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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주세요 [완결]

[국홉/홉른] 사랑을 주세요 #08

by 1mpulse 2020. 4. 27.

by Impulse

 

 

 

어떡하지.
최근 호석이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생각하는 문장이다.

 

요 며칠간, 정확히는 지난번 정국이 호석을 자는 중에 찾아온 이후부터 호석은 정국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나름 티를 안내려고 무척이나 노력은 했으나 자타공인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으로 유명한 호석이기에 아마도 정국은 알음알음 그것을 간파했을 것이라 호석은 확신했다. 단적인 예로 평소보다 은근슬쩍 호석을 더 챙기려 들고 붙어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호석은 양손에 제 얼굴을 파뭍었다. 며칠 전 정국이 스치고 지나간 모든 부분들이 열이 나듯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호석의 세계는 마치 거꾸로 뒤집힌 것 처럼 불안하고 어지러우며 혼란스러웠다. 낯설은 그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호석은 계속해서 도망치고 또 회피했다. 그럴수록 더욱 바싹 쫓아오는 정국의 시선이 호석에겐 두려움이자 기쁨이었고, 절망이자 희망이었으며, 죄책감이자 달콤함이었다.
그 양극의 감정의 줄다리기 가운데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호석의 한 쪽 귀에 남준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하니까 애가 이상한 것만 배워서 그러는거 아냐. 다른 쪽 귀에 지민이 속삭였다. 정국이 이제 애 아니에요. 

 

정국의 두 눈이 제 가슴을 꿰뚫는 순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메마른 들풀처럼 그림자 하나 남김 없이 사그라질 자신의 얄팍한 감정의 방어선을 무슨 짓을 해서든 사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방어선 아래 뭍혀져 있는 자신조차 아직 가늠할 수 없는 감정들을 모조리 토하고 끄집어 내어 그 태양 아래 너절하게 널어놓고 싶은 마음 역시 너무나도 간절했다.

 

마치 40도의 일교차를 오가는 사막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호석은 생각했다.

 

 

 


 

 

 

-형, 정국이 지금 방에 와 있는데. 어떡할거에요?

 

부엌 식탁에 앉아 일본어 교재를 풀고 있던 중 뜬 카톡 알림을 호석은 잠시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앞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호석이 공부하는 양을 보고 있던 석진이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며 핸드폰을 곁눈질 하기에 서둘러 그것을 의자에 걸린 웃옷 주머니로 쑤셔넣었다.

 

"....아니, 그... 지금 작업실에 좀 가야할 거 같아요."
"지금? 이 시간에?"
".............그, ...러게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별 일이 다 있다는 듯 쳐다보는 석진의 시선을 피해 애둘러 교재들을 정리하고는 웃옷을 둘러입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 형한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이라도 해 볼까? 에이, 아냐. 안돼. 주머니 속의 카드와 핸드폰을 손으로 만져 확인하며 현관으로 서둘러 나가는 것을 석진이 종종거리며 쫓아 나왔다. 한 손에는 맥주캔, 다른 한 손은 바이바이.

 

"어어, 제이홉. 형이 술만 안 마셨어도 데려다 줬을텐데 말여."
"아이, 됐어요. 형도 피곤한데 무슨 운전이에요. 택시타고 갈거니까 걱정 안해도 되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흔드는 석진을 향해 호석 역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망가는 주제에 잘도 웃음이 나오는구나.

 

호석에게는 정국이 있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민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의하는 답장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딱히 작업실에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몸이 반응하는 대로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자신이 한심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갈까? 근데 들어가면 뭐 어쩌려고?
풀 죽고 고민 많은 호석의 등 뒤로, 삐리릭, 잠겼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몸을 현관문 사이에 낑긴 채로 반만 문 밖으로 나온 석진이 문을 닫기 전과 같이 손을 흔들며,

 

"어어, 제이홉. 형이 멀리 안나갈게."
"......예, 형. 들어가서 쉬어요."

 

그리고 말과는 다르게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는 호석을 쫓아 쭐래쭐래 함께 몸을 싣는다. 뭐지, 이 형? 
평소같은 장난이려니 싶어 맞장구 쳐주며 대꾸를 할까 무시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 석진이 맥주를 홀짝 꿀꺽 하는 소리만 반복적으로 울렸다. 아, 진짜 뭐지, 이 형?

