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홉 전력으로 참여했습니다. (제2회) 주제는 "형이 좋은데"
by Impulse
"...사실 나 아까, 너 잘 때 상황이 너무 웃겨서 사진 찍었는데... 그거 나 가져도 돼? 너 싫으면 지울게."
"아, 아뇨 아뇨! 저, 저도 갖고 싶어요...! 여기 제 번호...!!"
종점에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사진을 몰래 찍었던 것을 핑계로 번호를 교환했다. 아니, 핑계라기보다는, 자신이 한 도촬이 마음에 걸려 솔직하게 양심발언을 한 것에 가깝지만, 제 말에 한술 더 떠서 사진을 공유해 달라고 하는 정국으로 인해 번호가 오가게 되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겠다. 아니, 이건 번호를 따인건가? 어어?
처음 겪어보는 일에 괜히 들뜨기 시작하는 호석이었으나,
"저, 저, 사실은... 그, 쪽, 아니, 그... 머냐. ...전교 부회장 할 때부터, 알았어요. 저 입학식 때부터..."
"아 진짜...?"
정국의 말에 호석은 괜히 머쓱해져 혀를 빼물었다. 아... 그게아니라 선배인 줄을 진작부터 알아서 그냥 허물없이 사진을 공유해 달라고 한 것 뿐이었구나... 그랬구나... 에이, 참.
잘생긴 후배한테 번호를 따였다고 일순이나마 들뜨고 기분이 좋았던 스스로에 대한 민망함과 수치심은 생각보다 엄청나서, 아주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기분에 귀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근자감이었을까. 그리고, 후배에게 번호를 따이는게 기분이 좋을 일인건 또 뭐람?
그 민망한 마음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외려 호석을 한껏 호방하고 호탕한 선배 역할에 취하게 만들었다.
"야, 그, 그럼 그쪽이 뭐야! 선배라던가 형이라던가! 그렇게 불러야지, 임마!"
"아, 에, 어, ...그, 그럼 형... 이요...!"
그렇게 호칭을 결정한 정국은 혼자서 입 속으로 웅얼웅얼 호석이 형, 호석이 형, 옆에서 다 들리는데도 그 말을 그렇게나 공들여서 연습을 한다. 꽤나 신중한 성격인가 싶어 한참이나 그러고 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대뜸 호석을 돌아다보며 한다는 말이.
"호,석이 형...! 저, 꼭 형네 학교 갈게요...! 형이랑 같은 전공, 꼭...!"
그렇게나 연습을 했음에도 수줍음은 미처 다 지우지 못했는지, 귀 끝은 빨갛게 물들여서는. 동그란 눈은 데굴데굴 잘도 굴러다닌다. 그럼에도 그 말 한마디 한마디 마다 온 몸에 힘을 주고, 선언을 하듯 그렇게 꼭꼭 씹은 말을 호석을 향해 건넨다. 일생 일대의 중대한 발언을 하듯 그렇게, 평생의 약속이라도 되는 듯이.
중대한 일은 맞을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 중에 하나인 대학과 그것의 전공을 저를 따라 가겠다고 하는 판이니까. 그 결심이 얼마나 단단하고 계획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쨌던 그렇게 말하는 정국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호석은 자지러질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열심히 해! 내년 봄에 꼭 학교에서 만나자!"
제 웃음이 당황스러웠는지 목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정국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호석은 애정과 응원을 담아 한껏 쓰다듬었다. 정말로 그 말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벌써부터 귀여운 후배가 기다려지는 기대감이 벌써부터 마음 속 한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 그 모습이 눈에 밟혀 호석은 정국에게 간간히 안부 문자를 보내곤 했다.
다만, 제가 보낸 문자를 읽기는 읽어도 답장은 매번 꽤나 뜸을 들인 후에다 오곤 해서, 호석은 어느 순간부터 정국에게 연락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자신이 고3인 학생을 붙들고 귀찮게 하는가보다 싶어서. 우연히 한 번 본 선배일 뿐인데 너무 오지랖 넓게 연락하는걸 꺼려할 것 같아서.
수능 전날에도 그랬다.
