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이 돈으로 양인의 신분을 사고, 양인이 돈이 없어 신분을 파는 시대의 이야기이다. 양반이니 비가 와도 뛰지 말아라 먹을 때도 등을 꼿꼿이 하고 먹어라 하던 것도 곰팡내 나는 이야기다 뒷소리를 듣고, 비옥한 땅마지기와 엽전의 갯수가 권력이 된 지 오래인 이 때, 한 마을에 남준과 호석이 내울을 가운데로 두고 살고 있었다.
남준의 집안은 타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것들을 내다파는 큰 손으로 그 마을에 점차 세를 넓혀가고 있는 가문이고, 호석의 집안은 한 때 그 동네의 큰 어른을 여럿 모셨던, 좋게 말하면 청렴하고 참으로 선비다운 집안,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하고 시대를 읽지 못하는 저물어가는 태양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상반된 집안이 개울을 건너로 마주하고 있다보니 은근히 상호간에 신경전이 있었고, 신경쓰고 바라보고 있던 것을 태교 삼아 자식을 낳은 것인지, 남준과 호석은 마치 반대 집안 자식인 것 같은 성격을 하고 태어났다.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고 늘 신중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발랄하게 산으로 들로 뛰어노니는 것을 좋아하는 호석과, 사람 만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고 셈에 능하게 인간관계를 가지라는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방에 앉아 책을 읽거나 아무에게나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남준은 같은 해에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둘의 성격이 이러하고 집안들의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주변의 이목이 둘을 경쟁 상대처럼 부추기는 면이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 탓에 그 둘은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괜한 호승심에 얼굴을 마주하기만 하면 쓸데없는 핀잔을 한 두 마디 던지면서도, 또 그런 주제에 곧잘 붙어다니기도 하는 묘한 죽마고우의 관계로 자라났다.
"야, 정호석 너는 말만한게 체통도 없이 맨날 뛰어다니냐? 그러다 어디 한 군데 깨지고나서 울지나 마라."
"웃기고 있네, 김남준. 지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여기저기 깨부수고 다니는게 누군데 무슨 염치로 그런 소릴 하냐? 그러고 다닐 바에야 집에 쳐박혀서 너 좋아하는 책이나 왠종일 읽지 그러냐."
말은 그리 하면서도 뒤돌아 가만 생각해보면 마냥 화내라고 하는 소리도 아닌 것 같기에, 내심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티격태격 '넌 그렇게 칠칠맞아서 누가 데려가냐, 나니까 참는거다.' '누가 너랑 결혼이라도 한다냐. 너랑 결혼하느니 그냥 평생 혼자 산다' 밉살스런 소리나 하는 것이 입에 배어버렸다.
내심 은근 서로 '쟤는 나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어렴풋 생각은 하면서도, 겉으로는 모르는 척 하고, 티를 낼라치면 핀잔으로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내심 섭섭한 티가 보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우위에 있다 착각하며 그렇게 서로가 떨어지지 않고 평생 이같이 지내리라는 마음에 투닥투닥 지내던 것이 어느새 청소년기를 맞이하며 이르다면 그 나이 또래 중에는 혼담이 오가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둘이 티격태격을 하던 두근두근을 하던 둘의 집안에서는 알바가 아니었고, 어느날 호석의 아버지는 그를 불러 혼기가 찼으니 옆마을 정승댁 외손자와 혼인을 하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생각해보자면 곧 굶어 죽더라도 신분을 그리도 중요시 생각하는 호석의 집안이 애초에 남준의 집안과 사돈을 맺을 일은 없었음에도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어린 마음에 호석은 적잖이 충격을 받고 그나마 믿을 구석이라곤 제 맘과 같을거라 생각하는 남준을 찾아간다.
"남준아, 아버지가 나 혼인하란다."
"..............뭐? 너같은 왈가닥을 누가 데려가냐?"
"너는 아니니까! 너는 아니라구! 너가 아니라구! 이 바보야!"
"야! 나도 너랑 혼인 안해! 너랑 혼인할바에 평생 혼자 산다니까?! 누가 누구보고 바보래!"