 

"형, 이제 진짜 들어가요. 배웅해 줘서 고마운데 이제 진짜 들어가요."
"어어, 제이홉. 조심해서 가고."

 

호석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후다닥 앞으로 달려나갔다. 석진은 분명 말을 저렇게 하고 쫓아 올 심산인게 분명했다. 이미 눈이 장난을 치고 싶어서 희번뜩 거리는 것을 호석은 놓치지 않았다. 짜바닥 짜바닥 호석의 슬리퍼가 바쁘게 땅을 치는 뒤로 짭짭짭짭짭 석진의 슬리퍼가 놓치지 않을 집념으로 따라붙었다. 한참이나 깊은 밤 중이라 함부로 크게 웃지도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신발 탓에 빨리 뛰지조차 못하는 둘 만의 기묘한 술래잡기였다.

 

"너 왜 자꾸 도망가!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형이 쫓아오니까 그러지! 형은 뭔데 왜 자꾸 쫓아와요!"
"너가 자꾸 도망가니까 그렇지! 왜 도망가냐구!"
"형이 자꾸 쫓아오니까 그런다니까요! 아, 왜 쫓아오냐구요!"
"닥쳐! 도망가지마! 같이가, 쩨이홉 같이가!!"

 

같이 가자는 석진의 부름에 호석은 발걸음을 멈췄다.
왜 도망 가냐고? 그러게. 애초에 도망갈 이유는 뭐였던거지?
호석이 멈춘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속도를 줄이며 따라와 어깨에 팔을 걸치는 석진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호바, 나 편의점 가서 맥주 사줘. 나 그럴라고 너 쫓아나왔어."
"아니 뭔, 그럼 같이 나가게 기다리라고 말을 하던가. 하다못해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오지 그랬어요."
"아니야. 너가 나갈 때, 그리고 내가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바로 나가야 되는거야. 옷 갈아 입는 중에 귀찮다고 맘 바뀌면 어떡해. 또, 내가 기다리랬는데 너가 싫다고 먼저 가버리면 어떡해. 생각 했을 때 바로바로 실행에 옮겨야지. 인생은 타이밍이야, 호바."

 

짤박 짤박 거리는 슬리퍼, 손에는 주정뱅이 마냥 맥주캔, 샤워를 마친 부스스한 머리, 잠 들 준비 완벽한 파자마에 잠바떼기를 걸쳐입고 기어이 자신을 쫓아나온 석진의 말에 머리 속에 뿌옇게 내려앉았던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손에 잡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맥주를 사는 김에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물고 숙소로 함께 돌아가는 도중 내내 왜 작업실에 가지 않느냐고 캐묻지 않는 석진에게서 호석은 그가 단순히 맥주를 사달라고 쫓아나온 것은 아니었음을 눈치챘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갑자기 핸드폰을 숨기며 느닷없이 작업실엘 가야한다고 나서던 상황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기에. 무슨 일인지 궁금할 법 함에도 그 이상 캐묻지 않고 호석의 말을 기다리는 듯 아닌 듯 말 없이 발걸음을 맞춰주고 있는 석진이 고마웠다.
...역시 이 형한테 어쩌면 좋을지 물어볼까... 

 

"......형, 내가 만약에 내가 맥주 사주기 싫다고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뭘 어떻게 해. 그냥 집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사달라고 떼 쓰던가 했겠지. 근데 난 너가 사줄 걸 알고 쫓아온건데."
"그럼 형은... 왜 맥주가 마시고 싶어요? 아니, 맥주 마셨다가 내일 얼굴이 띵띵 붓는다거나, 컨디션 때문에 연습 망쳐서 민폐 끼치나, 형이 술주정뱅이라고 팬들이 싫어하거나... 또 뭐... 암튼 그런 걱정은 안해요?"

 

모든 것을 다 드러낼 용기는 없어 비유적으로 맥주와 자신의 감정을 치환한 고민을 은근슬쩍 내비추는 얼굴이 복잡했다. 여전히 석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것인지, 반대로 자신의 속에 있는 고민의 실체를 들키면 어쩌지 하는 호석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꽤나 비약이 심한 질문임에도 석진은 진지한 얼굴로 담담히 답했다.