시험 잘 보라고 문자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던 호석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 형, 저 형네 학교 입학할 만큼 점수 받을 수 있게 응원해 주세요! 시험 잘 보고 올게요!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타이밍에 도착한 문자가 그렇게나 반갑고, 귀엽고, 기특하고, 또 뿌듯했다.
그리고, 그 때 그 지하철에서의 중대발언이 정말로 허언은 아니었는지, 얼마 후 정말로 합격 고지를 알려온 정국의 연락에 어째서인지 호석은 제가 더 신이 나서는. 문자를 오가는 내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학교에 대해 모르는 것은 무엇이던 물어보라며 호언장담을 하고, 입학하면 밥도 사주겠다며 약속까지 잡았다.
그 약속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호석이었다.
"정호석, 뭐해? 수업 없어?"
강의 시작 전에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해 학교 카페에 들른 남준은, 그곳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호석을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후배 만나기로 했어. 너는?"
맞은편에 앉으려는 남준이 눈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호석은 제 앞의 음료수 잔을 잽싸게 집어들었다. 그리고 길기만 하고 산만하기 그지없다는 평을 자주 듣는 남준의 다리는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을 거하게 걷어찼고, 호석은 눈으로 욕을 했으며, 남준은 습관과 진심이 미묘하게 섞인 사과를 뱉듯이 중얼거렸다. 중학교 때 처음 같은 반이 되고부터 둘은 늘상 이런 식이었다.
"나 좀 있다 수업 들어가야 돼. 근데 넌 무슨 2학년이 되기가 무섭게 후배가 생겨? 무슨 사람 몰고 다니는 피리 같은거 있냐?"
"내가 무슨 사람을 몰고 다녀, 그냥 어쩌다보니 아는 사람이 많은거지. 그리고 너 후배기도 해. 우리 고등학교 나온 앤데, 온 김에 인사나 하고 갈래? 인사만 하고 넌 수업 가."
그러마고 대강 고개를 주억거리는 남준을 보던 호석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갑자기 핸드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눈 앞에 들이밀었다. 호석의 머리 위에 기대어 곤히 잠든 남자 사진. 애인이라도 생겼다고 자랑하는건가 싶어 눈쌀을 찌푸리고 쳐다보니, 누군지 알겠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남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던 호석은 내내 묵혀놨던 이야기를 벼르기라도 한 것 처럼 남준에게 줄줄 풀어내기 시작했다. 얘가 누군지부터 시작해서, 어쩌다가 만나게 된 것인지, 어떻게 해서 이 학교에 저와 같은 과를 들어오게 된 것인지, 얼마나 수줍음이 많은지, 얼마나 귀여운지, 기타 등등. TMI 대잔치.
그런 이야기들을 쉼 없이 이야기하는 호석이, 남준은 어쩐지 낯설고 어색했다. 늘 둥글둥글,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로 친절하면서도 동시에 누구에게나 같은 거리를 두고 지내는 호석의 입에서 이렇게까지나 구구절절 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은 또 처음이라.
"...걔 되게 맘에 들었나보다. 실제로는 한 번 밖에 안만났다면서."
"얼마나 대견하냐, 같은 학교 오고 싶다고 정말로 그걸 해낸다는게. 그리고, 얘 되게 귀여워."
"...그러냐...?"
그냥 우연히 한 번 만나 톡으로만 대화하다보니 제멋대로 환상만 커진건 아닐런지. 남준의 눈에는 그냥 조금 앳된 티가 나는 평범한 남고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호석의 눈에는 또 다른가. 그런 입바른 소리와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남준은 그저 제 손의 커피나 홀짝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석과 남준의 성향은 참으로 극과 극이었어서, 괜히 말을 한 번 더 얹었다가 하루 왠종일 언쟁을 벌이며 감정과 체력을 소비한 날들이 비일비재 했었다. 그 다년간의 경험 끝에, 남준은 말을 해야할 때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아, 정국아...! 여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방금 호석의 핸드폰 속 사진으로 본 사람이 비척비척 저희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호석은 뭐가 그렇게나 반가운지 한껏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대는데, 막상 정국이라는 후배는 몸이 뒤로 반쯤 빠져 있는 것을 꼭 어거지로 다가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면서도 크고 동그란 눈은 바쁘게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저와 호석을 번갈아보는 것이, 마치 토끼가 언제든 도망칠 기색을 찾는 듯 꼭 그랬다. 그렇기에 남준은 생각한다. 제 예상대로 호석은 멋대로 이 친구의 잠깐 본 좋은 면만 곱씹고 그것을 부풀려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정국아, 너 남준이도 기억하지? 얘도 여기 다녀, 과는 다르지만. 인사해. 남준아, 얘가 정국이야. 우리 후배."
