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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Y, ME, MINE, MYSELF [완결]

[막라홉] i, my, ME, mine, #3

by 1mpulse 2020. 4. 27.

by Impulse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대형 마트에는 한 달 전부터 성조기를 본딴 아이템들과 기념일 당일에 터뜨릴 폭죽들을 쌓아두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식료품 코너에서 살 것만 사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그 잡화 코너 앞에서 태형은 빨갛고 파란 박스에 들어있는 스파클라 폭죽 꾸러미를 괜시리 만지작 거렸다.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고 사는데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태형이 그것들을 선뜻 사기 주저하는 이유는, 그것을 함께 터뜨리며 웃어 줄 사람이 지금 이곳에 없기 때문에. 

 

학교 내부의 전시관에서 인턴 활동을 하게 된 태형과는 달리 호석은 연구실의 단기 직원으로 뽑혀 6월 초순경에는 이미 한시간 반은 차로 달려야 나오는 다른 도시로 떠나고 없었다. 8월 중순 즈음에나 학교로 돌아온다는 호석은 이 학교의 수호신이기라도 했을까. 그가 없는 학교 캠퍼스는 유난히 조용하고 지리하며 비 조차 내리지 않아 가물었다.

 

호석과의 마지막 카톡을 다시금 들여다보며 태형은 괜히 별 내용 없는 과거의 대화 이력을 의미 없이 위로 죽죽 올렸다. 날자를 표시하는 선 아래 가장 먼저 시작되는 대화는 언제나 태형 자신, 그리고 늘 비슷한 말. 

 

'어디에요, 형?'
'뭐해요, 형?'

 

이 말들을 김태형 식으로 풀이하자면 다음과도 같다.

 

'나 하나 안보여도 아무렇지 않나요.'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나요.'

 

너무나도 묻고 싶은 말이지만, 동시에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답이기에 상처 받기 두려운 태형은 늘 그 직접적인 질문을 피하는 대신 엉뚱하고 뜬금없는 동생을 연기하며 인공위성처럼 호석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을 선택했다. 호석에게 있어 스스로를 안보이면 허전하고 생각나게 만드는 존재로 각인시키기 위하여. 그렇다면 이 끝없는 공전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호석이 태형을 끌어당겨 제게로 착륙 시키거나 혹은 태형이 먼 우주로 나가 떨어지거나 할 그 때. 

 

언젠가 마음의 연료가 다 떨어지게 된다면 태형이라는 인공위성은 더이상 호석을 쫓지 못하고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남겨져 누군가가 수거해 갈 날만을 끝없이 기다리는 고철덩이가 될 것이다. 그 남겨진 공허함은 분명 세상 어느 것보다도 차갑고 세상 어느 것보다도 어두울 것을 알기에, 태형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가끔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는 비참함 보다도, 이미 진작에 닳아 없어진 자존심 보다도, 호석에게서 떨궈져 나와 맞이하게 될 공허함이 지금의 태형에게는 더욱 큰 공포였다. 그렇기에 호석의 관심 혹은 애정이라는 마음의 연료가 태형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다.

 

호석이 관심을 주지 않으면 자신이 관심을 끌면되는 것이다. 애정을 주지 않으면 애정을 받을만한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태형이 몇 번째일지 모를 '뭐해요, 형' 이라는 함축된 문장에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호석에게 보냈다. 아니, 보내려고 하던 참이었다.

 

-태형아, 형 없이 잘 지내고 있냐?

 

일순 제 눈을 의심했다. 과연 제가 받은 메세지가 정말 호석에게서 온 것이 맞는지 확인차 카톡 어플을 두 세번 껏다 켜보았다. 아니, 아예 핸드폰의 전원 자체를 한 번 껐다 켜보았다. 호석이 보고싶어 호석과 나눈 대화를 보고 있다가 호석에게 메세지를 보내려는 바로 그 참에 호석에게서 메세지가 오다니. 꿈만 꾸던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것 같았다.

 

-형!! 보고 싶어요!!
-나도 너 없으니까 심심하다. 여기 시골이라 재밌는거 아무것도 없어.