 

"안해. 마시는 걸 참는건 그냥 쌓이는 스트레스지만, 마시면 스트레스가 풀리잖아. 그 후에 벌어지는 일은 미리 예방 할 수 있거나 그 때 가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니까. 맥주가 마시고 싶어? 그럼 마시는거야."

 

석진은 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을 따 호석에게 건네었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거야, 머리 속으로 그 말을 되뇌이자 쉽게 취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탓에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가 자석처럼 손에 철썩 붙어왔다. 쌉싸름한 그 탄산이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에는 말야,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들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것들, 22%는 사소한 것들이고, 4%는 어떻게 바꿀 수 없는 거래.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그...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랬어. 걱정해서 해결될 거 하나도 없는데 뭐하러 걱정해."

 

96%의 쓸데 없는 걱정.

 

걱정을 한다고 정국이 자신이 잠 든 사이 했던 행동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걱정을 한다고 그 행동에 두근대던 자신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걱정을 한다고 정국이 저에게 그보다 더 한 행동들을 해 온 것 역시 아니며, 걱정을 한다고 자신과 정국이 저절로 사귀게 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차거나 차이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사귀었다가 깨져서 멤버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둘의 관계가 까발려지게 되는 것 역시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껏 걱정한답시고 제가 한 일이라곤 머리 속으로 북치고 장구치고 만리장성까지 쌓아 우주까지 날려보낸 상상을 근거로 정국을 제게서 밀어낸 것 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입맛이 써 손에 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김이던 어쨋던 그냥 직접 부딫혀 보는게 이대로 우유부단하게 혼자 고민하는 것 보다는 훨씬 생산적이겠네. 그리 마음을 먹자 다음 행동은 의외로 간단했다. 꽤나 양이 줄은 맥주캔을 석진에게 맡기고 호석은 핸드폰을 꺼내 아직까지 미뤄뒀던 카톡의 답장을 썼다.

 

-나 지금 들어간다. 정국이 아직 내 침대에 있어?

 

전송.

 

메세지 옆 숫자는 순식간에 사라졌으나 한동안 핸드폰을 들여다 보아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되었던 호석은 세상 홀가분한 기분에 두 어깨가 가벼워 진 듯 했다. 그저 흐르는 물처럼 이리저리 상황 가는 대로 맘 가는 대로 휘뚜루마뚜루 그렇게 맡겨버리자고 생각하자, 그간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다 별 것 아닌 것 같았고 죄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싶었다. 그냥 헛헛하니 웃음이 났다.

 

"....형이 뭐 퍼센트가 어쩌고... 그런 말 하니까 되게 뭐랄까... 낯설다. 숫자까지 다 외우고 그러니까."
"하 참 나, 얘가 나 무시하네. 임마! 나 대학 나온 사람이야~!"
"여어얼~~ 찌인~~!! 여어얼~~!!"

 

깔깔거리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경쾌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소소한 안주거리로 맥주 한 캔과 함께 돌아오는 숙소길은 괜히 신이 나서 들썩 들썩 음악도 없이 춤도 췄다.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지민아, 정국이는?"
"...형 답장 하도 안 오길래 자기 방 가서 자라고 했어요."
"...아, 진짜?"
"왠일로 술을 다 마셨어요? 졸려보이네. 얼른 잠이나 자요."

 

 

 

 

 

정말로, 그간 걱정이 무엇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다 괜찮아졌다.

 

정국은 더 이상 호석의 침대를 찾아오지 않았다.
딱히 호석을 피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전처럼 치대거나 뭉개고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대신 지민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 듯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몰랐던 자기 마음만 괜히 들춰 본 호석을 빼고는, 정말로.

 

다, 괜찮아졌다.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인생은 타이밍이야, 호바. - 호석이가 놓친 석진이의 조언...

걱정에 대한 석진이의 대사는 어니 J. 젤린스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거래요.
...금방 사라질 커플링 하나에 혼자 머리 속으로 결혼까지 생각한 것 같은 호석이... (눈 질끈)

[2019.02.0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