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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홉 전력] P=VI [완결]

[국홉] P=VI #01 #첫 만남

by 1mpulse 2020. 8. 15.

-국홉 전력으로 참여했습니다. (제1회) 주제는 첫 만남

by Impulse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호석은 눈을 깜박였다. 

 

과제와 아르바이트에 지칠 대로 지친 채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자리가 나기가 무섭게 엉덩이를 붙였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쩐지 내릴 곳을 지나친 것 같은 서늘한 감각에 눈을 떴을 때, 제 오른편 관자놀이는 누군가의 어깨에 붙어있고, 삐딱한 제 정수리 위에는 누군가의 머리통이 얹혀있었다. 과연, 내릴 곳을 지나친 것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 서늘함이다.

 

제가 기대어있는, 그리고 제 머리통에 기대어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데굴, 눈을 굴려 옆자리의 사람을 탐색하자면, 어쩐지 눈에 익은 남색 교복 마이에 회색 교복 바지. 그 발밑으로는 가방이 놓여있고. 시선을 돌려 텅 빈 맞은편 자리 창문으로 비치는 것은, 웬 남학생의 어깨에 기댄 채로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는 저 자신과 그런 제 머리통 위에 머리통을 맞대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그 어깨의 주인이다. 

 

어이가 없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서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런 저에게 당연하다는 듯 기대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이 학생도. 

 

아휴, 안쓰럽다. 제 할 일에 지쳐 이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서 완전히 뻗어버린 자신도, 그리고 아마도 공부에 지쳐 잠들어 버렸을 이 정체 모를 학생도.

 

너무 곤히 잠들어 있기에 함부로 제 머리를 치우지도 못하고 입만 삐죽거리고 있다가, 문득 이 어이없는 상황을 기록하고 싶어진 호석은 핸드폰 카메라를 켜 셀카모드로 두고 팔을 뻗어 들어 올렸다. 사진을 찍는답시고 꼬물거리는 저의 움직임에도, 찰칵, 귀속을 파고드는 듯한 셔터 소리가 나도, 이 잠자는 지하철의 남학생은 여전히 세상천지 분간 못하고 잠에 푹 빠져있을 뿐이다. 신기하기도 하지.

 

제가 찍은 사진을 요리조리 확대해가며 호석은 제 머리통 위에 기대어 있는 사람의 정보를 습득한다. 교복 가슴 주머니에 새겨진 문양과 그 주머니 위에 붙어있는 명찰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교복이 눈에 익다 싶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 학생. 명찰 색으로 보건데 3학년. 저의 1년 후배. 이름은 전정국. 아니 근데, 얘는 쪽팔리지도 않나 이름표를 그냥 막 내보이고 다니네. 나 학교 다닐 땐 왠지 부끄러워서 꼬박꼬박 교복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어디, 뉘 집 자식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싶어 얼굴을 확대해서 보자면, 어휴, 애가 뽀얘가지고 멀끔하니 잘생겼네. 학교에서 인기 좀 있겠다 싶은데, 제게는 영 낯선 얼굴이다. 전정국, 전정국이라. 이름과 얼굴을 학창 시절의 기억 속에서 이래저래 되짚어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뭐, 1년 선배라고 해도 모든 후배들을 제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때 마침 다음 역에 대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내릴 곳을 지나친 것 같아 서늘한 기분이 들었기는 개뿔, 지나치기는 애저녁에 지나쳐 이미 다음 역이 종점이었다. 적어도 30분은 이러고 내리 자고 있었다는 소린데, 도대체 얼마나 편하게 잠이 들었나 싶어 호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학생을 깨우려 허벅지를 톡톡톡 손끝으로 건드리니, 제게 기대어 있던 머리통이 비척비척 움직이다가 겨우 정수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에 맞춰 고개를 든 호석은, 한참이나 저와 붙어있던 그 사람의 얼굴을 그제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상황 참 희한하고 재밌네.

 

"잘 잤어요? 우리 근데 곧 종점이야."

 

웃으며 그렇게 말하니 학생의, 후배의, 정국의, 잠이 덜 깬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이내 커다랗게 홉뜨기더니만, 이내 그 하얗고 뽀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솔직히, 참 귀여웠다.