마지막까지 알량한 자존심에 저 데려가 달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면서 씩씩거리는 호석과 그저 평소와 같은 짖궂은 심술이겠거니 왈칵 되받아치는 남준의 둔하고 눈치 없음은 두 사람을 다른 길로 걷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로 이끌고야 말았다.
결국 얼마 안가 정말로 호석은 옆 마을 정승댁 외손자에게 혼인을 들고, 가마가 정승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산기슭에 숨어 바라만보던 남준은 그 길로 과거를 보겠노라며 돈과 책을 싸들고는 한양으로 떠나버린다.
전정승댁 외손주 정국은 채 젖을 떼기도 전에 병약했던 어미를 여의였고, 그런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버지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정승댁의 하나 뿐인 자식이자 애틋한 사랑으로 이른 나이에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버린 그 부모에 대한 안타까움에 온 집안 사람들은 정국을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금이야 옥이야 오냐오냐 키웠고, 그 결과 저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하고, 장난꾸러기 똥고집쟁이 미운 나이 아홉살 전정국으로 자라나 버렸다.
정승의 나이가 연로하여 낙향한 바, 저 죽기 전에 정국의 짝을 찾아 혼인을 올리는 모습을 봐야겠는 마음과, 몸과 마음의 병으로 요절해 버린 제 며느리와 아들 같은 결과를 정국에게서도 봐서는 안되겠다는 마음, 그리고 천둥 벌거숭이 같은 정국을 잘 잡아 이끌어 줄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아는 사람들을 건너 건너 수소문으로 양반 집안이되 밝고 당차고 건강한 짝을 찾아보라 일렀고, 그렇게 해서 어린 정국의 짝지로 점지된 것이 옆마을의 호석이었다. 나이차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 점이 오히려 정국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승은 둘 셋 고민할 것도 없이 호석을 손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어하였다.
몰락해가는 양반 가문인 호석의 집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쁜 혼사 자리였고, 그 결정에 호석의 의사가 반영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혼인이 무엇인지, 서방이 무엇이고 색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코찔찔이 정국의 의사가 반영되는 일 역시 없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서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호석은 남준과 떨어져 가마를 타고 옆 마을로 혼인을 가게 되었고, 아직 잠투정이 심한 정국은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은 상태로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마냥 예복을 입고 인사를 올리고 혼사를 치뤘다.
온 동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구경을 와 꼬마신랑이 혼인을 올린다고 귀엽다고 깔깔거리지만, 막상 당하는 정국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재주 부리는 원숭이 꼴이 된 듯 하여 불만으로 입이 댓발 나왔고, 정승댁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제 서방될 사람이 저 반토막 만한 꼬맹이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얼굴이 파리해진 호석에게 있어 이 혼인은 악몽이었고 도망치고만 싶은 자리였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이리 하였다 저리 하였다 하는 상황의 종결지점은, 소담히 펼쳐진 이부자리 하나, 그리고 그 위로 베게 둘이 나란히 있는 방 안으로, 둘은 거의 밀어넣어지다시피 합방을 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채이고 시달려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데, 지치지도 않은지 제 앞에 쪼그려 앉아 동그란 토끼눈을 하고 저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제 신랑이라는 꼬맹이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너가 이제 내 각시야?"
팔리듯 혼인을 온 것도 서럽고, 마음하고 상관없이 합궁이나 하라는 듯한 이부자리도 서럽고, 난생 처음 부모와도 떨어지고 정든 마을과도 떨어져 생판 처음보는 곳에서 앞으로 살아야 할 것도 서럽고, 무엇보다 제 서방이 남준이가 아니라 앞으로는 이 코딱지만한 꼬맹이라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 우우우, 눈물이 와르륵 차오르는데,
"어어? 각시야, 울면 안돼.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각시를 아끼고 보살피고 사랑해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이 꼬마가 스스로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할까, 그 말이 위로는 커녕 현실에 대한 괴리감과 서러움만 부추겨 기어이 호석은 와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아이처럼 울어버리는 호석에게 되려 당황한 정국이 달래려고 얼굴도 들여다보고 웃기려고 재주도 부려보고 안아도 보아도 도저히 울음을 그치지 않자, 답답함과 서러움이 전염된 듯 정국 역시 와아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귀하신 손주 울음소리에 온 집안 사람들이 튀어나와 신혼방을 열어제꼈고, 둘 다 끄집어내어지듯 끌려나와 이번엔 정승이 계신 안방으로 굴려지듯 집어넣어졌다.