"..................세여..."
방금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뭐라고 한거지 싶어 남준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그것이 대강 호석이 시킨대로 한 인삿말이란 것을 유추하고 어, 어,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게 수줍음이 많은건가?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
"아 그랬구나, 학교가 넓어서 처음엔 다 그래. 나도 1학년 땐 그랬어."
"................"
"아이, 괜찮아. 그것보다 정국아, 뭐 먹고 싶어? 고기 먹을래? 아님 뭐 딴거 먹고 싶은거 있어?"
"................."
"그래? 그럼 고기 먹자. 나 고기 좋아해."
남준은 제 친구가 저도 모르는 특기를 가지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텔레파시라던가 아니면 독순술이라던가, 암튼 그런거. 안그래도 소음이 많은 카페에서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말하는 정국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답답할 지경이었는데, 그걸 다 알아들고 대답하는 호석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정국의 눈빛은 또 묘하게 기분 나빠서, 남준도 지지않고 그 눈빛을 받아쳤다. 귀여운 후배라더니,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그렇게 자리를 일어서는 호석을 따라 정국이 함께 일어섰다.
"어, 그래. 나도."
슬슬 강의에 들어갈 시간이 된 남준도 그 둘을 따라 함께 일어섰다. 그렇게 일어서는 남준을, 안그래도 큰 정국의 눈이 더 크게 벌어지며 뚫어져라 바라본다 싶더니, 급작스럽게 얼굴이 씨벌겋게 달아올라 몸을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더니만,
"죄, 죄송해요!!!!! 형, 저 밥 나중에 사주세요!!!!!!"
느닷없이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쌩하니 밖으로 뛰쳐나가 사라져버렸다. 정말 생긴 것 마냥 토끼처럼 그렇게 잽싸게, 휭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부리나케, 빛의 속도로.
"와... 나 쟤 목소리 지금 처음 들었다. 근데 쟤 왜 저래? 너 까였냐? 까였... 오, 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그렇게 솔직하게 감상을 내뱉던 남준은 동의를 구하기 위해 호석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대강 얼버무리는 사과를 던지듯 남기곤 정국과 같은 모양새로 잽싸게 강의실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잽싸게, 휭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부리나케, 빛의 속도로.
도망치는 남준은 중학교 때 일이 생각이 났다.
민트초코를 더블로 쌓아서 먹는 호석을 보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다운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가 언쟁이 붙어서 조금 격하게 말이 오가게 되었다. 열변을 토하던 도중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제 팔이 호석의 손을 쳤고, 몇 번 입에 대지도 못한 아이스크림은 그대로 추락하며 호석의 교복과 신발을 더럽혀 버렸던 적이 있는데.
지금 남준이 목격한 호석의 표정이, 딱 그 때 같았다. 아니, 그 때보다 한 열 배는 더 무서웠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야, 근데 니가 까인게 왜 내 잘못이야?!
남준은 억울했다.
온통 시커먼 색 뿐인 옷장 한구석의 유일한 유채색인 노란색 티셔츠를 꺼내 들어 입어보고, 거기에 맞는 바지를 골라보겠다고 아주 옷장을 다 헤집어놓았다. 방에 전신거울도 없어서 몇 번이나 바지를 갈아입어가며 화장실을 오갔더니 온통 땀범벅이 되어버렸다. 다음주면 만나게 될 호석과의 재회는 그렇게나 정국에게 큰 의미와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 제가 힘껏 뱉어낸 고백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껏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은 정국에게 입시라는 험난한 길을 버티고 걸어가는 데에 커다란 동기이자 힘이 되었다. 내년 봄에 꼭 학교에서 만나자던 호석의 말은 그야말로 정국의 입시의 목적이었고, 자신이 당면한 인생의 난관을 뚫고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그 하나를 붙잡고 정국은 정말로 자신을 불사르듯 입시에 매진했다.
