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pulse
"나 이제 스무살이니까! 성인이니까! 형 이제 나랑 사귀어야죠!"
신년 벽두새벽을 맞이하기가 무섭게 호석을 숙소 밖 외진 곳으로 끌고나가 정국이 잔뜩 신이 나서 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나오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기에, 호석의 미간은 좁혀들고 입술은 시옷자로 쑤욱 내려간다.
때는 바야흐로 약 반 년 전 즈음.
어쩌다 숙소에 둘만 남게된 그 날.
별 것 아닌 이야기들로 잠자는 것도 잊은채 한참을 소근댔던 그 밤, 정국이 대뜸 물어왔던 그 말이 이 모든 일들의 시발점이었다.
- 형, 키스해 본 적 있어요? 키스 어떻게 해요?
그 땐 그 말이 마냥 어린 동생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말인 줄 알았기에. '왜? 궁금해? 해볼래?' 라고 농담으로 되받아쳤고. 그랬기에 자신은 세상 천지 분간 못하고 나댄 똥멍청이라며 호석은 골백번도 더 후회를 하고 반성을 했다. 왜냐하면, 그 농담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 라는 단호한 대답과 함께 정국이 호석의 입술로 곧장 돌진해 들어왔으니까. 그것도 그냥 맞붙었다가 떨어진 정도가 아닌 꽤나 깊숙하고 질척이며 얽혀들었던, 첫 딮키스.
여러가지로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 어버버거리는 자신에게 '키스했으면 우리 사귀는거죠? 그쵸?' 라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종용해 들어오는 정국에게 무슨 대답을 해줬어야 옳았을까. 수만가지 말과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복잡하게 떠다녔지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간 대답이라곤 '난 미성년자 안사겨!' 라는 궁여지책에 가까운 거절이었다. 그 거절도 참 유치하고 웃기다. 언제부터 제가 그렇게 나이를 따졌다고.
동그란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만을 한가득 담았던 정국은, 그러나 묵묵히 호석의 대답을 받아들이고 입을 다물었더랬다. 그렇기에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간 줄 알았던 그 사건은 약 반 년 간의 잠복기를 거쳐, 새해가 지나고. 그 때의 호석의 대답을 '거절'이 아닌 '보류'로 받아들였던 정국은 이제 한 살을 더 먹었다며 당당하게 그 때 얌전히 물러두었던 사건을 지금 이렇게 다시 꺼내든 것이다.
속으로는, 올해 네 생일이 지나야 진짜 성인이야, 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말을 구태여 뱉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국의 생일에 또 다시 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로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라며 또 다시 호석은 몇 번 째일지 모를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한다.
애초에 딱 잘라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며 명확히 선을 긋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문제라는 것을 호석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딱 잘라 정국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유 역시 잘 알고 있다. 아주 마음에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국의 당돌한 그 요청이.
그 날 그 사건 이후, 가만히 있어도 시선이 자동적으로 정국의 입술을 따라가게 되거나 했다. 어느 날 꿈을 꾼 이후부터는, 어느샌가 부쩍 자라 제법 근육이 잡힌 정국의 몸을 의식하게 되어버렸다. 정국이 장난을 친다던가 촬영을 하며 부대껴오는 감각이 뜨겁고 쑥쓰러워 몸을 슬쩍 빼게 되는 주제에, 반대로 저에게서 멀어지면 괜스레 다가가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이다. 스케쥴이나 안무 연습으로 피곤에 쩔어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면, 머리 속은 어느새 만약 제게 애인이 있다면 어떨까 싶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상상 속의 애인은 언제나 정국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스스로의 감정이 통제가 안되는 것이다. 마치 눈 앞에서 반짝이는 사탕처럼 달콤히 자신을 유혹해대는 그 감정은 거의 불가항력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니 저 해맑고 당돌하고 조금 시건방지기까지 한 정국의 사귀자는 요청에 호석의 고개는 어쩔 수 없이 끄덕여지고 만 것이다.