 

이곳에서도 캠퍼스 붙박이 생활만 하던 호석에게 재밌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불쑥불쑥 호석을 찾아오던 태형이 그곳에는 없기에 재밌는 것이 없다고 한 건 아닐까. 그래서 카톡을 먼저 보낸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이 결실을 맺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연료가 그것만으로도 가득 찼다. 태형의 행복회로가 미친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메세지를 치는 손가락이 신이 났다. 

 

-내가 지금 갈게요!!

 

 

 

 

호석이 보내준 좌표를 따라 차로 한달음에 달려 도착한 곳은 커다란 호수가 보이는 공원이었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것인지 공원의 도로를 따라 노점상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그곳으로 모인 듯 북적였으며, 이미 늦은 저녁임에도 주차장은 가득 차 있었다. 빼곡한 주차장에 겨우 차를 대고 고기 굽는 냄새와 자욱한 연기 속에 어디로 가야할 지 어리벙벙해 하던 태형은 뒤로 덥썩 업혀오는 무게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이고오, 우리 태형이! 형 생각해서 진짜 여기까지 와준거야? 말만 온다는 줄 알았는데."
"아이, 형. 당연하죠. 내가 형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와, 근데 오늘 여기 뭐에요?"

 

약 한 달 만에 보는 호석의 얼굴이 조명에 비쳐 말갛게 빛나 현실감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한 여름 밤의 꿈이 아닐까. 내일 아침 아무도 없는 안개 낀 공원에서 혼자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두리번 거리는 태형을 붙잡아 호석은 사람들 속으로 이끌어갔다.
이동하는 걸음마다 미국 도시 생활에만 익숙했던 태형에게 낯설은 교외의 모습이 정겨운 얼굴로 맞이했다. 곳곳에 장식된 성조기와 반짝이는 조명을 달고 움직이는 간이 놀이기구들.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단것들을 파는 가판대과 소세지와 고기를 굽고 있는 노점상들. 어둑한 호숫가를 둘러싼 무리들의 여유로움과 행복감을 가득 담은 말소리, 웃음소리들. 뜨끈한 열대야에 배어나오는 땀 마저도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공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빨리 가자. 조금 있으면 시작할거야."

 

어린애처럼 주변을 구경하느라 바쁜 태형의 손에 그릴 소세지를 들려주는 호석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무엇이 시작한다는 것일까.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쨋든 호석이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며 이끌어가는 곳이라면 분명 자신에게도 좋은 곳일거라며 태형은 얌전히 이끌리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신기한 주변과 제 손에 들린 소세지에 정신이 팔려 느려진 태형의 걸음이 답답했던지 호석이 손을 붙잡고 잡아 끌었다. 꼭 붙잡힌 손의 부드러운 감촉과 둘이 사이좋게 들고 있는 소세지와 뜨거운 여름 온도에 발개진 호석의 얼굴 모두가 태형에겐 온전히 처음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런걸 두고 세간에서는 데이트라 하지 않던가? 쑥스러움과 설레임에 푹 수그린 고개 밑으로 싱글벙글 거리는 제 얼굴이 바보 같을까봐 소세지를 들은 손 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호숫가의 한 켠에 세워진 나무 계단 위로 올라간 둘은 난간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호석과 태형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계단 위에 삼삼오오 줄지어 서 있었다. 계단 뿐 아니라 호수 주변으로도 돗자리를 깔은 사람, 피크닉 의자를 가져와 앉은 사람 등등 많은 이들이 즐거운 얼굴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형, 여기서 이제 뭐 시작해요?"
"오늘 독립기념일이잖아. 이 동네는 아예 시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더라고. 이제 곧 시작할 시간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수 한켠에 위치한 스피커에서 둥둥 거리는 북소리와 묘하게 유행이 지난 뉴에이지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제히 사람들이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고, 이내 박수 소리와 휘파람 소리로 이벤트의 시작을 환영했다. 태형은 제 옆에서 함빡 웃으며 박수를 치는 호석의 상기된 얼굴을 돌아보았다. 호석은, 왜,

 

"형, 이렇게 재밌는 이벤트가 있으면서 왜 여기 재밌는거 아무것도 없다고 거짓말 했어요?"