그렇게나 진심이었던 만큼, 입시기간 중 가끔씩 오던 호석의 톡이 정국에게는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따낸 번호인데, 제가 잘못 대답했다가 그 간신히 붙잡고 있는 운명의 실이 공중분해 되어버릴까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래서 연락이 한 번 왔다 하면 태형을 득달같이 붙잡고 옳은 답변을 내놓으라며 아주 닥달을 해댔었다.
"야, 그 사람이 공부 잘하고 있냐고 그러는데, 뭐라고 대답해?"
"아, 그냥 안부 문자잖아, 잘 하고 있다고 그냥 보내...! 아 진짜 찐따 새끼, 몇 번 째야, 별걸 다 물어봐."
"아니, 하 씨... 그렇게 성의 없게 대답하면 그 사람이 싫어할거 아냐! 나 뭐, 무슨 과목 좋아하고, 모의고사 몇 점 올랐고, 내신 얼마나 올랐고, 뭐 그렇게 보내야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니 과외선생이냐... 그냥... 잘 하고 있고, 이번에 모의고사 얼만큼 올랐다. 딱 거기까지만 보내, 괜히 오바 떨지 말고."
"어! 알았어! 아, 야! 근데 그거 한 문장에 다 써서 보내? 아니면 두 번에 나눠 보내?"
".......두 번에 나눠 보내던가... 아 진짜 짜증나..."
"어, 고마워! ...아 근데, 이 사람이 나 좋아하는거 맞지? 안그러면 이렇게 나한테 이렇게 계속 연락해 줄 리가 없을거 아냐. 그러니까 좀, 희망을 가져도 되겠지?"
"........어, 그래, 그 사람이 너 많이 좋아하는거 같다. 안그러면 이런 널 속 터져서 어떻게 참냐? 난 지금 널 죽빵 갈기고 싶어 뒤질 것 같은데."
"그치? 그래서 나 대학 가면 고백하려고."
"사아람 말 조옴 들어어... 넌 애가 멀쩡하다가 왜... 어휴, 아니다, 됐다... 전찐따한테 뭔 말을 하겠냐, 내가."
그래, 고백.
그렇게나 학수고대했던 입학 합격을 확인한 그 때, 정말 세상 모든것이 다 제맘대로 되는 것 같고 제 한 손에 거머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그에게 전했을 때, 제 일이라도 된 것처럼 방방 뛰며 기뻐하는 목소리가 글자를 통해 마치 저에게 한달음에 달려오는 듯 해서. 그것이 그 역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정국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제 자리에서 방방뛰며 설레여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입학하면 같이 밥을 먹자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첫 데이트구나!
그 설레는 마음 탓에, 다음주에 만날 호석과의 데이트를 위해 이렇게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고 자신을 검열하고 마는 것이다. 신발은 어떤 것을 신을지, 머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가방은 뭘 들고 나가야 할지. 신경써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정국은 거울 너머의 자신에게 말한다.
"이거 먹으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이죠...?"
돌았냐.
"형과 저의 만남은, 수학의 공식이자 종교의 율법이고 우주의 섭리 같은 그런거에요."
응, 오만 정나미 다 떨어지는 공식 같은 거에요.
"형, 저와 평생을 함께 하쉴?"
게임 좀 끊고 인연도 끊자고 하겠다.
폭망의 예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정국은 세면대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 잡고 말하기엔 너무 오글거리는 데다가 스스로가 심장 떨려 죽어버릴 것 같고, 그렇다고 가볍게 말하기엔 죄다 장난질 치지 말라며 욕을 먹을 것 같아 정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은 베스트 프렌드인 태형 뿐이었던지라. 온라인 게임을 함께 하는 도중 고백은 어떻게 해야 좋은 거냐고 채팅창에 물었는데.