 

 

 

 

 

 

 


 

 

 

 

 

 

 

그 사람을 처음 본 것은, 입학식에서.

 

학생회장이 환영인사를 하는 중에, 그 뒤에서 입을 야무지게 앙다물고 마치 그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동의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 사람. 유난히 머리가 좋은 데다 달변가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을 한다는 것으로 유명한 학생회장의 환영인사 따위는 정국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아버지 자동차 대시보드에 장식으로 놓인 강아지 인형 마냥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 부회장 만이 입학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 그리고 그의 입 양 옆으로 예쁘게 패여있던 보조개도.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함께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던걸까. 같은 중학교에서 함께 올라온 태형이 녀석이 학생회장님의 훈화말씀이 그렇게나 감명 깊었냐며 낄낄대며 비웃었으니까.

 

 

 

 

정국은 숫기가 없었다. 

 

고등학교 첫 수업,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에 고개를 푸욱 숙이고 교탁만 뚫어져라 바라본 채로 '안녕하십니까. 전정국입니다.' 고작 그 두마디를 개미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힘겹게 내뱉고 자리로 후다닥 돌아올 만큼. 

 

특유의 친화력으로 어느새 학생회장, 부회장과 안면을 터버린 태형이 매번 크게 소리 질러 그 둘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이 겁 없는 친구 놈이 부끄러워서, 아니 사실은 그를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어디론가 도망쳐버릴 만큼.

 

한 달에 한 번 있는 학생회 조례에서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만히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고, 지루한 수업 시간,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가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한참이나 눈으로 쫓아다니며, 태형의 입에서 간혹 나오는 그의 이야기에 무심한 척 귀를 기울이면서도, 정작 그의 시야가 닿는 곳에는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마음만 동동거리고야 말 만큼.

 

그렇게나 동경하는 선배라면 졸업식 날 저 대신 꽃이라도 선물하라며 자꾸 저에게 꽃다발을 들이미는 태형에게 싫다고 하다가, 화풀이를 하듯 퉁퉁거리다가, 기어이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주먹다짐까지 하며 싸우고는 3학년의 졸업식이 끝나기도 전에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가 버릴 만큼.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것도 억울하고 속이 상하는데, 앞으로 다시는 학교에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마치 세상이 다 끝나버린 것만 같아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버려서는, 이렇게나 맘 아플 거였으면 진작에 태형의 말을 듣고 인사라도 할 걸 그랬다며 방 안에서 베개에 코를 박고 하루 종일 엉엉 울어버릴 만큼.

 

그렇게나 정국은 숫기가 없었다.

 

그러나 숫기는 없어도 제가 가진 마음이 흔히들 말하는 청소년기의 풋풋한 첫사랑이라는 것 쯤은 안다. 그것이 단순히 멋진 선배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음을, 정국은 안다.

 

그리고 그 파릇하고 절절했던 마음은 그의 졸업식과 함께 졸업해 버릴 줄 알았다. 모의고사 시험지와 성적표에 파묻혀 빛바래고 옅어지며 희미해질 줄 알았다. 지나가는 시간의 유속에 따라 함께 흘러갈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는데.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시간의 지하철. 매번 멀찍이서, 혹은 학교 티비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던 그 사람이 마치 빛을 뿜어내듯 하며 지하철 문을 통해 걸어들어오고, 그리고 앉을 자리가 없어 우연히도 제 앞에 버티고 섰을 때. 그 흘러간 줄 알았던, 희미해진 줄 알았던, 이미 졸업해버린 줄 알았던 그 마음이 마치 마법의 씨앗처럼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그 끝을 올려다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되살아나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푸르르고 한껏 울창해져 버렸다.

 

정국은 고개를 숙이고 제 발 끝을 보았다. 쑥스러움에 시선을 도망쳐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의 반바지 밑단과, 그 밑으로 곧고 쭉 뻗은 하얀 다리와, 알록달록한 색으로 화려한 그 컨버스화. 숙어진 목덜미와 귀끝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운명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운명이라면, 신이시여! 지금 당장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이 지하철에서 내리게 해주시옵시고, 제 앞의 이 사람을 그 자리에 대신 앉혀주십시오!

