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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Y, ME, MINE, MYSELF [완결]

[막라홉] i, MY, me, mine, #2

by 1mpulse 2020. 4. 27.

by Impulse

 

 

 

폭설이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하얀 것들이 사흘 내내 내려 지붕을 덮고 나무를 덮고 길을 덮었다.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썩은 나무는 쓰러져 길을 막았고, 길을 뚫기 위해 윙윙 시끄럽던 제설차는 둘째날 이후 집 앞을 다니지 않게 되었다. 8명의 하우스메이트들 중 본가가 있는 6명은 진작에 눈폭풍이 오는 지역으로부터 탈출을 했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유학생 신분인 지민과 호석만이 덩그러니 넓다란 집에 남아 전기가 끊기고 핸드폰이 불통이 되며 교통이 마비되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흔히들 상상하는 아포칼립스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무인도에 둘만 남으면 어떻게 하려냐는 망상은 허황된 것이 아니다. 가스는 있음에도 전기가 끊겨 돌아가지 않는 보일러 탓에 냉골이 된 방에서 오리털 파카를 껴입고 동파가 되지 않도록 틀어놓은 물이 쫄쫄쫄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라면으로 사흘째 끼니를 연명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지구 종말의 순간을 맞이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밤중인데도 밖이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폭설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며 지민이 물었다.

 

"형, 이러면 자면 안되는거죠? 얼어 죽는다고. 그래서 알몸으로 덥혀주고 해야 하는거 아녜요?"
"왠 알몸?? 그런 이야기에선 저체온증으로 죽으니까 그러는건데, 우린 밥도 다 먹었고, 오리털 이불도 있고, 따뜻한 옷도 입고 있잖아. 졸리면 걱정말고 몸 따뜻하게 하고 자, 지민아."

 

지구 종말의 순간에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개수작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것은 인류 모두의 공통점일 것이 분명하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이 폭풍이 언제 다 지나갈지 장담할 수도 없고, 폭풍이 지난 후 얼마가 지나야 전기가 회복 될른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태임에도 그저 이 집에 저와 호석이 둘 만 남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심취해 이대로 세상이 끝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중증이었다. 

 

"인터넷 끊기기 전에 본 예보에서는 오늘 밤이면 눈태풍 지나간다고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내리는 걸 보면 평생 이렇게 눈만 올 거 같아서 좀 무섭다."
"그럼 형이랑 나랑만 이 집에서 영원히 둘이서만 사는거네요. 눈이 지붕만큼 쌓여서 밖이 안보이는 집에서 평생. 되게 낭만적인 거 같지 않아요?"
"그 전에 죽겠지."
"죽을 때는 손 잡고 같이 죽어요, 형. 이 집이 우리의 관이 될 거에요."

 

좋아하는 사람과 한날 한시에 최후를 맞이하는 것 만큼 로맨틱한 것이 어디있을까. 지민은 호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머리 위로 호석의 머리가 얹혀져 오는 것이 기쁜 한 편, 지민은 어쩐지 스스로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 듯 서글퍼졌다. 아무리 솔직한 말로 고백을 해도, 열띤 마음을 가지고 온 몸으로 구애를 해도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처럼 호석에게선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나의 사랑하는 호석이 형, 얼마나 더 많이 제 마음을 보여야 반응해 주려나요.

 

호석의 청각은 지민이 고백을 할 때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딘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보내버리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싫다 좋다 감정적인 느낌이 아닌, 얘가 또 이런 소릴 하는구나 싶은 무덤덤한 반응은 지민을 하루에도 열 두 번씩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무간지옥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싫다는 소리를 하거나 거부하고 무시하면 쉽게 포기하고 떨어져 나갈텐데도, 제가 하는 말이라면 꼬박꼬박 대답해주고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웃어주는 호석은 지민이 포기하게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받아주지도 않는 희망고문 그 자체였다. 만일 상냥함 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호석은 지민을 진작에 골백번도 넘게 죽였을 것이다.

 

"형,  오늘은 같이 잘까요?"
"그럴까? 추우니까 같이 자는게 효율적이고 괜찮겠네."

 

이러한 것들. 지민이 자신에게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다면 이런 식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곁을 내어주는 그 틈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침대로 올라가고 있는 몸뚱이와 제 귀에도 들릴만큼 크게 요동치는 심장소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호석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끈질기게 메여있는 미련한 자신의 마음만 재차 확인시켜 주는 지표일 뿐이다. 

 

침대에 올라 제 팔을 호석의 머리 밑으로 밀어넣고 천장을 향해 하아아 한숨을 내뱉자 하얗게 설익은 입김이 솟아 올라 어둠을 배경으로 허망히 흩어졌다. 