등 떠밀려 그것을 억지로 수용한 것 같은 느낌은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작은 끄덕임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맑게 웃으며 크게 저를 안아오는 정국의 그 표정이, 감촉이, 심장 소리가. 그냥 핑크빛 제 마음을 하늘로 부웅 날아오르게 만들어 버렸다. 온세상을 다 잊게 만들 듯.
그리고, 그래서는 안되었다.
호석은 본디 겁이 많다.
높은 곳도, 위험한 곳도, 어두운 곳도.
귀신도, 벌레도, 롤러코스터도.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인해 타인의 신뢰와 지금까지의 자신의 노력을 배신하게 될 행위. 다시말해, 자기 자신의 태만과 무책임함이 가장 무겁고 또 무서웠다.
첫 몇 달은 달콤한 연애 감정에 취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마침 음반 활동이 잠시 뜸할 시기였기도 하고, 해외 활동도 겹쳐져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때였던 탓에 더욱 신이 났었던 것도 있었다. 자신들을 못알아보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이용하여 남몰래 데이트를 즐기거나, 숙소가 아닌 호텔에서 멤버들의 방해 걱정 없이 관계를 만끽하는 등, 둘만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다.
맨날 붙어다니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고 시끄럽게 떠들던 예전과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싶지만, 사실 정서적으로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멤버들과 몰래 오가는 눈빛들이, 장난인듯 팬들 앞에서 행해지는 스킨십들이, 둘만의 톡방에서 나누어지는 대화들이. 이 세상에서 둘만이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 둘만이 가장 행복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바라만 보아도 서로가 빛이 나 보이고, 예뻐보이고, 멋져보이고, 사랑스럽고.
심지어 정국은 그 비밀스러운 감정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만 같았다. 멤버들과 이야기하는 도중 둘만 아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은근슬쩍 흘리며 반응을 살피는가 하면, 팬사인회와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유독 엉겨붙고 매달리며 둘 사이의 끈끈함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멤버들이 안하던 짓을 한다며 타박을 하면, 앞에서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뒤로는 호석에게 다가와 위로해달라며 어리광을 부렸다.
호석도 그 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의 애정을 자랑하고 싶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인정 받고 싶어하는 정국의 치기 어린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고,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 그런 행동들이 심지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같은 팀 멤버이고, 둘만이 공유하는 사생활인데 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그 정도 쯤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두루뭉술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이 단숨에 지워져 버린 것은, 어느 무대 위.
찰나의 타이밍, 미세하게 박자를 놓쳐 움직임을 절고 말았다.
그저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어쩌다 한 번 있는 미세한 실수였을 뿐이다. 그러나 데뷔를 하고부터 온갖 돌발 상황을 겪어왔었음에도, 그 날 그 순간 만큼은 그 실수가 자신을 찌르려 날아드는 화살처럼 아찔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순간, 콘서트 전날 늦은 시각까지 정국과 함께 보냈던 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따라붙는다. 마치 그것이 실수의 원인인 것처럼.
빠르게 몸을 놀려 상황을 무마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펼져진,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사방의 빛. 일순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욱 흘러내린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은 박자를 쫓아가지만, 시선은 불안한 듯 관객석을 떠돌고야 만다.
들켰을것만 같아서.
실수 뿐만이 아닌, 그 실수의 원인과, 그로 인한 프로의식의 결여마저도.
그리고 그 순간 호석은 직접적으로 느끼고야 말았다.
무대 위의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는 자신들을 정면으로 비추고, 무대 아래의 빛들은 물결처럼 자신들을 애워싸고 있었다. 온 사방이 빛이다. 반짝이는 별들처럼 빛나는 저 빛들은 모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이다. 그 시선들 속에 갖힌 자신은, 자신들은, 우리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속임수를 써도 간파를 당할 것이고, 어떤 거짓을 행해도 모두 들통나게 될 것이다.