[태왕사신태 님의 말 : 그냥 쫌! ****!] [태왕사신태 님의 말 : *****!!! 전정국 ***** 진짜 니 ***!!!] [System : 태왕사신태 님이 폭력적인 언어 사용으로 10분간 채팅이 금지되었습니다.] [핸썸킴 님의 말 : 그런건 그냥 솔직하게 질러. 님 성공하면 나 1억 골드 사주기.] [침침따리 님의 말 : 어그로 무시하고 스겜 가시져?] [침침따리 님의 말 : 님존극] [침침따리 님의 말 : 님 존나 극혐 이라는 뜻] |
솔직함. 퍼뜩 머리를 스치는 대사가 떠오른 정국은 당장 게임을 강종하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채팅창에 온갖 쌍욕들이 난무하겠지만, 애초에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깟 게임 안하면 그만이다.
"나는 형이 좋은데, 형은 날 어떻게 생각해요?"
가장 담백한 마음을 담은 말.
이 말이라면 갑자기 저를 싫다고는 안할 것 같고, 제가 원하는 연애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이 돌아와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다. 기분탓인지, 이렇게 말하면 호석도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줄 것 같았다. 이것이 정답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말을 일주일 동안 틈만 나면 입 속으로 외우고,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하고, 꿈에서까지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그랬는데.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학교 카페에 도착했을 때, 퍼뜩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유독 반짝반짝 빛나보이는 그 사람. 혼자만 쨍한 햇빛 아래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그런 그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향해 무언가 신이 나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며 밝게 웃는 호석도.
그것은 무척 정국의 눈에 익숙한 구도였다. 이미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그에게 처음으로 반했던 그 입학식 때부터. 호석의 곁에는 항상 저 사람이 함께 있었다. 키도 크고, 머리도 좋고, 어른스럽고,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모두의 선망과 존경을 받던 저 사람이.
학교에서는 그 둘을 칭하는 수식어가 여럿 있었다. 회장과 부회장. 투수와 포수. 영혼의 단짝. 바깥 사람과 안사람. 만년 부부. 기타 등등.
그런 그 사람이 이곳에서, 또 다시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제가 감히 어떻게 하지도 못할 그 둘만의 시간과 관계를 가지고. 호석에게 다가가는 그 길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함부로 쳐다보지도 말라, 그리 말하는 것 처럼. 어른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옆얼굴이 그렇게나 두려웠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제가 감히 따라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잔뜩 신이 나서 날듯이 왔던 그 발걸음이, 한순간에 무거운 추를 달은 듯 움쩍달싹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그래도 마음 한 켠의 헛된 희망은 우연히 그가 이곳에 있을 뿐이라는 위안으로 제 발을 그에게로 이끈다. 마치 뜨거운 줄 모르고 불 속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이미 그의 옆자리는 저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을 재차 각인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진짜 운명의 상대는 자신일 것이라는 그 얄팍한 희망의 끈은 놓지 못하는 미련함으로.
그렇게 다가가는 저를 발견한 그는 그렇게나 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그와 함께 앉은 저 사람은 마치 쓸데없는 벌레가 달라붙었다는 듯 불쾌감을 담고 저를 바라보는 듯 해서.
정국은 질질 끌리는 다리를 이끌고 겨우 호석의 곁에 다가가 섰다. 그보다 조금 더 가까이 있으면 호석이 저를 더 바라봐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함께.
"정국아, 너 남준이도 기억하지? 얘도 여기 다녀, 과는 다르지만. 인사해. 남준아, 얘가 정국이야. 우리 후배."
"...안녕하세여..."
애써 용기를 내어 그렇게 인사하는 것을, 화가 난 것처럼 인상을 쓰고 쳐다보던 남준이 어, 어, 하고 대강에 대답을 한다. 그 적대적인 태도에 정국은 더더욱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는 것은 또 싫어서, 정국은 그를 피해 얼른 화두를 호석에게로 돌렸다.
"죄송해요, 형. 학교에서 길을 잃어서 늦었어요..."
"아 그랬구나, 학교가 넓어서 처음엔 다 그래."
"아니 그래도... 많이 기다리셨을까봐요."
"아이, 괜찮아. 그것보다 정국아, 뭐 먹고 싶어? 고기 먹을래? 아님 뭐 딴거 먹고 싶은거 있어?"