 

그것이 마법처럼 천장을 무너지게 만들어 이대로 둘이서 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야, 지민아, 일어나 봐! 눈 그쳤어!!"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쨍하게 푸른 하늘과 포근한 겨울 햇살이 사흘간의 고난을 버텨낸 이들을 맞이하고 들어섰다. 간만의 햇빛이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소복한 흰 눈에 반사되어 블라인드를 열어둔 커다란 창문 너머의 방 안을 온통 번쩍번쩍 비춰댔다. 새하얀 그 빛이 가진 순수함은 간밤의 어두웠던 지민의 마음을 모두 양지로 끌고 나올 정도의 큰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반사광에 피부가 타지 않게 썬크림을 바르고, 썬글라스를 쓰고, 부츠를 신고,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두르고. 눈폭풍으로부터 해방된 둘은 아무렇게나 소리를 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벅지까지 푹푹 파이는 눈 속을 휘적휘적 헤집고 다니며 손에 잡히는 눈을 마구 그러모았다가 흩뿌렸다가 서로에게 집어던졌다. 집 현관 계단에서 점프를 하여 눈 밭으로 뛰어들어 굴렀고, 되는대로 잔뜩 굴려서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었다. 마음이 가는대로 실컷 놀고 실컷 웃었다. 집 앞마당을 가득 메운 둘 만의 작은 소동은 즐거움을 한껏 여물고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땅을 가로지른다.

 

"호석이 형! 눈 때문인지 오늘 많이 예뻐보이는데요?"
"그래? 그래서 그런가? 너도 오늘 좀 달라보인다!"

 

깔깔대는 호석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벅차오르는 마음이 몸을 지배하듯 제 한 몸을 힘껏 날려 호석을 덮치듯 밀어 넘어뜨렸다. 푸우욱, 새하얗고 높다란 눈은 짓누르고 들어간 두 사람의 무게에 비례하게 깊숙히 파여 차가운 기운으로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푸슬푸슬 호석의 얼굴 위로 자꾸만 떨어져 내려오는 눈가루들을 장갑을 벗은 두 손으로 조심스레 치우고 그 발갛게 열 오른 뺨 위에 조심스레 입술을 떨궜다.

 

"나의 사랑하는 호석이 형. 정말 많이 좋아해요. 정말로, 많이요."  

 

 

 


 

 

 

 

원치 않던 라이벌들과의 기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첫 날 다같이 만나 소개를 받고, 상호간에 이 집에 머무르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방을 정하느라 개싸움을 하고, 그 싸움에 꼭지가 돌은 호석이 집 밖으로 짐들을 내던져 버리는 것을 셋이서 뜯어 말린 이후로는 세 사람의 표면적인 다툼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표면적'인 다툼은.

 

"호석이 형은 호석이 형이고, 앞으로 한동안 같이 살게 될 처지인데 집에서조차 날을 세우고 험악하게 살면 상호간에 피곤하지 않겠니. 우리 페어하게 살아보자."

 

말을 그렇게 하는 지민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제일 손해보는 장사를 한 것 같은데 왜 이런 말을 먼저 나서서 해야하는지 억울함에 속에서 피눈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당장에 혼자 방을 쓰는 정국은 둘째치고 태형과 방을 함께 써야 하는 자신은 표면적이던 어쨋던 평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맞아요. 집은 쉬는 공간인데 여기서 싸우면 서로 피곤하기만 하지."
"나도 공감해. 근데 너는 팔 걷어부치지 마. 무서우니까."

 

정국이 팔을 걷어부치며 팔짱을 끼우는 모양새가 긍정적인 말투와는 달리 꽤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태형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목구비는 동글동글하니 세상 귀엽게 생겨서는 몸은 당장 양 손에 지민과 태형의 멱살을 하나씩 쥐고 짤짤짤 흔들 수 있을 정도로 다부졌다. 대체 이공과 대학원생에게 타자치는 손가락과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목 외에 저딴 근육이 뭣에 필요한지 1도 모르겠다며 지민과 태형은 진작에 암묵적인 동맹을 꾸렸다. 각자의 생활을 고려했을 때, 셋 중 가장 호석과 함께하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정국이었기에 지민과 태형은 어떻게 해서든 정국을 호석에게서 뜯어내야만 할 공동의 목표가 있었으며, 룸쉐어는 그 목표를 위한 작당모의를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아울러 호석의 방 구조를 생각한다면 이 동맹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거실에 커튼으로 칸막이를 만들어 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호석은 다른 룸메이트들의 접근이 용이해 전략적으로 대단히 취약한 위치에 있으므로, 혼자서 방을 쓰는 정국은 반드시 동향 체크가 필요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같은 방을 쓰기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는 지민과 태형은 정국이 야음을 틈타 홀로 호석에게 접근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쩡꾸가! 뭐하늬?! 형들이랑 놀짜~~!!"
"얘들아, 내게 닌텐도 스위치가 있어! 함께 놀자꾸나!"
"아.................................................."