덜컥, 마음에 커다란 모래주머니가 매달린다.
자신과 정국은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저들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호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저 애정과 열기 어린 시선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가졌다.
"...근데 나는 그냥 형이 너무 좋아서 그냥 자제가 안되는건데..."
"그래도 자제해야지. 안된다고만 하고 노력도 안하는건 좀 아니잖아."
"........"
제 생각을 담아두고 혼자만 조심한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기에, 호석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솔직하게 정국에게 털어놓았다. 그런 제 말을 모면하려는 듯 부루퉁히 꿍얼꿍얼 말꼬리가 길어지는 정국에게 쐐기를 박는 말을 덧붙였더니 이젠 그 입조차 다물어버렸다. 오랫동안 보아온 만큼, 그리고 생각하는 바를 숨기지 못하는 정국인 만큼, 그의 표정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이미 말을 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자신은 언제나 무대에 진심인데, 마치 자신이 프로답지 못하게 행동한 것처럼 말하는 호석의 말이 마냥 잔소리 같고 얄밉게 들리는 것이다. 자기도 노력하고 있고, 그만큼 호석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는데 왜 제 마음을 몰라주고 그런 말을 하는지 섭섭하고 속이 상한 것이다. 그것이 투명할 정도로 정국의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정국아, 그냥... 그냥 난 좀 무서워서 그래."
"......형은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맨날."
"..............."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만약이라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늘 타인의 눈으로 판단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팀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된다. 팬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무대에 소홀해져선 안된다... 그런 뻔하고도 잔소리 같은 말들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호석은 꿀꺽 눌러 삼켰다. 말을 해봤자 결국 정국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들 뿐이다. 그 역시 머리로는 그것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고, 자기 딴에서는 선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말해봐야 소용이 없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훅,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 뒤를 이어 회의감이 고개를 들었다. 연하랑 연애하는게 아니라 꼭 애새끼랑 연애하는 기분이다. 역시 잠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이런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 무슨 핑계를 대던 거절을 할 것을 그랬다. 지금도 이런데 혹시 헤어지기라도 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게될까. 아니, 더 늦기 전에 차라리 지금 그냥........
"...형. 사귀는 티 안내고, 무대 있기 전에 컨디션 조절 잘하면 되는거죠? 예?"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표정 좀... 진짜 설마 그런거 생각하는거 아니죠? 아 진짜, 제발... 제발요."
오랫동안 봐온데다 생각하는 바를 숨기지 못하는 것은 비단 한 쪽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하다. 방금 전까지 불뚝하니 고집을 부리고 있던 정국은 어느 새 자신이 버림 받을 것을 아는 강아지처럼 보이지도 않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호석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란 두 눈의 새까만 눈동자는 안절부절 이리저리 흔들리고,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그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호석의 허벅지 위로 얹혀진다. 그 손길이 뜨거웠다. 그 모습에 또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 버린다. 또 그렇게 마냥 예쁘고 귀여워 보여서 다 해달라는대로 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 안할거라고 했으니까. 조절할거라고 했으니까. 정국이니까.
호석이 마침내 화해하자는 듯 두 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정국은 그 몸을 부둥켜 안아 침대 위로 넘겨뜨렸다. 아래로는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의 부드러움. 위로는 묵직한 정국의 체중과 온기. 맞붙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심장 고동. 코 끝을 스치는 정국의 익숙한 체향.
"정국아, 잘 하자. 응?"
"알았어요... 형은, 형은... 치고 빠지는걸 너무 잘해... 너무 얄미워..."
스스로가 그렇다는 자각은 없으나, 정국의 그 투정이 귀여워서 호석은 목울대를 울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억울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한 듯, 정국은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호석의 쇄골에 아프지 않게 이를 세우고 앙앙 깨물어댔다. 엉큼한 손은 어느 틈에 셔츠 속으로 숨어 들어와 뱃살을 조물딱 거린다. 그것을 물리듯 손목을 잡아 끌어내려 하면,
"...내일은 그냥 귀국만 하고 무대는 없잖아요... 응?"