"새아가야, 너는 어찌 청승맞게 이 기쁜 날을 눈물로 치장하려는게야? 네겐 우리 집안이 마음에 안드는게냐? 네 서방이 마음에 안드는게냐? 그것도 모자라서 나이 많은 네가 본이 되지는 못할 망정 서방을 울려? 어서 이 앞에 서서 종아리를 걷어부치거라."
추상같은 정승의 기세에 눌려 몸은 와들와들 떨리고 서러움에 두려움까지 더해져 파리한 얼굴로 눈물은 뚝뚝 흘리면서도 시키는대로 종아리를 걷어부치고 회초리 맞을 생각에 이를 악물고 서자 뒤로는 정승이 회초리를 꺼내드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지옥같은 하루라며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눈을 꽉 감아버리는데,
"뺘아아아악!!!!!! 할부지 내 색시 때리지마아아아악!!!!!!!!!!"
"아악! 아이구 이녀석아!! 할아비 죽는다!!!"
무슨 병아리 꼬집히는 것 같은 소리에 살짝 실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니 정국이 정승의 턱수염을 붙잡고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쪼끄만 것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제법 체구가 있는 정승의 몸이 고사리만한 손에 이리저리 딸려다니며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꼴에 웃음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이러다가 혼인식 다음 날 초상을 치르게 될 것 같아 호석은 패악질을 부리며 땡깡을 피우는 정국의 몸을 껴안고는 냉큼 정승에게서 떨궈뜨렸다. 얼굴을 시뻘겋게 해서는 할아버지가 제 색시 때린다며 엉엉 울면서도 아직도 성이 덜 찼는지 제 할비의 수염을 잡아 뜯겠다며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진정하라고 호석이 뒤에서 안고 몇 번 둥기둥기 해주자 그 품에 파고 들며 '색시야 아프지 마, 아프지 마' 하고 엉엉 우는 것이 묘하게 기특한 것 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것이 조금은 서러웠던 기분이 가시는 것 같은 호석이었다.
전정승으로서는 사실 진짜로 회초리로 내려치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어린 정국이 행동하는 것을 떠보고, 그것으로 앞으로 둘에게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할지 정하려던 깊은 마음과 생각에서의 훈육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아주 제 색시한테 눈이 돌아버려 제 할애비도 못알아보는 불효의 패악질을 부리는 정국을 적나라하게 목도하고는, 잡히고 흔들린 수염보다 마음에 상처를 단단히 입은 정승은 사흘간 앓아 누운 척을 하였다.
"각시야, 나 잠자게 노래 불러주라."
"노래? 나 노래 못하는데?"
"아이, 그래도 불러주라."
"....못한다고 놀리기 없기야?"
"알았어! 빨리 불러주라!"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 했더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더래요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안 그런 척 했더래요.......
....안 그런 척 했더래요....."
"우리 각시는 노래도 잘한다~."
".............."
".....각시야, 울어.....?"
".........아니, 그냥 눈이 간지러워서......."
"우리 각시는 눈 간지러우면 안되지."
"응. 잘자라, ...우리, 서방님"
과연 뒷편이 나올 수 있을지....
어제 갑자기 머리에서 떠나질 않던 꼬마신랑 + 갑돌이와 갑순이 를 엮어 본 내용입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떠오른 것이 지박령처럼 머리에 붙어서 떠나질 않기에 구마의식을 하듯 포타에 남겨봅니다...
[2019.11.23 작성]
포스타입이 편하신 분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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