 

호석의 방에 은근슬쩍 들어가려는 정국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둘에게 붙잡혀 질질 방으로 끌려들어가는 정국의 얼굴에 원통함이 가득했다. 그 억울한 얼굴을 보며 고소해 하는 것이 지민과 태형의 즐거움이자 희열이었다.

 

"아, 진짜! 나 호석이형한테 물어볼거 있단 말이에여...!!"
"조용히해. 그런거 카톡으로 물어봐도 되잖아."
"맞아! 집에 있을 땐 페어하게 하자고 그때 그랬잖아. 어어딜 맘대로! 이노마 혼나야겠네!"

 

결국 정국의 손에 게임패드를 쥐어주고 티비와 마주하고 있는 침대 위에 어거지로 앉혀서는 좌 태형 우 지민이 단단히 도망 못가게 붙잡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이 시작되어도 한동안 쫑알쫑알 불만이 많은 정국과 그 말을 좌에서 반박하고 우에서 받아치며 한동안 지글지글 와글와글대더니만,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불타오르는 승부욕에 셋은 걷잡을 수 없이 시끄러워졌다. 플레이 하는 정국의 혼잣말, 지민의 타박과 태형의 훈수는 정도를 모르고 볼륨을 올려갔고, 드디어 미션을 클리어 했을 때 터져나오는 셋의 함성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호석조차 무슨 일인가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다.

 

"야, 너네 되게 재밌게들 논다. 너네 싸울까봐 걱정했었는데 괜한 생각이었었네. 보기 좋다, 늬들."
"어, 형! 형도 열루와서 같이 해여!"
"형! 여기! 여기 자리 있어요!"
"형님, 이 자리가 화면 제일 잘보입니다."

 

셋이 하나같이 제 옆자리를 손으로 땅땅 쳐대며 앉으라고 권유하는 모습이 호석의 눈에는 마치 조련사의 손에 일사분란하게 앞발을 쳐대는 물개들과 겹쳐보였다. 꺼응, 꺼응, 꺼응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도 같은데, 이것은 환청인가 더빙인가. 제멋대로 연상되는 이미지와 소리 탓에 호석은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아끼는 세 동생들의 재롱이 이렇게나 귀여울수가.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구나. 정말, 하나만 있어도 귀여운데 셋이 모여있으니까 삼십배로 귀여운 것 같아. 모여서 살길 진짜 잘했다. 하하하하!!
그것이 호석의 정직한 감상이었다.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한 호석은 여전히 저와 함께 놀기를 바라는 초롱초롱한 여섯개의 눈동자를 향해 말했다.

 

"아냐, 난 좁아서 별로. 너희끼리 해. 너무 시끄러우니까 문 닫을게. 재밌게들 놀아."

 

그리고 아주 담백하게 문이 닫혔다.
문 틈 사이로 사라지는 호석의 모습을 보며 셋은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연심이 공중에서 산화 되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닫혀진 문을 바라 볼 뿐이었다. 한국 속담으로는, 닭 쫒던 개가 지붕을 쳐다본다 하였던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크으으으으읍........."

 

누구인가? 지금 누가 코 먹는 소리를 내었어?

 

순도 100%의 안타까움만을 축출한 코 먹는 소리는, 지금 이 순간 세 사람의 심경을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적절한 사운드였다. 그것을 계기로 셋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얼싸안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했다. 하나의 목표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멋지고 애달픈 우리들이라는 구구절절한 정신승리 아래 똘똘 뭉쳐 투철한 동지의식과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가득한 마음을 부여잡고 솟구쳐 나오는 콧물을 삼키고 흐르려는 눈물을 꾹 눌러 참는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지민, 태형, 정국이야말로 사랑 없는 이 각박한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찌질한 비련의 주인공.

 

아니, 그냥 찌질했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집에 전기도 가스도 수도도 안되는 비상시에는 학교로 대피해야 합니다. 혹은 평소 익혀두었던 대피소라던가요. 원래 경보 떴을 때 바로 가는게 좋아요. 이렇게 집에 남아있으면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 안좋은 최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갑분공익교육)

 

아, 지민이는 비즈니스 전공 태형이는 미술사학 전공이라는 그닥 몰라도 상관없는 설정... 

[2019.03.0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