 

평소 같으면 마음에 뭍어버리고 말았을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은, 아마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가슴을 둥둥둥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태형의 질문에 호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거짓말 아닌데? 진짜로 난 너가 여기 없어서 재미 없었다니까."

 

피유우우우우.... 펑!!! 퍼버버펑! 타닥...! 타다다닥....!
처음으로 쏘아 올려진 대형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소리였을까 태형의 마음이 터지는 소리였을까. 태형의 얼굴이 붉은 것은 하늘에 빨간색 불꽃이 수놓아졌기 때문일까 마음에 빨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기 때문일까. 펑, 펑, 펑, 펑, 태형의 펄쩍이는 심장소리를 따라 불꽃이 연달아 터지며 흐드러지게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호석을, 태형은 참지 못하고 뒤에서 꽉 껴안았다. 호석의 온기와 자신의 온기와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의 열기와 한 여름 밤의 열대야가 합쳐져 맞붙은 가슴과 등, 팔에 진득히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태형은 호석을 놓지 못했다.  

 

호석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듯 고개를 파뭍고 귓가에 속삭이듯 울먹이던 목소리는 밤하늘을 울리는 불꽃들의 함성을 이길 수 있었을까.

 

"형이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오직 나 하나만."

 

 

 

 


 

 

 

 

표면적으로는 싸우지도 않고 동지의식이라며 포장을 하던 때도 있었으나, 길어지는 적과의 동침은 서서히 세 사람의 교묘한 신경전과 정치질로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셋 중 가장 정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지민이었다.

 

"아, 태형아. 내가 몇 번을 말하니. 다 쓴 냄비 씻어서 말리고, 말랐으면 찬장에 넣으라고 했잖아. 호석이 형은 원래 그릇이나 냄비가 건조대에 내내 널려있는거 싫어한다고."
"아... 그거 좀 있다 넣으려고 한건데..."
"정국아. 너 화장실에서 속옷이랑 양말 빨았으면 네 방에다가 말리란 말이야. 호석이 형은 원래 너저분한거 싫어한다고."
"그냥 좀 까먹고 빼트리고 나온건데..."

 

지금까지 다른 생활을 하던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이다보니 생활 패턴이 각자 다를 수 밖에 없었고, 지민은 호석과의 오랜 생활을 통해 그가 집에서 어떤 행동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호석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 않은 태형과 정국에게 있어 호석의 생활패턴에 대한 지민의 정보는 대단히 유익한 것들이었다. 태형과 정국은 그러한 정보를 알려주는 지민에게 무척 고마워했을 것이다. 매번 말 끝마다 붙이는 그놈의 사족만 없었더라면.

 

"내가 호석이 형이랑 벌써 몇 년 째 같이 살고 있는데. 형은 원래 그런거 싫어해."

 

말 뒤에 '너넨 모르지, 메롱' 이라는 말만 안붙어 있다 뿐이지, 대놓고 생색이란 생색은 다 부리며 태형과 정국을 놀리는 뉘앙스가 두 사람의 신경을 팍팍 긁어댔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아들을 낳은 첩에게 괄시 당하는 본처의 기분을 실컷 대리체험하는 둘이었다. 물론 지민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낳은 본처로서 감히 제 집에 눌러 앉아 밥만 축내는 첩들을 내쫓고 싶은 기분이겠지만.

 

평소 그런 울분을 암암리에 공유하던 정국과 태형 중, 결국 참다 못해 먼저 터져버린 것은 정국이었다.