"안무 연습은 있잖아."
"...오안취 됐음 좋겠다... 아이, 왜 콘서트 하고 왔는데 또 안무 연습을 해야되는 거냐고요, 진짜...!"
꿍얼꿍얼 불평불만을 토하면서도 옷 속으로 들어와 있던 손은 슬며시 빠져나가 겸연쩍은 듯 호석의 옷매무새를 고친다. 그럼에도 완전히 몸을 떨어뜨리는 것까지는 아쉬운지 뺨을 부비적대고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는 정국의 행동이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말 잘듣는 강아지 같아서. 호석은 정국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둘만의 비밀스런 협상은 잘 타결된 줄만 알았다.
조용히 하는 연애라는 것이 이렇게나 롤러코스터 같을 수 있을까.
새로운 앨범 활동이 시작되어 좋은 쪽으로 풀려나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호석은 최근 정국과 자신의 관계가 마치 맹수와 조련사 같다고 생각했다. 정국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저지를 기회를 엿보는 듯 호시탐탐 눈을 빛내고 있었고, 호석은 그런 정국을 어떻게 해서든 다독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했으니까.
미리 변호를 해두자면, 정국이 무대에 소홀하거나 연습을 게을리 하는 것은 단연코 아니었다. 늘 최선을 다했고, 늘 진심이었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보아온 호석이 가장 잘 알고있다. 다만 그 각박한 스케쥴을 소화해 내면서도, 에너지던 제 마음이던 아무튼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주체 못하는 에너지를 호석에게 가감없이 풀어대는 것이 문제였고,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 버거운 호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행동은 더더욱 문제였다.
티를 내지 말라던 호석의 말을 정국은 사흘 걸러 한 번 씩 까먹는 듯 했다. 무대 있기 전에는 컨디션 조절하자던 호석의 말을 정국은 종종 일부러 어기고 싶어하는 양 굴었다. 강짜를 부리면 어떻게 한 번은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것 처럼. 힘들고 피곤하다는 호석의 말이 진짜인지 시험하고 싶어하는 것도 같았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인지, 스케쥴 후 지쳐서 축 늘어져 있는 호석을 쿡쿡 찔러대며 자기를 정말로 좋아하면 뽀뽀를 해달라, 뭘 해달라 조건을 걸고 보채는 양 굴며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하지 말라고 달래거나 으름장을 놓으면 어떤 날은 알겠다고 하고는, 또 어떤 날은 그 말을 더럽게 안들었다. 마치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그렇게.
정국은 정국 나름대로 호석이 이해하지 못할 불만들이 잔뜩 쌓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잔뜩 쌓인 불만들은 심술로 변환이 되어 종종 이상한 애정표현으로 튀어나가기도 했다. 일부러 들러붙어서 귀찮게 굴어 관심을 끌고, 그러다가 하지말라며 혼이 나는 것을 즐기는 듯 했다. 호석이 싫어하는 것들을 은근하게 들이밀어 빈정이 상하거나 속상하게 만들고, 그 반응을 보며 내심 즐기는 것 처럼 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때늦은 사춘기가 부활한 것처럼 지랄맞게 굴어댔다. 스무살이나 되어먹은게 하는 짓은 좋아하는 애를 못살게 굴어 그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초딩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정국에게 휘둘리는 호석의 감정은 오르락 내리락. 어떤 날은 투닥투닥 사랑싸움을 하는 것처럼 새콤달콤 했다가, 어떤 날은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처럼 느껴져 짜증만 치솟기도 했다가.
오르락 내리락,
오르락 내리락,
내리락, 내리락,
내리리리리....
"오늘 입국하고 내일 또 출국이잖아. 그리고 공연 있잖아. 안돼."
"아, 나 오늘 생일이잖아요...! 근데도 내 부탁 안들어주냐, 섭섭하게..."