 

정국의 간절한 믿음이 통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정말로 그리 될 운명이었던 것인지. 

 

제 바람대로 옆자리 사람이 자신의 짐을 추스르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숙인 고개 밑으로 힐끔거리던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감각에 정국은 허겁지겁 손을 들어 제 눈커풀을 꾸욱 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이가 그 자리에 대신 앉는 때에, 정국은 어쩌면 자신이 의자로부터 5센티 정도 붕 떠 있는 것이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리 탓에 어쩔 수 없이 어깨와 어깨가 맞닿고, 조금 벌리고 앉은 다리 탓에 무릎과 무릎이 맞닿고, 지친 듯 후우 내뱉는 그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맴돌 때엔, 이번엔 심장이 입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하철 맞은편 창문 너머로 훔쳐보는 그는, 잠시 핸드폰을 보는 듯하다가, 이내 까물락 까물락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그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마냥 고개를 끄덕이는 강아지 인형 같아서. 정국은 숙이고 있던 허리를 곧추세우고 의자에 제대로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목 아프게 꾸벅대면서 졸지 말고, 이쪽으로 넘어와라. 이쪽으로. 나한테로. 제발. 제발. 아, 제발!!

 

겉으로 숫기는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뻔뻔한 소원을 잘만 빈다.

 

그리고.

 

잠에 빠져 축 처진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꾸부럭 꾸부럭 하더니만, 정국의 쪽으로 기울어져 몸의 무게가 실리고. 까닥거리던 동그란 머리통이 중력에 거스르는 것을 포기한 듯 정국의 어깨에 편안히 착륙했을 때. 정국은 눈을 꼭 감고 벅차오르는 숨을 참기 위해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확신한다. 이것은 운명이 분명하다고.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숫기가 없는 정국은, 제 운명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다. 곤히 잠든 그를 감히 깨울 용기도 없었다. 다만 그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잠시나마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그 사람을 위해 제 어깨를 기울였다. 어깨를 기울이니 자동으로 몸이 그 사람 쪽으로 쏠렸다. 몸이 쏠리니 자연히 머리도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제 어깨 위에 편안히 얹힌 포슬하고 동그란 그의 머리 위로, 저의 뺨이 얹힌다. 코 끝에 마음을 울리는 좋은 향기가 걸린다. 짝사랑하던 2년 내내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해 그저 궁금하기만 했던 그의 체향은, 꼭 그처럼 태양을 한껏 머금은 듯 그래서. 

 

한껏 설레임으로 들뜨는 마음과 그 따뜻하고 포근한 향기에 한껏 녹아버린 마음이 함께 뒤섞인다.

 

 

 

 

정국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잘 잤어요? 우리 근데 곧 종점이야."

 

 

 

 

장난기를 가득 담은 태양이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국홉 전력으로 참여하며 시작된 시리즈입니다.

 

한동안 무겁고 이래저래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 가며 글을 썼던지라, 국홉 전력을 핑계 삼아 크게 생각 없이 이야기를 써보는 훈련을 해보고자 합니다. 원래 글을 쓸 때, 엔딩까지 다 생각하고 중간에 복선이나 사건을 배치한 뒤에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타입인데, 이번 이야기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매주 나오는 주제에 맞춰 즉석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갈 생각입니다. 뭘 깊게 생각해서 쓰지 않을 계획입니다. 

 

이번 편은 첫 만남이라는 주제에 맞춰 계기를 소개하고 두 사람의 인물상을 만들고 다지는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주제에 맞춰 이 위에 뭘 더 얹어가며 이야기가 진행되겠지요. (옴니버스나 단편 식으로 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매번 두 사람 성격이랑 배경 새로 맞춰주기 귀찮아서...)

 

뭐... 중간에 연중하고 나가떨어질 수도 있고,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러려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애초부터 그냥 맘 편하게, 큰 굴곡이 없을 수도 있는 글이구나, 엔딩이 없을 수도 있는 글이구나,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글이구나, 하고 생각해 주세요.

 

포스타입이 편하신 분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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