 

"형 맨날 그 소리 하는데, 나는 그럼 호석이 형이랑 벌써 몇 년 째 같이 공부하는지 알아여?! 호석이 형이 카페테리아의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알그등? 호석이 형 아침 메뉴로 버섯이랑 콘이랑 치즈랑 살사 넣은 오믈렛 제일 좋아하는거 나도 알그등~?"
"아니야! 호석이 형은 카페테리아 메뉴보다 나랑 같이 일하던 한식당에서 한식 먹는 걸 제일 좋아해! 그리고 호석이 형은 약간 이런 국물 요리 같은거 제일 좋아한다고!"

 

다 함께 사는 집에 콜로세움이 개장되었다. 전투사는 지민, 태형, 정국, 그리고 무기는 하찮은 세치 혓바닥. 이 경기의 규칙은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호석에 대한 잡지식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정신적 데미지를 입히는 것, 그리고 관전 포인트는 각 인물이 얼마나 호석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가, 이다. 
현재 각자 한 번씩 공평하게 딜 교환을 나눈 상황. 정국이 지민에게 자신의 수를 읽힌 것과 태형의 입에서 나온 새로운 정보로 인해 약간의 정신적 타격을 입었으며 턴은 정국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이번 공격에서 제대로 딜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 정국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수치스러운 별칭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국은 필사적이 되었다.

 

"호석이 형 수업 시간에 어떻게 조는지 모르죠? 손 일케 앞으로 모으고 그 위에 이마 대고 자는데 꼭 절 하는거 같아서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죠? 그러고 깨고 나면 이마가 버얼게. 그럼 그거 가지고 막 내한테 부끄럽다고 앙탈부리는거 본 적 있어요? 없잖아! 그뚜 모르면서 뭐 맨날 형이랑 몇 년 째 같이 살고 있다고 씨부리쌌는데?!"
"수업 시간에 조는 거가 무슨 대수라고. 난 형이랑 한 침대에서 같이 잔 적도 있그등?!"
"형은, 형은 조수석에 앉을 땐 아무리 졸려도 잠들지 않아! 이제 약간 잠 오려고 할 때 잠들지 않어려고 눈 비비고 하품하는게 얼마나 귀여운데!"
"그건 너랑 같이 있으면 재미 없어서 지루해 하는 거겠지!"
"아냐!!! 형이 나보고 나 없으면 재미 없다고 그랬었어!!!"
"형, 립서비스란 말 알아여?!"
"어어?!"

 

갑자기 정국이 지민이 편으로 돌아서 태형에게 화살을 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타겟이 된 태형은 갑자기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지민의 생색과 괄시에 맞서기 위해 정국과 한 편이 되어 지민을 공격하고 있다고 착각했 생각했는데 갑자기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정국이 자신의 말을 틀리다고 비꼬다니, 뒷통수가 얼얼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안그래도 지민은 호석과 함께 살은지 몇 년, 정국은 호석과 함께 공부한지 몇 년 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스스로 호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는 이상 접점이 적은 태형은 평소에도 지민이나 정국이 자신의 평소 겪은 호석에 대한 에피소드를 자랑질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없던 컴플렉스가 생기려 할 정도로 자신감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껴왔었다. 지금껏 그렇게 자신감이 떨어질 때 마다 호석이에게 들었던 소중한 말로 애써 회복하고 다독여 가며 희망을 잃지 않아 왔는데, 그 말이 눈 앞에서 두 사람에게 부정 당하고 발기발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너네 지짜 왜 그러냐?! 형이, 형이 나한테 그랬다는데 왜 늬들이 머라해~! 늬들은 형한테 같이 있으면 재밌다는 소리 들은 적 있어?!"
"야, 정말 재밌으면 그런 소릴 왜 하냐? 형은 원래 남들 기분 좋아지는 말들 잘 해. 진짜 바보 아이가?"
"아, 지민이 형. 진짜 유치해. 태형이 형이 그랬다면 그런가보다 하지. 맨~날 호석이 형은 원래~ 원래~."