"형 좋아하는거라면 난 아무거나 다 좋아요."
"그래? 그럼 고기 먹자. 나 고기 좋아해."
웃으며 제게 그렇게 따뜻하게 말해주는 호석이 너무 좋아서. 그 잠깐 만큼은 세상에 저와 호석, 단 둘 뿐인 것만 같았는데. 그런 두 사람을 노려보는 남준의 눈이 너무나도 따가워서, 정국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눈치가 보였다. 저 사람은 왜 여기 있는걸까? 설마 같이 가려고 호석이 형이 부른건가? 하지만 저 사람이랑 같이 간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냥 잠깐 들러서 같이 있던 것 뿐 아닐까? 그냥 제 생각대로 둘이서만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도출해 마음을 다잡아본다.
그러나 그 희망도 허무하게.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어, 그래. 나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저와 호석을 따라 일어서는 남준과. 그런 남준이 자연스러운 듯 별 다른 말을 하지 않는 호석과. 그런 호석에게 서운함과 억울함, 그리고 또 배신감까지 차오르는 정국과. 단숨에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그 마음이란.
그 동안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기대를 했는데.
그런 제 마음을 알기에 그동안 연락도 해주고 오늘 둘이서만 만나서 밥을 먹을 줄 알았는데. 첫 데이트인 줄 알았는데.
그러나 지금껏 그와 나눴던 말들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둘이서만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데이트라는 말도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처음부터 호석은, 남준에게 새로이 알게 된 후배를 소개하는 자리로서 밥을 사준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냥 저 혼자서 들떠서 착각을하고, 그리고 이렇게 멋대로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이 들은 순간,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기나긴 수험기간 동안의 제 노력도, 합격을 했을 때의 기쁨도, 대학에 입학한 이유도, 모든 것이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 처럼 그렇게. 그 모든 것이 잘게 바스라져서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 듯 꼭 그래서. 정국은 이 이상 호석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해요!!!!! 형, 저 밥 나중에 사주세요!!!!!!"
비명을 지르듯 던져버린 그 말을 뒤로 하고 정국은 도망쳤다. 분명 제 행동에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한 호석으로부터. 그런 그를 달래주고 당연하다는 듯 호석을 데리고 사라질 것이 분명한 남준으로부터.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조차 차마 보지 못하게 되어버린 자신으로부터.
다 병신같고 머저리 같고 등신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캠퍼스를 내달리다가 다짜고짜 아무 건물의 화장실, 칸 안으로 뛰어들어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벌써부터 쿨쩍이는 콧망울과 뿌옇게 번져버린 시선 탓에 잠금쇠도 잘 보이지가 않아 몇 번이나 허우적 대다가 겨우겨우 문을 잠그고. 변기 위에 털썩 주저 앉기가 무섭게 에흑, 에흑, 흑, 힉, 히에에에엥--- 하고 울음이 터져나온다.
뭣 때문에 그렇게 병신같이 혼자서 들떴을까. 왜 머저리 같이 그 자리에서 남준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말 한마디 못했을까. 어쩌자고 등신같이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을까. 이것으로 죄다 끝이다. 제멋대로 키워온 첫사랑을 제 손으로 아주 뿌리채 뽑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호석에게 저란 사람은 기껏 불러냈더니만 갑자기 거짓말 하고 약속을 어그러뜨리고 도망쳐버린, 아주 못배워먹은 놈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제가 다 망쳐버린 엔딩이다.
울음으로 껄떡이는 숨을 들이킬 때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그렇게 예쁘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호석의 얼굴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렇게 떠올라서.
그게 그렇게나 마음이 아파서.
그렇게나 야속해서.
수도 없이 연습해 온 그 말의 말미가, 이미 다른 말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나는 형이 좋은데에... 형은, 형은..."
그 달라져 버린 말미가 무섭고도 싫어서, 정국은 목이 쉬어라 울음을 토했다.
.......궁극의 찐따공.
주제에 맞추어 쓰다보니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쓰고 나니 이렇게 되어있네요... 흠좀무.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슴다. 주제가 나와봐야 알겠네영...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것도 같지만, 산으로 간다면 가게 내버려두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된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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