 말했어?"
민팀장과 만났다는 화두를 던진 나에게 호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마치 내가 정말로 그것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듯 그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 해달라는 조건을 먼저 내걸었던 것은 그 자신이면서 어째서 그렇게 되묻는 것일까.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호텔방 문 앞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던 그의 발걸음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은 나에게로 천천히 이끌리듯 다가온다.
"...그래서? ...뭐래?"
"나보고 꼴통 또라이 새끼래요."
나의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의 객기에 대한 어처구니와, 표현의 상스러움에서 오는 본연적인 괴리감, 간접적인 복수에서 오는 통쾌함, 그리고 나를 향한 미안함까지. 그가 그렇게 웃기에, 나도 웃었다.
그의 길고 모양 예쁜 손가락이 나의 머리를 빗질하듯 쓰다듬었다. 그것은 칭찬일까, 혹은 안쓰러움일까. 그 안의 감정이 무엇이던 나는 그 손길이 좋았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대었다.
"...또? 또 뭐라고 했어?"
"......형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떠올리는 것 같았어요. 미련이 남은 것처럼."
민팀장은 정말 호석에 대해 떠올렸을까? 그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호석에 대한 미련보다는 이미 끝난 것들에 대한 추억이 억지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잔여감에 가까웠다. 나에 대한 비웃음에서 느껴지던 것은 질투심 보다는, 어리고 철없고 한심한 젊은이를 향한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을 호석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민윤기가 아닐테니까. 그가 원한 것은 그런 감정이 아닐테니까.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의 손은 어느 새 나의 셔츠자락 단추 위에서 주저함을 담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형과 나에 대해서 화가 난 것 같았어요."
호석이 손가락이 나의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어내린다. 그 느릿한 손끝의 움직임에는 나와 민윤기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나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내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데. 차라리 가차없이 차갑고 계산적이고 제멋대로 나를 이용했다면, 그랬다면 나 역시 한결 수월하게 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한 정호석은, 그렇기에 나에게 한없이 잔인하다.
"...그리고...?"
"나를 한 대 치고 싶은데 회사라서 참는 것 같았어요."
그 말에 호석은 또 다시 킥킥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새 셔츠 단추는 가슴 밑까지 풀어져 있었다. 그 넓게 벌어진 틈으로 그의 손이 들어와 나의 맨살 위로 얹혀진다. 그리고 나는 그 손길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눈 앞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아 힘껏 부둥켜 안았다. 그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싶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한 나를 받아들이듯 내 머리를 감싸안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그의 마른 몸을 끌어안아 조심히 침대로 눕힐 때, 살짝 긴장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열감을 띈 그의 숨소리에 가슴이 미친듯 뛰기 시작한다. 그의 얇은 입술에 입을 맞추면, 눈을 감은 채 소극적이나마 슬몃 벌어져 자신을 맞이해 들이는 그의 태도에 나는.
진짜로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서 몸을 섞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 착각이 나는 행복했다.
2021.05.31
포스타입
SAVAGE LOVE (上)
by Impulse "너 아직도 나 좋아해?"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입 안에 든 것을 씹는 것 조차 잊은 채 제 앞에 앉은 호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놀리는걸까. 그렇다기엔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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