 

정국은 눈치가 빠르며 태세전환에 능했다. 립서비스라는 말은 저가 먼저 한 주제에 지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태형을 두둔하는 타이밍이 환장할 정도로 아주 기가 막혔다. 그러나 정국이 커버하기엔 이미 늦은 듯, 이미 태형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은 딱딱히 굳었고, 입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씰룩씰룩 거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박지민, 너 호석이 형한테 일를거야. 호석이 혀엉!!"
"아, 김태형! 미안하다고오! 야아~, 아 진짜! 호석이 형한테 왜 말해! 야!!"
"지민이 형 인제 큰일 났다."

 

태형은 호석의 방 커튼을 벌컥 열어젖히고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호석의 배때기에 냅다 몸을 날렸다. 그리고 꾸웩 하고 호석이 개구리 밟히는 소리를 내건 말건 방금 전 있었던 사건 중 얼마나 지민이 저에게 못된 말을 하였는지, 거기에 정국도 거들어서 저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를 주어와 목적어가 엉멍진창 뒤섞인 말과 그렁그렁 거리는 눈망울로 열심히 어필을 해댔다. 태형을 미처 못 막고 덩달아 따라들어온 정국과 지민은 좌불안석이 되어 아니, 그게 아니라 라는 말로 변명하기 급급했다.

 

"나보고 바보라고 하고! 막 형은 원래 입에 발린 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그러고! 지민이가! 정국이는 나보고 립서비스도 모른다고 그러고! 나는 형이 나 없으면 재미없다고 했다는 말 밖에 안했는데!!"

 

...이걸 이렇게 창조논란을 만든다고...?
지민과 정국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늬들 한동안 사이좋게 지내더니 왜 그르냐? 그리고 애 보고 왜 바보라고 그래. 사람 상처 받을 소리 함부로 하는거 아니다. 자꾸 싸우지들 말고. 자꾸 싸우면 이 집서 다 내쫓아 버릴거야."

 

억울하다며 호석의 허벅지에 들러붙어 앵앵대는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지만 지민과 정국에겐 호석의 훈계나 으름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호석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무기로 허벅지를 베고는 둘을 올려다보며 메롱메롱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놀리고 있는 태형의 표정이 문제였다. 거기다 대고 쟤 봐요! 라고 소리쳐 봤자 또 우는 척 할 것이고 그럼 자신들이 더 나쁜놈들이 될 것이 뻔하기에 둘은 부들거리며 태형을 노려보고 있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여우같은 김태형...!

 

지민과 정국이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다. 둘은 호석에게 붙어있을 명목이 있어 유지된 관계일 수 있어도, 태형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 만으로 호석과의 친밀한 관계를 몇 년이고 유지해 온 인물이었다. 그러한 태형을 만만히 본 댓가를 오늘의 정치질로서 톡톡히 치룬 두 사람이었다.

 

그만 나가라는 호석에게 지민이 못살게 굴어서 돌아가기 싫다며, 여기서 자겠다고 버팅기는 태형을 지민과 정국이 이를 꽉 깨물고 협박 겨우 달래서 나간 후, 호석은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윤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도화살을 조심하라 했지.

 

룸메이트를 들이게 되면 도화살 때문에 바람 잘 날 없을거라기에 주변에 없던 여자들이 생겨서 말썽이라도 생길 줄 알았더만, 여자는 커녕 동물 암컷 하나 조차 호석의 주위엔 없었다. 오히려 룸메이트들을 들이기 전보다도 훨씬 호석 주위엔 여자라는 존재는 씨가 말라 있었다. 환상의 성별, 여자. 여자요? 그게 뭐죠? 정말 존재하긴 하는건가요?
그렇기에 호석은 더더욱 윤기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도화살이야? 이게 어떻게 도화살이야? 이건 육아우울증이라고 해야하는거 아냐? 

 

...대체 도화살이 뭐야?

 

 

 

 


아... 겨울에 여름 이야기 쓰는거 겁나 힘든거.... 

 

옆집: 오... 저 집은 보육원인가...? 그런데 애기들 치고는 스무살은 훨씬 넘어보이네?
워킹 박지민, 러닝 전정국, 그리고 플라잉 김태형.... 또르르... 

 

아 이런 때에 국홉 텐트 대란 시즌 2...... (마른 세수)

[2019.03.16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