"너 생일이 뭐. 너 생일이라고 대수야?"
"...................."
정국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잔뜩 주름잡혀 일그러졌다. 서로간에 그동안 참아온 불만과 스트레스가 한가득 쌓여 최고조를 찍고 있었다. 호석은 자신의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올해의 생일이 정국에겐 유난히 특별한 것 역시 알고 있다. 법적으로 진정한 성인이 되는 날이니까. 자신의 생일만을 잔뜩 기대를 하는 듯, 요 며칠간 착한 아이가 되어 호석의 비위를 맞추고 은근히 자신이 성인이 된다는 것을 어필하며 눈치를 주었던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얌전히 구는 것이 속이 편해, 미리 안된다 말하지 않았던 자신에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엉망인 컨디션으로 장거리 비행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컨디션 난조로 공연에 지장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정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에게 올해의 생일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런 공연은 또 있잖아요, 콘서트도 아니고 몇 곡만 하면 되는건데. 근데 내가 성인이 되는 생일은 이번 한 번 뿐인데...! 그거 한 번 한다고 왜 공연을 망칠거라고 생각하는지, 난 진짜 이해가 안가네. 사람이 왜 그렇게 꽉 막혔어요? 왜 그렇게 사람이...예?!"
- 그런 공연.
- 콘서트도 아니고 몇 곡만.
- 그거 한 번.
열이 뻗쳐 올라오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 치솟아오른 열이 정국을 노려보든 눈두덩이로 화악 몰려드는 것 같았다. 목울대를 타고 억울함을 담은 습기가 차오르는 것을 뱉고 싶지 않아 호석은 입을 꾹 다물고 마른 침을 삼켰다. 손 끝이 와들와들 떨려오는 것 같아서 쥐고 있는 핸드폰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이가 악물린다.
정수리가 열이 올라 폭발할 것 같은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무엇인지 호석은 알고 있다. 분노이고, 미움이고, 실망이고, 역정이다. 제 눈 앞에서 억울하면서도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저를 마찬가지로 노려보고 있는 정국이 아주 밉상이었다. 제가 한 말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없는걸까, 뭐가 잘났다고 저런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 분통이 터졌다.
이런거에 휘둘리자고 지금 내가.
지금까지 내가.
내가.
우리가.
너는.
"이따위로 애처럼 굴거면, 그냥 그만하자. 못참아주겠네."
홧김에 한 말일까. 아니면 진작부터 몇 번이나 스스로 삼켜왔던 말일까.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그 말이 참아왔던 숨을 뱉어내듯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정국의 표정은 제가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가득 물음표를 띄웠다가, 짜증을 내려는 듯 한껏 일그러졌다가, 이내 울컥 콧망울을 붉히며 눈물을 그렁였다. 그리고 호석은 더 이상 저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히고 정국에게서 등을 돌렸다.
가지 말라며 자꾸만 붙잡아 오는 정국의 손길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호석은 정국의 호텔방을 뛰쳐나갔다. 더는 못하겠다. 한계치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후회할 일을 선택했던 그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후회할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우려했던 결과를 선택하게 된 자신이 싫었고, 자신이 그런 선택지를 고르도록 만든 정국이 미웠다.
아주 밉상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2021.05.17
배경은 2016년입니다.
뭔가 할 말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하편까지 다 쓰면 후기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키스 어떻게 해요?] 라는 문장을 정국은 "형은 키스 어떻게 하는지 좀 봅시다." 라는 의미에서 말했고, 호석은 "키스라는건 어떠케 하는 거에염? 뿌우" 라고 받아들였다는 소소한 뒷이야기...
포스타입은 여기로
ADBA - DABD (上)
by Impulse "나 이제 스무살이니까! 성인이니까! 형 이제 나랑 사귀어야죠!" 신년 벽두새벽을 맞이하기가 무섭게 호석을 숙소 밖 외진 곳으로 끌고나가 정국이 잔뜩 신이 나서 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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